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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광섬이 된 ‘조선인 지옥섬’…웃음소리를 듣는 게 고통이었다

[기타] | 발행시간: 2015.06.02일 10:16
[한겨레] [수교 50돌 새 한-일관계 탐색]

① 작가 한수산, ‘징용 현장’ 군함도를 가다



군함도(하시마)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린 조선인들의 한 많은 삶을 다룬 대하소설 <까마귀>의 저자인 한수산(69) 작가가 지난달 15일 예전의 취재 무대였던 섬 곳곳을 둘러보고 있다. 한 작가의 뒤쪽 중앙에 보이는 건물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 콘크리트(1916년 건축) 건물이다. 군함도(나가사키)/길윤형 특파원

1965년 6월22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애국가가 처음으로 울려 퍼졌다. 이날 한·일은 14년여의 긴 교섭 끝에 식민지배로 얼룩진 불행한 역사를 마감하고 국교를 정상화하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제 수교 50주년을 맞은 양국 관계는 다시 깊은 위기에 빠져 있다. <한겨레>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겪은 비극을 다룬 소설 <까마귀>의 한수산 작가와 함께 양국간 ‘기억의 투쟁’의 치열한 현장인 군함도(하시마)를 돌아봤다. 한-일 갈등의 핵심 현안이 어떻게 미해결로 남게 되었으며, 양국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고,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지 등에 대한 내용을 몇차례에 걸쳐 싣는다.

노역의 고통 곳곳 어른거리는데

‘세계문화유산에!’ 현수막 물결

사람들은 폐허 앞에서 “와, 와아”

저녁 8시에 인천공항을 날아오른 비행기는, 한 시간 남짓, 이내 후쿠오카에 닿았다. 거기서부터 고속도로를 달리기로 했다. 내 소설 <까마귀>가 일본에서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된 뒤 5년 만에 찾아가는 나가사키였다. 도착하면 자정 무렵일 것이다.

공항을 빠져나가자 차창 밖으로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걱정이 앞섰다. 내일 아침 군함도로 가는 배를 예약했는데, 비바람이 치며 파도가 거세면 부실한 접안시설 때문에 배를 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밖을 내다보았다. 부슬거리며 비가 내린다. 그러나 군함도로 가는 관광선은 출항한다는 소식이다. 배가 뜬다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항구로 향했다. 5개 회사가 경쟁적으로 운영하는 관광선은 회사마다 2편을 운항한다. 하루 10번이나 배가 드나드니 군함도 안은 종일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내가 탄 야마사해운의 4200엔 승선권에는 군함도 견학시설 이용권 300엔과 함께 기이한 이름의 요금이 포함되어 있다. ‘메이와쿠’(迷惑) 요금이 그것이다. 인근 지역 어민들의 고기잡이에 폐를 끼친다는 뜻에서 내는 ‘민폐 요금’인 셈이다.



매표소에서 승선장까지 가는 길 가득히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2015년 세계문화유산에!’라고 쓴 수십개의 현수막이 줄지어 나부끼고 있다. 나가사키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도배를 한 느낌이다.

배에 올랐지만 전망이 좋은 2층은 이미 가득 찬 손님들로 좌석이 없다.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간간이 내리는 빗발 속에 관광선이 나가사키항을 벗어나자, 선실에서는 두 개의 대형 스크린으로 주변 경관을 비춰주면서 안내방송을 시작한다. 화면에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중인 대형 선박이 비춰지자 선실에는 탄성이 쏟아진다. 왼쪽 오른쪽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려가면서 비춰주는 영상에 따라 승객들의 시선도 왼쪽 오른쪽으로 부산하다. 마치 테니스경기를 보는 관중 같다. 돈벌이가 빠질 리 없다. 그 사이사이 군함도의 사진집을 팔러 다니고, 비옷을 팔러 다닌다.

선실 벽을 따라 군함도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주르르 걸려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승객, 연간 10만인 돌파. 산업유산 붐을 타고 활기. 10년 만의 대성공…. 신문 기사를 확대해 놓은 것이다.

아파트·파친코·목욕탕…15살 조선 소년 신음소리가 들렸다

섬이 가까워 온다. 이 섬까지 끌려와 해저탄광에서 신음했던 조선인을 취재하기 위해 바쳤던 내 지난날들이 묵묵히 머리를 들고 일어서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그 오욕의 역사와 함께 징용당한 선조들의 눈물겨운 노역에 얼마나 참담해했던가. 묻혀 버릴 수도 있었을 이들의 켜켜이 쌓인 사연을 이야기로 복원한다는 생각에 결의를 다지던 나날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처연해진다.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게 내 안에 자리잡은 군함도가 그때의 그날들과 다름없이 검고 웅장한 모습으로 빗속에 다가오고 있다.

배를 내렸다. 접안시설은 예전과 달리 잘 정비되어 있었다. 연간 10만명의 관광객을 위해 이 정도의 시설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도대체 배울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견학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가는 장소는 3곳, 참혹한 폐허로 변해가는 잔해들이다. 이 세 곳을 각각 다른 사람이 맡아 안내와 해설을 한다. 내가 이 섬을 드나들 때보다 건물들은 많이 무너지고 쇠락해 있다. 색깔부터가 ‘저렇게 검었던가?’ 싶을 정도로 거무칙칙하다.

