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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업에 혼신을 불태운 일생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3.14일 19:03
-고 리송영로사장을 추모하여

길림신문사 리송영로사장님이 암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2011년 2월 15일 23시 20분, 80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세상을 하직하셨다. 아직도 믿고싶지 않은 리송영로사장님의 서거, 다년간 당의 신문사업에 심신을 다하고 정년후 80고령에 이르도록 젊은이의 포만된 사업열정으로 민족사업에 혼신을 불태우시던 리송영사장님.

리사장이 신문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한것은 아득한 이전인 건국초기의 일이다.

1932년 11월 3일 화룡현 복동에서 한 빈고농가정의 맏아들로 태여난 리송영선생은 광복후 1947년부터 연변고급사범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학생회 주석을 지내다가 1951년 5월 조직의 배치로 연변일보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사에 입사했는데 이것이 보도계에 들여놓은 첫발이였다.

정열로 차넘쳤던 선생은 1953년 연변주직속기관당위 학습모범에 당선, 그해말 당조직에 가입하였으며 1955년에는 연변청년사회주의건설열성자의 신분으로 수도 북경에 가서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연변일보사편집위원회 위원, 연변주당위 선전부 선전과 부과장, 연길현혁명위원회 부주임 등 직을 력임했던 선생은 당의 11기 3차전원회의 페막직후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국장에 부임되여 라지오방송만 있던 연변에 텔레비죤방송시대를 여는 거창한 작업에 몰입했다. 지방 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으로는 국내 최초로 예술단을 설립하고 조, 한 2종 문자로 된 라지오텔레비죤신문도 발간하여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사업의 발전에 힘을 보탰다.

리송영사장이 길림신문사에서 중임을 떠멘 시간은 불과 3년여밖에 안된다. 그러나 그때는 1985년에 창간된 길림성 조선문당보 길림신문이 1987년 3월초 성위 결정에 의해 신문업무에 대한 연변일보 업무관리체제에서 연변주위 대리관리하에서의 업무독립체제로 넘으면서 독자적인 창업을 본격적으로 내밀던 중요한 시기였다. 바로 이때 독립후 초대사장으로 리사장이 부임되여온것이다.

당시 길림신문은 현 백산호텔자리에 있었던 연변군분구의 텅 비여있던 원 초대소 2층을 세내여 들고있었는데 스팀같은 난방시설도 없어 겨울에는 난로에 싸리나무를 때면서 편집업무를 보고있었다. 사업여건이 어려웠지만 새로 창설된 신문사에 모여온 신임사원들의 사업열정은 대단하여 나가서 취재를 하나 앉아서 편집을 하나 말 그대로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리사장은 도임후 주위에 보고를 올려 길림신문 제1임 당조와 독립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오건설과 업무건설을 추진하는 한편 사무실을 부대초대소에서 덕의루호텔로 옮겨 직원들의 사업조건을 개선하였고 그뒤에는 성에 보고를 올려 1989년초 새로 락성된 신문청사 9—10층에 이사했다.

2010년, 초창기때 사무실로 들었던 덕의루 앞에서 남긴 추억의 기념사진(좌).


당시 우리 말 신문이 없던 산재지구에 생긴지 얼마 안된 길림신문이 당지 독자들의 생활과 사업에 주는 추진력은 큰것이였다. 그것에 힘을 얻고 부지런히 뛰여다니는 주재기자들 역시 공휴일을 잊을 때가 많았다. 얼마나 뛰여다녔던지 한해에 신발 대여섯컬레 굽창이 닳아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독자들에게서 힘을 얻는이가 기자들이였다면 기자들에게 힘을 주는이는 리송영사장이였다. 전 성 각지를 뛰는 촬영기자에게 가급적 좋은 장비를 갖춰주었고 교통이 불편한 장백현의 기자에게는 모터찌클을 사주기도 했다. 사업여건에 대해서만 관심을 돌린것이 아니였다. 자주 주재기자회의를 열어 그들에게 명확한 과업을 제시하고 주재기자수칙도 제정했다.

성내 각지의 주재기자들과 함께 보도업무를 담론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있는 리송영사장.

