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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려단이 실종된 경박호의 전장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9.09일 14:13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이름이 돌담이지 실은 누군가 일부러 쌓은 담은 아니었다. 흑룡강성 동남부의 경박호(鏡泊湖) 서쪽에 위치한 이 바위들은 부근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산비탈에 일자형으로 쭉 늘어선 키 넘는 거석들은 하늘 아래에 한 점의 기이한 그림을 만들고 있다.

  말 그대로 조물주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든 신비한 조화였다.

  “바위에 틈새가 나있다고 해서 ‘장봉(墻縫)’이라고 부르지요.” 마효림(馬曉林) 부향장은 이 특이한 지형의 이름을 이렇게 밝혔다.



돌담 기슭의 오솔길.

  그렇다고 바위마다 틈새가 나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바위들이 하나로 쭉 이어진 게 아니고 가끔씩 간발의 차이로 “담”의 틈새를 만들고 있다고 지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1932년 3월, 이연록(李延祿)이 인솔한 국민 구국군(救國軍) 보충연대 7백명의 전사들은 이곳에 매복하여 일본군과 일장 혈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훗날 지명 이름을 따서 “장봉전투”라는 이름으로 사책에 기록되었고 현지에는 높다란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연록은 훗날 동북항일연군 제4군 군단장으로 있은 유명한 항일장령이다.

  마씨의 이번 걸음은 바로 녕안시(寧安市) 민정국의 요원을 수행하여 항일전적지 기념비를 보수하는 현장을 고찰하기 위해서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필자는 취재 길에 마침 그들 일행과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때 일본군의 사상자가 3,500명이나 된다고 하지요. 항일전쟁의 ‘최초의 대첩’이라고 해요.”

  마씨의 이 이야기는 세상을 놀래게 하는 “폭탄” 그 자체였다. 그러나 언녕 “신문(新聞)”이 아닌 “구문(舊聞)”이다. 이미 신화넷을 비롯하여 여러 온라인과 신문, 잡지를 달구는 뜨거운 화제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항일전쟁의 “최초의 대첩”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거개 1937년 9월 25일 팔로군 제115사단이 산서성(山西省) 평형관(平型關) 부근에서 일본군을 매복 습격한 전투를 머리에 떠올린다. 일명 “평형관 대첩”이라고 하는 이 매복 습격전은 중국 항일의 첫 승리를 거둔 전투로 평가되며 일본군 도합 1,000여명을 섬멸했다고 전한다. “장봉전투”의 일본군 사상자 숫자가 사실이라면 “장봉전투”야말로 동북 나아가 전국 항일전쟁의 명실공한 “최초의 대첩”으로 된다.



전투 당시 구국군 지휘부가 있던 돌담 북쪽의 산마루.

  그러나 예전에 현지(縣志), 당사(黨史) 등 문헌에 기록된 “장봉전투”의 일본군 사상자는100명 미만이다. 그렇다면 3,500명의 사상자라는 이 엄청난 전과는 왜서 그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꽁꽁 숨겨져 있었을까…

  미상불 “장봉전투”는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를 전장에 파묻고 있는 것이다.

  20마리의 말로 실어 나른 수류탄

  이 이야기의 실마리는 동북 항일의용군인 “국민 구국군(救國軍)” 보충연대의 설립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풀어야 한다.

  1932년 2월, 길림성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군의 대대장 왕덕림(王德林)이 대대병력 500여명을 인솔하여 봉기하며 항일에 나섰다. 왕덕림의 옛 지인 이연록은 중국공산당의 파견으로 이 무장부대에 가입하며, 이어 왕덕림이 사령관을 담임한 “국민 구국군” 참모장으로 된다. 이연록은 또 구국군에서 700명의 보충연대를 조직하며 연대장을 담임한다.

  국민 구국군은 설립된 후 돈화(敦化)와, 액목(額穆), 교하(蛟河) 등 3개 현을 연속 공략하며 급기야 5,000여명의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황급한 관동군 사령부는 부대를 파견하여 돈화로부터 경박호로 “비적 정벌”을 진행한다. 관동군은 이 참에 경박호 일대의 왕덕림의 국민구국군을 섬멸하고 길림성 동부의 이 우환을 일거에 없애려고 시도했다.

이연록은 왕덕림을 설복하여 “장봉” 일대에서 일본군을 매복, 습격하고자 했다. 그들은 20여 마리의 말을 이용하여 녕안 현성과 “장봉”을 여러 번 왕복하면서 구국군 군기고의 전부의 수류탄을 일찌감치 매복 장소에 실어왔다.