관광객들은 다 허물어진 목욕탕을 보며 우르르 몰려가 사진을 찍는다. ‘유치원이 저 높은 아파트 옥상에 세워졌습니다. 섬에 땅이 없어서 옥상에 세운 겁니다.’ 그게 뭐가 우습다는 것인지 와아 웃어댄다. ‘여기엔 파친코도 있고 극장도 있었습니다.’ 또 뭐가 우습다는 것인지 더 크게 웃는다. 마냥 즐겁다. 이들 속에 서서, 지난날 여기까지 끌려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피땀 어린 노역에 처해졌던 우리 선조들을 생각한다는 건 차라리 고통에 가깝다.

견학이라는 이름의 해설이 붙은 이상한 산책(?)이 끝나고 배로 돌아오자 ‘군함섬 상륙 증명서’라는 것을 나눠준다. 붉은 도장으로 상륙일자가 찍힌 증명서 뒤편에는 또 ‘힘을 모으자!! 세계문화유산등록에!!’라고 적혀 있다.

나가사키 항구로 돌아가기 전에 배는 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섬 주변을 돌았다.

내 소설 ‘까마귀’가 ‘군함도’로

일본서 번역출간된 지 5년

다시 찾은 그곳

폐허관광붐 타고 군함도 각광

건축공학적으로 귀한 자료라며…

거무칙칙한 건물들 사이에서

일본인들 뭐가 그리 우스운지



지난달 15일 한수산 작가와 <한겨레> 취재진이 방문한 군함도는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에 차분하게 젖어 있었다. 좋지 않은 날씨에도 군함도가 유네스코(UNESCO)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것이란 소식에 섬은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모습이었다. 관광객들은 섬에 대한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연신 카메라 스위치를 눌러댔다. 그러나 섬에 동원돼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군함도(나가사키)/길윤형 특파원

소설 <까마귀>를 출간하고 이 섬을 찾아왔던 2003년 여름, 거친 파도 때문에 나는 섬에 오를 수가 없었다. 빌린 어선을 타고 섬 주변을 천천히 돌던 그때였다. 저 옹벽 위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한 소설의 주인공 금화가 흰 치맛자락을 날리며 내게 손을 흔드는 환영을 보았었다. ‘고마워. 내 이야기를 써 줘서 고마워.’ 그런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동료 징용공들을 끌고 이 지옥섬을 빠져나가는 필사의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끝내 나가사키에서 원폭을 맞고, 금화의 손가락뼈를 움켜쥔 채 죽어간 사나이 우석…. 그도 거기 서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때 소리 없이 내 볼을 흘러내리던 눈물을 어떻게 잊었겠는가.

취재에 응해준 고 서정우씨와 처음으로 이 섬에 올랐던 때는 1990년이었다. 그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하시마 탄광으로 끌려왔다가 병이 들어 나가사키로 이송되었고, 다시 조선소에 배치되었다가 원폭을 맞았다. 가난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가출하자 아버지마저 어디론가 사라진 뒤 할머니와 단둘이 살다가 일본까지 끌려와야 했던 그는, 돌아간다 해도 고향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폐 한쪽을 떼어낸 몸으로 나가사키에 살면서 일제의 강제징용과 가혹한 노역 사실을 알리는 일에 진력했었다.

그는 학교 옆 병원(1958년 건립)과 방파제 사이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격리병동 자리를 자신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라고 증언해 주었다. 당시는 지하실이 있는 2층 건물이었다고 했다. 그 후 들어선 병원 부속건물은 3층이었다. 폐광 후 섬을 빠져나가며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인지 내가 찾아갔을 때는 녹슨 병원 비품들과 함께 빈 링거 병이 키가 넘게 쌓여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날 서씨와 나는 서로 밀어올리고 당기며 드높은 방파제 위로 올라갔다. 옹벽을 때리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내려다보던 서씨는 “늘 배가 고팠던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면서 어두운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하늘을 쳐다보았었다. “혼자 저기 방파제 밑에 와서 울곤 했지, 너무 힘들었거든. 그리고 저기였어. 저기가 맞아서 욱신거리는 허리를 구부리고 누워 있던 자리야.” 나 또한 그에게서 옛 기억을 되살려내는 것부터가 죄송하고 고통스러워 먼 바다를 내다보는데, 그가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었다. “저쪽이 고향이다. 저 바다를 건너면 고향이다. 얼마나 많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 그가 해준 이 증언은 훗날 소설 속에서 첫 장면이 되었다.

관광선이 섬 주위를 도는 동안 안내인이 특별히 강조한 건물은 30호동 아파트였다. 1916년 지어진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140가구가 입주한 광부들의 주택이었다. 준공 당시 4층에서 곧 7층으로 증축된 이 아파트는 인공적으로 파괴하지 않고 방치해 놓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건축공학적 관점에서 건물의 열악화 상태와 속도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폐광 후 군함도는 출입금지의 무인도였지만, 일본의 표현대로라면 ‘상륙을 시도하는 무법자가 많았다’고 한다. 취재를 시작한 뒤 건너편 해안의 어촌에서 고깃배를 빌려 오가곤 하던 나도 그 무법자의 하나였다.

