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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좋은 선생님4]《딸아, 부자가 되지 못해도 교원직 꼭 견지해다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4.16일 02:07
아버지 유언 받들어 교원의 직책에만 충성해온 남영애교원

1991년 어느 여름밤의 내몽골자치구 후룬벨시 아영기(阿荣旗), 하늘은 갑자기 소나기를 쭈룩쭈룩 쏟아부었다.

아영기교외의 20평방메터 남짓한 한 허술한 초가집, 남편과 함께 태여난지 한달도 안되는 귀여운 아들의 얼굴을 기쁜 마음으로 내려다보는 20대초반의 한 조선족녀성.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고있는 그는 남부러운게 없이 행복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 세식구가 세맡고 살던 초가집 천정과 벽 일부가 무너져내렸다. 잠에서 놀라 깬 녀인은 놀란 가슴을 추스릴새도 없이 살아야 한다는 동물적본능으로 애기를 안고 남편과 함께 쏜살같이 페허속에서 뛰쳐나왔다. 오갈데없는 이들 세식구는 이웃집에 얹혀살기를 몇개월동안이나 지속했다.

몇년이 지난 어느 추운 겨울날, 문틈사이로 찬바람이 솔솔 스며드는 단층집에서 살고있는 녀성은 철대야에 활활 타오르는 숯불을 담아다가 집안바닥에 자신과 가까운 위치에 놓고 추위를 달래며 혼자서 이불을 덮어쓰고 교수안을 쓰고있었다.

몇시간이나 지났을가? 녀성은 자신이 일산화탄소에 중독된줄도 감지하지 못한채 실외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어지럼증을 느끼며 높이가 70-80센치메터나 되는 한족식구들에서 땅바닥에 얼굴을 박으며 쓰러졌다.

몇시간후에 귀가한 남편이 방바닥에 얼굴이 피범벅이 된채 쓰러져있는 안해를 발견하고는 둘쳐업고 헐레벌떡 병원에 달려갔더니 의사는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식물인간이 됐을것이다》는 끔찍한 말을 했다. 치료를 받고 몸은 기본상 회복됐지만 얼굴에는 그때 남은 상처자국들이 오래동안 없어지질 않았다.

이 녀성이 바로 학교에서 5개 과목을 가르치며 학교 윤영근교장으로부터 《학교의 보배둥이》로 불리는 아영기조선족학교의 남영애(44세)교원이다.

5개 과목을 가르치는 《전능교원》


1988년에 흑룡강성 오상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원사업을 시작한 남영애는 2004년에 층집에 이사하기까지 16년동안 세집을 8번이나 옮겼다녔다.

본가집에서도 살았었고 학교숙사에서도 5년이나 살았으며 학교에서 부근의 빈 공장건물에 칸을 막아 지은 간이주택에서 기타 5가구의 교원가족과 함께 이웃하여 살기도 했다.

남영애의 세번째 교육일터인 아영기조선족학교는 1948년 4월에 세워졌는데 현재 31명 학생이 있다.

하지만 《참새는 작아도 오장륙부가 구전하다》는 말처럼 비록 학생수는 적어도 엄연히 학전반과 소학교,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10개 학년을 갖춘 완전학교이다. 하여 학교의 17명 교원들은 누구나 할것없이 매 사람당 2-3개 과목씩 가르치는것이 매우 례사로운 일로 됐다.

그중 중학교의 수학, 조선어, 정치, 물리외에도 소학교의 한어까지 도합 5가지 과목을 가르치고있는 남영애는 학교에서 제일 다망한 사람이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함수과정을 마친 남영애는 현재까지 20여년이나 담임을 맡아왔다.

학생시절, 학습성적이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생활난으로 대학입학을 포기한적 있는 남영애는 교원직에 종사한 24년간 줄곧 우등생에 대한 교육을 중시했을뿐만아니라 후진생에 대해서도 한치의 차별을 둔적이 없이 늘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공평하게 대했다.

