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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시조선족친목회 길경갑회장, 그는 누구인가?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1.04일 11:14
인물이름 : 길경갑

  길경갑 프로필

  생년월일: 1964.12.16

  출생지: 중국 료녕성 심양시

  1981.11-1986.10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 윁남자위반격전 참가

  1986.11-1989.12 심양시 북릉향 화평촌 공청단위원회 서기

  1990.1-1995.9 심양액압물자회사 경리

  1994-1996 심양시당교 수료

  1995.10-1999.3 심양화신그룹 부서기

  1999.4-2004.8 심양화신그룹 리사장 및 서기

  2004년 심양기원그룹 설립

  2004년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현재 심양시조선족련의회 회장

  2012년부터 세계한인무역협회 부회장

  [수상 경력]

  윁남자위반격전 참가기간 개인 3등공, 집체 2등공 세움, 료녕성우수향진기업가, 심양시우수기업가, 세계한민족청년상, 우수정협위원, 심양시민족단결진보개인상, 중국조선족 10대 신예기업가, 한국국무총리상 수상.

  

  윁남자위반격전에서

  (흑룡강신문=하얼빈) 1981년, 길경갑은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1979년 2월에 시작된 윁남자위반격전이 정리되고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중윁변경에서는 수시로 변경출동이 발생했고 부상자와 희생자들이 생기고있었다.

  입대후 얼마 안되여 길경갑은 최전선에 파견되였다. 통신병 반장으로 적들의 통신을 교란하는것이 주임무였지만 지뢰가 잔디처럼 깔린 최전방에서 생명은 시시각각 위협을 받고있었다.

  하지만 길경갑은 의연했다. 많은 병사들이 유서를 썼지만 길경갑은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남아답게 떳떳하게 죽자고 각오하니 오히려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어느날 밤, 긴급임무가 떨어졌다. 적군 가까이에 접근하여 무선통신을 교란해야 했다. 반 전사들을 거느리고 어두운 밀림속을 헤쳐가는 그에게도 죽음의 공포가 어둠처럼 밀려왔지만 반장인 그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지뢰가 깔린 수풀속을 맨 앞에서 나가는 그의 등뒤에서 갑자기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면서 뒤돌아보니 따라오던 한 병사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던것이다. 극도로 긴장된 상태였기에 어떠한 일도 벌어질 수 있었다. 눈 깜짝할사이에 탄알 한 배짐이 풀려나갔다. 사격한 병사는 몸을 덜덜 떨면서 탄창을 갈아넣고있었다.

  사격한 병사의 바로 앞에서 가던 병사가 사격한 병사의 뺨을 쥐어박더니 가슴에 총구를 겨누면서 으르렁거렸다.

  《개자식 미쳤어! 네 놈 총알에 죽을번 했잖아!!》

  사격한 병사도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였다.

  길경갑은 조용히 그들 중간으로 다가가서 서로 마주 겨눈 총구를 밖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그리고는 옆의 병사들에게 두 사람의 총을 몰수하라고 눈짓했다.

  한차례 엄청난 사고가 조용히 막을 내리는 순간이였다……

  명령에 의해 전선을 떠날 때 그의 가슴에는 개인 3등공 훈장과 집체 2등공 훈장이 달려있었다.

  

  역경을 헤치고

  제대후 그는 화평대대(화신그룹 전신) 공청단 서기사업을 하다가 촌 기업인 심양액압물자공사 경리로 발탁되면서 기업인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후 그의 능력과 가능성을 보아낸 대대 지도부에서는 그를 심양시당교에 파견해 학습하게 했다. 여기서 3년간 맑스주의리론과 정치경제학리론을 배우면서 정치적으로 보다 성숙되고 경제활동의 리론적기초를 닦은 그는 1995년 화신그룹 당총지 부서기로 발탁되였다.

  이 기간 그는 정열적으로 사업하면서 많은 성과들을 쌓아 북릉향 인민대표, 우홍구 정협위원으로 선거되며 우홍구 우수로동자, 우홍구 우수당원으로 표창을 받았다. 1999년 4월 그동안 쌓은 성과들이 인정 받아 30대의 젊은 나이에 화신그룹 당위 서기 겸 리사장으로 취임한 그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동안 화신그룹은 소농경제의 농촌생산대로부터 58개의 기업을 소유한 기업그룹으로 발전했지만 모순과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룹 소유의 농경지가 부당하게 팔려나갔고 기업이 58개나 된다지만 촌민들의 생활에는 질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고민끝에 그는 우선 부당하게 팔려나간 농경지의 값을 돌려 받기로 했다. 동분서주한 보람으로 끝끝내 수백만원의 자금을 회수하였다. 그러나 부분적 기업인들의 불만도 자아냈다. 그는기업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그들을 자기 주위에 묶어세웠다. 자기를 제일 반대하는 기업인부터 찾아다니면서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면서 진정을 보여주자 기업인들이 하나 둘씩 뭉치기 시작했다.