비바람 속에 방치된 채 풍화를 거듭하던 군함도가 느닷없는 각광을 받기 시작한 건 2000년에 들어서면서였다. 일본에 분 폐허관광 열기였다. 고색창연한 유적도, 은성한 도시도 아니었다. 폐허를 찾아다니는 관광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 제일 각광을 받은 곳이 바로 이 군함도의 폐허였다.

“배고팠던 생각밖에 나지않아”

참상 증언한 서씨가 떠올랐다

군함도서 병들어 나가사키로 이송

조선소 노역하다 원폭 맞은…

1910년 이후 지어진 시설들

왜곡된 기억들

세계문화유산 될 자격이 있나



일반 관광객들에게 공개된 지역은 군함도의 극히 일부 부분이다. 울타리 안쪽은 ‘출입금지’임을 알리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군함도엔 섬의 지난 역사와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 등을 알리는 안내판은 설치돼 있지 않다. 군함도(나가사키)/길윤형 특파원

문제는 과연 이것이 세계문화유산이 될 자격요건과 가치를 지녔느냐에 있다.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은 ‘1853년부터 1910년까지’로 시기를 못박고 있다. 군함도의 현존하는 모든 건물이 1910년 이후에 건축된 것이라는 점은 그러므로 치명적이다. 이 단순하고 결정적인 결격사유를 묵과한 채 문화유산 등재를 추천한 어이없는 단체가 유네스코 산하 엔지오(NGO) 단체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다.

나가사키의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오카 마사하루 기념 평화자료관’을 찾은 건 군함도에 다녀온 뒤였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며 평화운동을 벌여온 이 기념관의 다카자네 야스노리 이사장은 ‘쇼카손주쿠’(松下村塾·송하촌숙)가 산업유산에 포함된 데 대해 통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이 신청한 23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리스트에는 ‘쇼카손주쿠’라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다.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요시다 쇼인이 가르치던 사설학원이다.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했던 요시다는 막부타도(倒幕)를 도모하다가 만 29살에 참수형을 받고 죽었다.

귀국 후 다카자네 이사장이 메일로 보내준 ‘요시다 쇼인의 침략사상’이라는 자료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책 <유수록>(幽囚錄)에서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오키나와를 일본 영토화하며, 이씨조선의 일본 속국화, 만주·대만·필리핀을 영유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2006년 9월 요시다를 가장 존경한다는 발언을 했던 아베 신조 총리는 이제 자신의 고향에 있는 이 사적지를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시키려는 것이다. ‘쇼카손주쿠’는 무엇보다도 산업유산이 아니다. 또한 한국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펴며 근린제국의 침탈을 독려했던 그의 사상과 삶이 어떻게 유네스코가 지향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을 묵인하고 등재를 권유한 이코모스의 무능과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쇄국으로 문호를 닫아걸고 있던 시절, 창틈으로 비쳐드는 햇살처럼 문을 열어놓고 네덜란드와 교역을 하던 곳이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였다. 무슨 자취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복원중인 이 시설을 찾았던 나는 발 빠른 일본의 상혼이 만들어낸 술 하나를 만났다. 나가사키의 주류회사가 고구마로 만든 소주 이름이 ‘본격조주 군함도’였다. 술병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군함도의 사진과 함께 ‘숲처럼 들어선 고층 아파트, 폐광 후 무인도에서 근대화 문화유산으로…, 섬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고 장황하게 적어놓고 있었다. 이렇게 이어지는 ‘기억’도 있다.

하시마가 군함도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투견 도사견에서 이름을 따온 전함 ‘도사’(土佐)와 이 섬의 외관이 닮았다고 화제가 되면서였다. 전함 ‘도사’와 하시마 탄광 ‘군함도’의 운명은 그 후 기이한 족적을 그린다. 설계자 자신이 ‘실패작’이라고 했던 전함 ‘도사’는 결국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한 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표적이 되면서 스스로를 침몰시켜야 하는 운명을 맞는다. 한편, 처참한 폐허로 변한 군함도는 150억엔으로 예상되는 복구비로도 보수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아이러니를 앞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군함도가 고향으로 이 섬에서의 애환을 간직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기억’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군함도의 붕괴는 시간문제다.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폐허로, 관광산업의 자산으로 시대에 번롱당한 하시마의 역사도 명확히 각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내고 기록하고 후세에 전하며, 거듭된 성찰을 통해 과오로 점철된 역사에 내성(耐性)을 기르기 위해서도 ‘기억’은 치열해야 한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다카자네 이사장이 전하던 나가사키의 들뜬 분위기가 내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유네스코 관련 뉴스를 듣고 ‘기뻐서 눈물이 다 난다’는 사람도 있다면서 그는 말했다. “일본이 가고 있는 잘못된 길의 오류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우리들이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가 있다는 것과 아주 없다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무능할지 몰라도 무력하지는 않습니다.”

한수산 작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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