그는 늘 학생들속에 심입하여 그들의 학습과 생활 면에 나타난 문제점들에 대해 일깨워주고 타일러주었으며 그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었다. 더우기 독신자녀와 결손가정자녀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돌렸는데 현재까지 중도에 퇴학한 학생이 한명도 없다.

남영애는 1994년부터 련속 3년동안 《기급우수교원》, 1998년에는 《맹급교수능수》, 2002년에는 《내몽골자치구우수교원》 등 영예를 받아안았으며 남영애가 담임을 맡은 반급은 2007년과 2009년에 《기급우수반급》의 영예를 따내기도 했다.

하여 아영기조선족학교의 윤영근교장은 남영애교원을 《학교의 보배둥이》라고 부르고있다.

제자들의 작은 《효도》를 가슴속 깊이

교원사업에 종사한지 24년이 되는 남영애에게는 한가지 잊지 못할 감동이 아직도 가슴속에 짠하게 남아있다.

1997년 여름방학, 고중입시를 마친 10여명 제자들이 24형 빨간 새 자전거를 끌고 남영애를 찾아왔다. 제자들은 《남선생님께서 몇년동안 바쁜 살림에도 우리들을 친자식처럼 돌봐주고 이끌어주시느라 고생이 너무나 많으셨다》며 자신들의 성의이니 꼭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스승부부가 림시교원이다보니 로임이 적어 낡은 자전거를 타고다니는게 안스러웠던것이다.

썩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떤 애들은 저금통을 깨고 몇년동안 한푼두푼 모은 동전까지 꺼내서 모금을 하여 자전거를 사는데 보탰다고 한다.

비록 15년전의 일이라 잊을법도 하지만 남영애는 《평생동안 지니고 갈 영원한 감동으로 남는다》며 제자들의 대견한 소행에 눈굽을 찍었다.

《딸아, 부자가 되지 못해도 교원직 꼭 견지해다오》

2000년, 남영애와 한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남편 김룡범(47세)은 《토끼꼬리만한 림시교원 월급을 받고서는 한평생 변변한 집 한채 마련하지 못하겠다》며 교원직을 버리고 출국길에 올라 고기잡이배를 4년동안 탔다.

그동안 고기배가 넘어져서 죽을 고비를 세번이나 넘기는 등 숱한 고생을 하여 벌어온 돈으로 2004년에 아영기시내에 아빠트 한채를 사놓았다. 하여 남영애는 16년동안의 세집살이에 종지부를 찍을수 있었다.

귀국한 후 상해의 한국회사에 취직한 남편은 12년간의 지루한 별거생활에 질린지라 《학교에 학생이 몇명 남지도 않았는데 아예 남방에 가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자》고 여러 번이나 구슬렸지만 남영애는 여지껏 《요지부동》이다.

22살난 아들 김혁까지 한국 창원대학에 류학보내고 집에 혼자 남아있는 남영애도 남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살고싶다.

하지만 남영애가 교원직을 고집하고 고향을 지키는데는 단 한가지 리유가 있었다.

민족학교 교원, 신발향 향장, 아영기민족종교국 국장 등 직을 지내다가 1997년에 퇴직한 남영애의 부친은 그 이듬해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우리 민족의 자치지방도 아닌 내몽골땅에서 민족교육에 종사하며 이 사업을 열애한다는것은 누구보다도 강한 민족심이 없어서는 안될 일이다. 나는 국가간부도 해보았지만 교원직에 종사한 7년 세월이 제일 뜻깊었고 제일 잊지 못하겠다. 교원직은 경제적으로 부자가 될수 없는 직업이긴 하지만 넌 그 어떤 유혹에도 매혹되지 말고 꼭 견지해다오. 나의 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수 있겠니?》 하며 눈을 감으신 아버지의 유언을 남영애는 《거역》할수 없었던것이다.

《제자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와 학교때 성적이 별로 우수하지 않던 제자들이 사회에서 우수한 성과를 따내고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제일 큰 희열을 느낀다》고 말하는 남영애는 오늘도 5개 과목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느라, 5개 과목의 교수안을 준비하느라 바쁜 일과를 소화해내고있다.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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