  다음 그룹 관할범위내에 있는 커다란 소택지를 메우고 거기에 그룹청사를 짓고 촌민들을 위한 아파트단지건설을 시작했다.

  그다음 동북 최대의 페강재교역시장을 건설하여 심양지역 곳곳에 널려있던 페강재시장을 통합했다.

  아파트단지를 촌민들에게 엄청 싼 가격으로 공급했는데 당시 가격으로 치면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강재시장이 오픈하자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 또한 엄청나서 촌민들의 복리를 해결할수 있게 되였다. 화신그룹은 그때부터 60세이상 로인들에게 달마다 경로금을 지급하는 중국내 몇몇 안되는 촌으로 되였다.로인사업, 녀성사업, 아동사업과 주거환경건설 등 사업이 줄기차게 진행되였다. 화신그룹은 더는 이전의 화평대대가 아니였고 명실상부한 기업그룹으로 발전했다. 처음에 그를 반대하고 불신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그에게 찬성표를 들어주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룹내의 58개 기업을 집체기업으로부터 사영기업으로 전환시키는것이였다. 집체기업이기에 기업들이 커질수록 기업주가 살찌고 그룹은 여위고 촌민들에게 돌려지는 리득이 적어지는 현상이 갈수록 엄중해졌기때문이였다. 그룹의 리윤을 올리고 촌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자면 반드시 기업체제를 전환할수밖에 없었다.

  국가적으로도 국영기업의 체제전환에 박차를 가하고있는 시점이였다. 하지만 다년간 집체라는 큰 산에 업혀서 리득을 챙겨왔고 또 기업체제개혁의 진의를 리해하지 못한 기업주들은 한결같이 반기를 들었다……

  누군가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했다. 누군가는 기업체제개혁이 기업주에게 불리한것만은 아니라는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길경갑은 자기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집체의 리익과 촌민들의 생활질을 높이고 화신그룹 소속 기업들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신의 명예와 지위같은것은 도외시되여도 좋았다.

  2004년 초,그는 결연히 사직을 제기했다. 촌민들이 말리고 향정부에서 허가를 하지 않았지만 그의 결심을 꺾을수 없었다. 마침내 2004년 8월 화신그룹 리사장 겸 당위 서기직을 사직한 그는 심양굉달무역회사를 세우고 대외무역을 시작했다.

  불과 반년만에 회사는 산하에 기원디지털회사, 기원환보회사, 기원건축자재생산회사 등 5개의 소속사를 둔 기원그룹을 일떠세웠다.

  같은 해, 조선족기업들의 친목과 화합을 취지로 한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가 설립되였고 길경갑이 회장을 맡았다.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을 맡으면서부터 그의 사유범위는 화신그룹을 넘어 전반 심양지역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고심하는데로 비약했다.

  

  《기업가협회 현상》

  갑자기 확장된 기원그룹도 그에게는 큰 짐이였지만 기업가협회 회장을 맡은후로 그는 더는 한개 민영기업의 지배인만은 아니였다.

  심양지역 조선족사회에서 진행하는 각종 대형 행사들의 자금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여러 조선족단체와 조선족학교들의 경비부족문제도 그가 고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들이였다. 한편 조선족기업인들이 경영과정에서 마주친 애로사항들도 그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했다.

  다년간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에서 조직하는 심양시조선족민속절, 6.1북릉유원회, 조선족예술절 등 행사들과 로인협회, 부녀협회, 문학회 등 민간단체들의 행사들, 여러 조선족학교의 행사들에 해마다 근 80여만원씩 지원하고있는데 그중 약 30만원은 길경갑 자신이 부담해왔다.

  한번은 그의 사무실에 심양시로인협회 회원들이 찾아와서 로인활동이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하소연했다. 로인들의 이야기를 듣던 그는 《일년 활동경비가 얼마나 수요되는가?》고 물었다. 기업가협회가 여러 가지 사회협찬으로 경제사정이 넉넉하지 않다는것을 알고있는 로인들이 3만원이면 기본적인 활동을 할수 있다고 대답하자 길경갑은 당장에서 《5만원이면 어떻습니까? 일년 활동경비로 충분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3만원을 제시하면서도 1만원 정도만 해결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로인들은 할말을 잃었다. 그후부터 로인협회에는 해마다 기업가협회로부터 5만원의 활동경비를 어김없이 지원받았다.