  1932년 3월 13일 새벽, 경박호 일대의 유명한 사냥꾼 진문기(陳文起)가 일본군을 유인하여 구국군 보충연대가 쳐놓은 매복 장소에 들어섰다. 이미 “장봉”에 4일 동안 대기하고 있던 보충연대의 700명 전사들은 즉각 전투를 개시했다.

  후날 이 매복 장소를 서술한 많은 기사들은 '장봉'을 거개 5리 남짓한 협곡이라고 서술 하거나 목단강(牡丹江)과 산비탈사이의 5리 남짓한 오솔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특이한 지형때문에 매복 작전의 최적의 장소로 되었다는것이다. 현장조사가 결여한 이런 기 사들은 본의 아니게 '장봉전투'의 첫 의문거리를 만들었다.

  "'장봉'이라는 게 동서로 몇백미터에 불과한 지형이지요." 현지의 당사(党史) 연구원 장패신(张佩臣)은 이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바위 틈새, 사람이 비집고 나들만 하다.

  '장봉' 기슭에 흐르는 강도 목단강이 아니라 목단강의 작은 지류라고 했다.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장봉은 원체 려단 병력이 종대로 행진하거나 진공태세를 갖출 장소가 아니라는것이다.

  "장봉의 량쪽은 또 밋밋한 비탈이지요. 이런 장소에 어떻게 매복전을 해요?" 그의 말을 빈다면 수백미터 길이의 '장봉'에서 3500명이 섬멸되였다면 일본군은 강을 건너는 아마존의 불개미처럼 엎친데 덮쳐서 더미를 이뤄야 한다. 장씨의 이 말은 '장봉' 의 '대첩'에 회의(怀疑)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기실 장봉이 위치한 이 산에는 예전에 원시림이 빼곡하게 들어섰다고 전한다. 해방(1949) 후 촌민들이 비탈에 밭을 만들면서 나무들을 전부 채벌하여 이처럼 '까까머리'로 만들었던것이다. 부향장 마씨는 현지에서 산 전체를 지리적 위치에 따라 '남산'이라 고 부른다고 하면서 이 남산의 한가운데 있는 특이한 지형때문에 '장봉'이 산 전체의 이 름을 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 남산 전체를 '장봉'의 지형으로 잘못 알고있는 원인을 인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사실상 거석의 바위가 담처럼 늘어선 '장봉'은 물론이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좌우 산비탈의 전체가 천연적인 매복 진지였다. '장봉'은 위치적으로나 지형적으로 주전장으로 되었으며 이 때문에 련대 지휘부도 바로 '장봉' 뒤쪽의 산마루에 설치되였다. 련락병이 말을 타고 전장과 지휘부를 오갔다고 전한다.

  이름 그대로 '장봉'의 이름을 그대로 딴 '남산의 전투'였다. 더구나 이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본군의 머리우에 폭우처럼 쏟아진것은 총알이 아니라 수류탄이였다.

  련환전(连环战)의 첫 전투

  실제로 미리 '기획'한 이야기가 '장봉"에서 하나씩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군의 탄환은 바위와 나무뒤에 숨은 구국군 전사들을 비켜갔고 포탄은 전투장이 좁아서 거개 전선 뒤로 날아갔다. 개별 작전이든지 아니면 협동작전이든지 유일한 선택은 구국군이 매복한 비탈로 돌진하는것이였다.



장봉기슭에서 지형을 설명하고 있는 마효림 부향장.

  "우리의 전사들은 서너명씩 조를 묶어 포진했습니다. 어떤 전사는 마개를 연후 수류 탄을 공급했고 어떤 전사는 투탄을 했습니다. 힘들면 서로 자리를 바꿨습니다." 보충련대의 련대장 리연록은 후날 이렇게 그때 그 당시의 전투 정경을 회억했다.

  그의 회억에 따르면 이때 큰 매복 장소에는 5명, 작은 매복 장소에는 3명이 있었다고 한다. 5리 남짓한 '장봉'의 산비탈에는 구국군 보충련대의 매복 장소가 적어도 100여개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장봉'의 담을 이룬 거석 뒤에도 최소 20~30개의 매복 장소가 설 치되었던것이다.

