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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5)-못 말리는 내사랑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2.05일 11:07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결혼등록을 해놓은 당년의 처녀총각-최정금부부.


1979년 4월 나는 마침내 연길시로 돌아와 시내안의 한 잡화상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과 재무지식을 겸비하고있던 나는 점차 두각을 내밀기 시작하였고 구입원에 이어 업무부 경리로 성장했다.


당원이고 또 잡화상점의 부경리이다보니 나는 미혼녀성들중에서 비교적 인기가 높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신랑감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지도자의 아들을 소개해주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또 잘사는 집 청년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유독 군인을 그토록 좋아했다. 나중에 나는 료녕성 청원현에서 군인생활을 하고있는 한 남자를 알게 되였다.


그때 그 남자는 료녕성 청원현 모 부대 문예대의 패장으로 있었는데 그의 모습에는 군인의 패기와 영준함이 넘쳐흘렀다. 거기에 지적인 기질과 우아함까지 겸비하고있어 나를 깊이 빠져들게 했다. 그이가 쓴 편지는 아주 랑만적이고 글줄마다 읽는 사람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다. 내가 사랑의 단꿈에 빠져있을무렵 부모님들은 도리여 나의 사랑을 극구 반대해나섰다.

부모님들은 《능력있는》 딸이 지위가 있거나 돈이 많은 가정에 시집가 어려운 가정생활에 보탬을 해줄수 있기를 은근히 바라고있었던것이다.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렵다고 하니 딸이 아무리 좋아하는 《사위감》일지라도 마음에 들리 만무했던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애인과 같이 집문을 떼고 들어서는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식칼을 거머쥐고 우리를 문밖으로 내쫓았다. 늘 침묵하고 온순하던 어머니마저 비자루를 거꾸로 들고 우리를 집밖으로 내몰았다.


비록 가정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그럴수록 더 깊어만져 서로 갈라질래야 갈라질수가 없게 되였다. 우리는 계속 편지로 그리운 정을 주고받았으며 후에는 아예 부모님들 몰래 결혼등록까지 하였다. 법률상에서 우리는 엄연한 부부가 됐던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부모님들도 나중에는 하는수 없이 우리들의 혼사를 허락하고야말았다.


사랑은 랑만적이고 달콤한것이지만 결혼은 현실적이고 담담한것이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다툼으로 시작되였다. 련애할 때 처가집 식구들의 차거운 랭대속에서도 남편은 묵묵히 참고견디더니 우리 집에서 결혼식을 끝내자 인내력은 한계에 달했지는 갑자기 화산처럼 폭발했다.

남편은 기나긴 세월동안 억눌렸던 원망을 술기운에 담아 토로하기 시작했다. 《최씨가문이 무엇이 대단해서 나를 업신여기는가? 이집 딸보다 못한것이 뭔데 짝이 기운다고 란리들인가…》줄곧 점잖기만 하던 그이가 처가집에서 술주정을 부리면서 술잔들을 바닥에 들러메쳤다. 집안 친척들이 달려들어 술주정을 부리는 신랑을 말렸고 나는 너무 부끄럽고 서러워 대성통곡했다. 응당 즐겁고 유쾌해야 할 우리들의 결혼 첫날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여버렸다.


이튿날 술에서 깬 남편은 토라져있는 나에게 잘못했다고 열백번도 더 넘게 사과하였다. 남편의 달콤한 감언리설에 나는 너그럽게 그이를 용서했다. 부부연은 하루저녁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데 안해로서 어찌 한평생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할 남편을 용서 한번 하지 않고 미워할수 있겠는가?


시집가서 자식을 낳아 키우는것은 녀인의 천직이다. 아이가 있어야 가정이 원만하다고, 생활이 미만하다고 할수 있는것이다. 그래야 녀인은 또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나하고는 숨박곡질이라도 하는것 같았다. 내가 아이를 욕심내면 욕심낼수록 임신이 됐다가는 류산이 되여버리는것이였다. 련이어 3차례나 류산을 하고나니 아이를 갖고싶은 마음은 누구도 리해할수 없을정도로 간절하고 절실해졌다.

하루빨리 아이를 가져보려고 나는 단위에 말미를 맡고 남편의 부대에 가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난후에도 아이는 들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부대지도일군은 남편을 찾아 담화를 나누고 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남편이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야 할것 같다고 말했을 때 나는 가슴이 미여지는듯 아파났다.


집으로 돌아오는동안 나는 기차안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임신했다는것 알게 되였다.


/연변국제무역그룹 회장 최정금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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