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력사학계가 장백산 린근의 보마성(寶馬城) 유적에 대해 금(金)나라가 세운 건축물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11일 신화망(新華網)에 따르면 길림대학 고고연구센터는 국가문물국의 승인을 받아 지난 8~9월 보마성 유적에 대한 유물 발굴사업을 벌였다.
보마성 유적은 길림성 안도현 이도백하(二道白河)진에서 서북쪽으로 4㎞가량 떨어져있으며 장백산 천지에서 북쪽으로 30㎞ 거리에 있다.
그동안 보마성은 1천200년전 발해가 당나라와의 중요한 교통로에 축조했으며 800년전 금나라 시대에도 사용된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연구팀은 보마성이 발해가 조공로에 세운 중요한 역참이였다는 기존 학설과 달리 이번 발굴사업에서 금나라 황실을 상징하는 기와조각 등이 다수 출토됨에 따라 금나라 황실이 장백산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보마성 유적은 현재 465m의 성벽과 성안 중심부에 대형 건축물 기초 3곳이 남아있다.
이번 발굴작업은 726㎡ 넓이의 성내 건축물 기초 한곳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짐승얼굴(獸面) 모양을 새긴 와당(瓦當)과 처마끝의 기와, 장식물 등 도제(陶制) 건축재료 100점 이상이 출토됐다.
연구팀은 룡과 봉황 무늬 건축재료들이 황실을 상징하며 다양한 쇠못 수백개와 도자기, 철기, 동기도 금나라시대 유물의 특징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또 기초만 남은 건축물의 형태가 내부의 기둥을 없앤 감주(減柱)구조여서 당시 건축물가운데 보기 드문것으로 평가했다.
발굴을 지휘한 길림대학 조준걸(趙俊杰) 박사는 "이번에 발굴을 벌인 건축물 기초는 금나라 황제와 백관이 태양제를 올리던 전각인 조일전(朝日殿)의 기초와 비슷하며 유적과 유물 모두가 최상급이여서 보마성은 금나라 황실이 장백산신에 제사를 올리던 사당이였다고 판단할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런 결론이 "금사(金史)" 등 당시 력사를 기록한 사서 내용과도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장백산을 자신들의 발상지로 여겼다.
금나라 세종(世宗)은 중원의 황제가 태산에 제사를 올리는것을 모방해 1172년 장백산신을 흥국령응왕(興國靈應王)으로 봉하고 장백산 북쪽에 사당을 세워 봄·가을에 제사를 올린것으로 금사에 기록돼있다.
이어 금나라 장종(章宗)은 1193년 장백산신을 개천굉성제(開天宏聖帝)로 높였다는 기록도 있다.
국내 력사학계는 이번 발견이 금나라 시대의 신앙, 풍속, 건축양식 등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고대 북방의 산신제와 중원 황실의 산신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이바지할것으로 기대했다.
연구팀은 래년에 보마성 유적에 대한 발굴작업을 재개해 성안 건축물의 분포와 구조 등을 추가로 연구할 계획이다. 중신넷
료녕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