  전투후 구국군이 전장에서 얻은 총신 잔품 1500점은 녕안의 병기공장에 수송되어 수리했다. 리연록은 이때 또 완정한 38식 소총 2000여자루를 찾아내서 보충려단의 후비군을 장비했다고 회억하고 있다. 일본군의 군기에 따르면 38식 소총은 천황이 하사한것으로 병사들은 인당 한자루밖에 차려지지 않는다. '장봉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최소 3500 명이라는 주장은 이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흑룡강성 동녕(东宁) 문물관리소에 보관된 국민 구국군 병기공장의 1932년 자료는 "병기공장의 1차분 생산과업은 녕안 '장봉전투'에서 로획한 38식 소총 1500자루를 수리하는것"이었다고 기록, 리연록의 회억록 "흘러간 세월 (过去的年代)에 적혀있는 내용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구국군의 보충련대는 험요한 지세를 리용했기때문에 손실이 아주 적었다. 희생자는 단지 7명뿐이였다. 1962년, 옛 전장에는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서며 박중근(朴重根) 등 중대장 3명을 위한 작은 비석 3개가 따로 나타난다.

  구국군 보충련대에는 박중근처럼 조선인이 적지 않은 걸로 알려지고 있다. 후날 이런 무장력을 묶어 설립된 제4군에도 조선인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방후 연변자치주 주장으로 있었던 주덕해(朱德海)도 한때 제4군 제3련대 후방 류수처(柳守处)의 당지부서기로 있었다.

  각설하고, 박중근이라는 이름은 와전된것이며 실은 박근중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또 당사 연구원 장씨는 제4군 군사(軍史)의 기록에 의거, 박중근 등의 희생지가 다른 전장일 수 있다고 말한다. '장봉전투'를 비롯하여 경박호 부근에서 련이어 다섯번의 련환전(连环战)이 벌어지는데 박중근 등은 이 련환전의 어느 한 전장에서 희생되었다는것이다.

  사실상 현장에 잔존한 박중근 등의 비석에도 그들이 1932년 2월에 희생된것으로 나타 나는 등 시간적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1500자루의 총신 잔품도 '장봉' 전장만 아닌 그 후의 송음구(松荫沟) 등 여러 전장에서 얻었을수 있다는 주장도 이에 가세한다. 인간의 기억에는 필경 한계가 있으며 리연록은 30년후의 회억에서 예전에 경박호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시공간을 헛갈리고 있다는것이다.



돌담 기슭의 오솔길.

  이보다 '장봉전투'에 나타나는 일본군은 독립수비대 우에다(上田)대대이며 야전부대인 아마노(天野)려단이 아니라는 주장이 대두한다. 실제로 2012년 발견된 일본군의 '만주사 변대화보(满洲事变大画谱)'에는 1932년 3월의 '경박호의 우에다대대의 전투'가 기록되여 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32명이였으며 '장봉전투'의 일본군 사상자가 70~80 명이라고 하는 현지(县志), 당사(党史)자료 등 중국 문헌의 기록과 근접한다.

  이에 따르면 '장봉'전투에서 일본군의 사상자가 무려 3500명에 달한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목단강의 수면 아래에 숨은 비밀

  일본군의 '화보(画谱)'는 우에다대대는 목단강의 얼음우에서 행진했으며 일부가 습격을 받을 때 고지(高地)에 천고의 원시림이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장봉' 일대의 산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것이다.

  드디어 '장봉' 전투가 미스터리의 베일을 거두고 참모습을 드러낼 듯하다.

  그런데 '화보'에 기록된 전투시간은 3월 21일이며 리연록이 회억록에서 기록한 '장봉 전투'의 발생 시간 3월 13일과 한주일의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일본군이 구국군을 '소멸'하기 위해 경박호 일대에 파견한 부대는 하나가 아닌 두개라는 얘기가 된다.

  일본군의 '화보'는 이 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화보'는 고지에서 울린 치렬한 총소리를 거론하면서 탄환이 얼음우에서 튕기는 장면까지 자세히 묘사하지만 수류탄이 장시간 폭우처럼 쏟아지던 관건적인 이야기는 일말의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는것이다.

  또 '화보'에는 '지나인(支那人)'의 안내로 '비적'의 매복 장소에 잘못 들어섰다는 서술이 없다. '장봉전투'는 사냥꾼 진문기가 일부러 일본군을 매복 장소에 유인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진문기는 습격전 직후 일본군에 의해 부근 촌가의 대들보에 묶인채 칼에 찔려 숨졌다. '화보'가 서술한 이야기가 '장봉전투'라면 이처럼 중요한 사건을 그 무슨 실개천처럼 허망 건너뛰었을리 만무하다.