  2005년 말, 심양시조선족로인협회에서 드리는 감사패를 받아 든 길경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응당 제가 로인님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로인님들은 저에게 효도할 기회를 주었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로령화문제의 엄중성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로인을 공경하지 않는 민족은 전도가 없습니다. 저의 자그마한 행동이 우리 후대들에게 본보기가 된다면 그것은 어르신들이 저에게 가르쳐준 덕분입니다.》

  해마다 교사절이 되면 심양지역 조선족교원 1000여명이 전부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를 조직하는데 이 역시 기업가협회의 자금협찬으로 이루어지고있으며 료녕지역 조선족작가와 문학도들로 구성된 심양시조선족문학회도 해마다 기업가협회의 지원으로 많은 행사들을 조직하고있다.

  어느 한차례의 심양시조선족문학회 송년회에서 길경갑은 이렇게 말한다.

  《경제토대와 상부구조의 상호관계가 원활해야 사회가 온당하게 발전할수 있습니다. 문화와 경제의 접촉이 활발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미래가 약속되는것입니다. 나라의 세금혜택이 닿지 못하는 조선족사회의 각종 문화행사들에 우리 기업인들이 힘이 자라는만큼의 지원을 하는것은 지극히 응당한 일이며 번 돈을 민족사업에 쓴다는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심양지역에도 많은 한국인들이 상주하고있다. 그동안 심양지역 조선족들과 한국인들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직적인 교류를 진행하지 못하고있었다.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가 세워지고 재심양한국인회가 비슷한 시기에 조직체계가 정리되면서 기업가협회와 한인회의 교류로 막을 연 심양지역 조선족들과 한국인들간의 교류는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다.

  두 협회는 해마다 정기교류모임을 가지고 서로 초청하며 조선족사회와 한국인사회는 각자 진행하는 행사들에 자금과 물품을 서로 지원하면서 교류영역을 넓혀가고있다. 한국인회 축구단과 기업가협회 축구단은 해마다 수차례씩 친선경기를 진행하며 매번 경기를 진행할 때면 두 협회 회장들이 직접 출전하여 선수들을 독려하군 한다.

  한편, 심양에 상주하거나 심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조선경제인들과도 경제협력과 비즈니스(사업)를 토대로 한 관계를 형성하고 친선관계를 확대해 가고있다.

  2011년에 길경갑은 다년간 담임해온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직과 월드옥타심양지회 지회장직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사단법인 심양시조선족련의회 회장으로 되였다.

  심양지역에서 유일하게 민정부에 등록된 사단법인 회장직에 취임한 길경갑회장은 취임 첫해에 심양시조선족민속절을 성대하게 치룬뒤를 이어 2013년에 또 한차례 심양시조선족민속절을 성대하게 치뤘으며 금후 매 2년에 한차례씩 치뤄가기로 했다.

  심양시에서는 14년전부터 해마다 한차례씩 《심양한국주》행사가 개최되여 오고있는데 길경갑회장은 제1회때부터 심양시정부의 청을 받고 조선족기업인들을 조직해 열심히 참여해오고있다.

  2004년의 《심양한국주》때 《협회》회원들의 400만원에 달하는 후원으로 《한국인의 밤》행사를 성대하게 치뤄 시정부의 표창을 받은이래 그후 련속 3년 《심양한국주》행사의 중요한 일환으로 《KBS전국노래자랑》심양편,《세계한상대회》,《KBS열린음악회》를 유치해 성공적으로 치룸으로써 심양지역 조선족협회의 영향력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심양시조선족련의회에서는 근년래 심양지역조선족교원들을 표창하는 대회도 여러 차례 개최해 조선족교원들의 사기를 북돋우어주었다.

  길경갑회장이 이끄는 기업가협회의 헌신적인 거동을 밑거름으로 한 심양지역 조선족사회는 경제, 문화, 교육이 발전하고 로인사업, 녀성사업, 빈곤부축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양상을 보여주고있다.

  지난해 모 조선족언론지는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 현상》이라는 제하에 장편문장을 발표하여 《지역사회의 건설에 적극 참여하는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의 거동은 전반 조선족기업인들에게 본보기로 되며 귀감으로 되고있다.》고 지적했다.

  / 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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