(광주) 현춘산
뢰봉이 우리곁을 떠난지도 어언간 반세기가 흘러갔다. 약관의 나이의 너무나도 짧은 생애였다. 그 이듬해 3월 5일, 모택동주석이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는 호소를 하였다. 3월의 신주대지에 우렁찬 봄우뢰가 울렸다. 전국 상하가 끓어넘쳤다.
그로부터 3월은 뢰봉의 체취를 안고 훈향을 풍기였다. 3월은 봄날의 상징이였고 뢰봉의 이미지였다. 해마다 3월이 오면 뢰봉을 따라배우는 열조가 일어난다. 붉은 넥타이를 곱게 맨 어린이들이 청소도구를 안고 거리에 떨쳐나선다. 공청단휘장을 가슴에 단 젊은이들이 리발도구를 들고 골목들에 나선다.
3월은 이렇게 감동과 격정과 랑만의 나날들로 이어간다. 3월은 중국 백성들의 집단적기억이고 뢰봉은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뢰봉은 결코 우리곁을 떠나지 않았다. 방금 버스에서 운신이 불편한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내드린 젊은이가 바로 뢰봉이였다. 비 내리는 날 아기를 안은 낯모를 각시에게 자기의 우산을 준 아저씨가 바로 뢰봉이였다. 거금이 들어있는 묵직한 가방을 주어 임자에게 돌려준 착한 아줌마가 바로 뢰봉이였다.
3월의 봄우뢰는 오늘도 울리고있다. 3월의 향기는 오늘도 짙어간다.
3월은 또한 3월만이 아니였다. 뢰봉은 그 혼자만이 아니다. 지진, 홍수, 폭설, 산사태 등 천재지변들이 일어났을 때면 3월의 봄우뢰는 언제라도 울리였고 뢰봉의 발자취는 간곳마다 찍히였다. 재해지구에 뻗치는 무수한 손길들에서, 장사진을 이룬 무상헌혈 대오속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이름없는 뢰봉들을 본다. 3월의 훈훈한 봄향기를 느낀다.
개혁개방의 년대, 시장경제체제의 세월에도 뢰봉은 여전히 뢰봉이다. 뢰봉의 소매점에는 가짜술과 가짜담배가 없고 뢰봉의 음식점에선 시궁창기름을 쓰지 않는다. 뢰봉은 벼슬을 하기 위해 뢰물을 들고 다니지 않고 돈에 유혹되여 비리를 눈감아주지 않는다. 뢰봉은 할일 없는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려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2차, 3차를 하지 않으며 뢰봉은 몸파는 아가씨의 요염한 웃음에 넋을 빼앗기지 않는다.
뢰봉은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람들의 대명사이다. 뢰봉은 추호도 리기적이 아니고 오로지 남을 위하는 사람들의 전형이다.
뢰봉은 바로 3월이다. 꽁꽁 얼었던 대지에 훈훈한 입김을 넣어주는 사랑의 화신이다. 봄날처럼 따뜻한 정을 지닌 뢰봉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따사롭고 화창한 춘삼월이다.
이 나라 방방곡곡에 영원히 풍겨나라-3월의 향기, 사랑의 향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