  일본군의 이 문헌은 구국군 보충련대가 습격한 부대가 '우에다대대'가 아닌 '아마노려단'이며 '장봉전투'의 '대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반증자료이다.

  중국의 지방문헌은 본의든 타의든 '우에다대대'와 벌린 전투를 '아마노려단'과 벌린 전투로 잘못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장봉전투'에서 먼저 수류탄으로 습격을 하고 또 고지를 진공하는 일본군에게 무려 6, 7시간동안 구국군 군기고의 전부의 수류탄을 투척했다면 그 사상자가 3500명에 달한다는 설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프랑스 파리의 "구국시보(救国时报)" 는 구국군이 '장봉'에서 적 10만명을 섬멸했다는 기사를 싣기까지 했다. 황당한 오보이지만 '장봉전투'의 규모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아니나가 싶다.

  진짜 황당한 일은 뒤에 있었다. 구국군 사령관 왕덕림에게 은전 1만원을 주고 병사를 징집하게 했던 길림자위군 사령관 리두(李杜)가 보충련대를 그가 조직한 부대라고 주장, 공로의 주인공이 누군가를 두고 왕덕림과 다투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들은 대외에 구국군의 전과를 공표하지 않기로 합의를 봤다는것이다.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된 리연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난감한 처지로 되였다. 또 일본군이 이 수치스런 참패를 공개하지 않 으면서 엄청난 '대첩'은 끝내 수면아래로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는것이다.

  그보다 '장봉전투'의 '대첩'은 많은 고리의 상황이 결국 예증(孤證)과 추론에만 의거하고 있기때문에 궁극적으로 유야무야한 사건으로 되고있다는 평이다.

  아무튼 그때 그 당시 일본군은 '장봉'에서 불의의 습격을 받은후 몹시 당황했던 게 분명하다. 강의 얼음우에서 박격포를 쏘던 일본군 포수가 급한 김에 포탄을 잘못 장탄해 얼음우에 포탄이 터지면서 여려명이 목단강 물고기의 밥으로 되였다고 전한다. 그때 격렬했던 전투의 일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실종된 군대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 마을에는 비탈의 밭에서 옛 포탄을 발견한 사람이 있습니다." 장봉산북쪽의 호서촌(湖西村) 촌민 성상국(盛祥国)이 하는 말이다.

  성씨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마을에는 옛포탄 깍지를 그 무슨 골동품처럼 보관하고 있는 촌민이 여럿이 된다고 한다.

  장봉에 있었던 큰 전투는 촌민들의 집단기억에 이처럼 진실한 그림으로 남아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산남쪽 기슭에는 일본군의 시체를 태우는 불무지가 여러곳이나 되였으며 미구에 돈화에서 트럭이 와서 골회함을 무더기로 실어갔다고 전한다.

  기왕 불무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망정이지 리연록은 장봉 전투를 이어 16일 송음구(松荫沟)에서 또 한번 매복전을 벌였다. 이곳에서 리연록은 수류탄이 아닌 "화공법(火攻法) "을 사용, 전사들에게 각기 성냥을 나눠주고 수풀 도처에 불을 질렀다. 이 뜻하지 않던 큰 불 때문에 아마노려단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전한다. 일각에서는 아마노려단의 대부분은 여기서 섬멸되었다고 주장한다. 우에다대대는 기실 아마노려단의 패잔군을 증원하기 위한것이라는 설도 이렇게 나온것이다.

  어찌됐거나 아마노려단의 패잔군은 나중에 할빈에 도망했으며 "아마노려단"은 이로부터 어디론가 실종된듯 동북의 항전무대에서 가뭇없이 종적을 감춘다.

  잠깐, 1937년 12월, 남경(南京) 보위전에서 사천군(四川军)의 약 2000명 병사가 부근의 청룡산(青龙山)에서 신비하게 집단적으로 실종했다. 항일전쟁 시기에 발생한 이 사건은 아직도 답을 얻기 힘든 미제(谜题)로 되고 있다.

  일행중 누군가 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탄식을 길게 뽑았다. "이곳 '장봉'의 전투이야기도 풀지 못할 영구한 미스터리로 남지 않을까요?"

  그러든 말든 '장봉'의 바위 틈새에는 세월에 취한 이끼만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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