전 조선족사회와의 호흡맞추기는 당시 우리 신문의 독특한 풍경이였다. 장춘, 연변, 길림, 구태 등지에서 해마다 몇번씩 치러진 통련사업회의, 민위주임과 촌서기주임 회의 등 활동은 신문사 전체 임직원들과 독자들간의 거리를 크게 좁혔으며 길림신문에 대한 통신원, 발행원들의 지지열정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창간초를 망라해서 이 시기가 통련사업이 가장 활약했던 시기이며 그것은 좋은 전통으로 굳어져 그후의 사업을 유력하게 밀어주었다.

필경은 초창기라 새로 모집해온 편집기자들이 많아 제도화건설과 업무학습이 절박히 수요되였다. 선생은 당조회의를 열고 당시 전국 신문개혁의 선두주자였던 무한 《효감보》경험을 배워오기로 결정, 윤효식부총편집 등 3인을 파견하여 견학하게 했다. 하여 조선문 신문사로서는 최초로 신문취재편집 일터책임제를 도입하여 개혁개방의 새로운 정세에서 보도사업을 제도화 규범화함으로써 편집기자들의 사업열성을 고무하고 보도질도 높였다. 그리고 내부간행물 《취재와 집필》을 창간하여 편집기자들이 업무론문과 경험을 교류하면서 실무자질을 높이게 했다. 내부참고 《정황반영》도 발간하여 조선족사회에서 반영되는 문제를 적시에 성, 주 지도부와 해당 부처에 반영하였다.

조사연구원으로 있는 기간 선생은 새로운 지도부에 시시로 구체적인 사업건의를 제기하는 한편 여러 경로를 통해 전문 관련정책과 보도실무와 관계되는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지도부에 참고용으로 제공하거나 내부간행물에 싣거나 각 부처에서 돌려보면서 참고하게 하였는데 편집기자들의 정책수준과 실무수준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 친필로 개끗이 정서된 두툼한 자료들을 돌려보면서 우리는 늘 로사장의 따뜻한 정감을 느끼군 하였다. 재임기간 선생은 연변신문학회부회장, 길림성신문학회리사, 조선족사학회 고문, 연변주문련 리사, 작가협회 연변분회 회원,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 제8책 주필 등 사회직무도 담당하였다.

1992년 12월 정년퇴직후 수년간 리사장은 우리 신문을 거의 빼놓지 않고 보면서 시시로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와 고무를 해주는 한편 부족점도 참고하라고 지적해주었으며 매달 한번씩 퇴직간부들의 모임을 가지고 의견건의를 만들어 제공하기도 했다. 그만큼 신문사에 대한 선생의 애정과 관심은 식은적이 없었다.

특기해야 할것은 정년후 15년간 재직시의 드높은 사업열정과 의욕을 식히지 않고 연변의 해외문제연구사업에 생명이 다하도록 기여해왔다는 점이다.

선생은 줄곧 연변주공공관계협회사업과 연변해외문제연구사업에 투신, 2005년에는 연변주공공관계협회 부회장 겸 연변해외문제연구소 소장직을 맡아보았는데 주로 해외친선사업과 해외친선사업에서의 문제연구를 하면서 큰 성적을 냈으며 《두만강문학총서》편집위원, 연변주로년협회 고문, 연변동서방문화연구회 고문 등 사회직무도 겸해 맡고 연변의 민족정책, 대내외개방정책, 사회주의민족관계, 사회주의 현대화건설 등 현황을 대외에 알리는데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이 시기 주필을 담당했거나 주요편집을 맡아 출판한 책자가 15종이다. 그중 선생이 주필을 담당한 《중국조선족력사화책》은 조선족 근대사를 력사사진으로 보여준 귀중한 책으로 해외에도 발행되였다.

이 기간에 선생은 《해외교류발전에 존재하는 문제와 해결대책에 관한 건의》, 《로무송출가운데 나타난 문제와 해결대책에 관한 건의》,《한국금융위기와 연변에 대한 영향 및 대책, 건의》, 《한국새마을건설력사경험에 관한 보고》, 《중국조선족의 형세와 혁명투쟁의 약간한 문제에 관한 보고》 등 건의, 보고를 연변주에 작성해 올렸는데 일부 의견은 채택실시되였고 일부 의견은 관련 부문에 이첩되였다.

또한 해외문제연구 내부간행물을 비정기적으로 편찬하여 연변주 당위와 정부에 제공하기도 했고 그리고 한국과 연변의 학자들을 조직하여 동북아의 형세와 중한합작에 관한 토론, 중한수교 15주년 학술토론, 연성환경건설과 대외개방, 귀국로무인원 재창업에 관한 토론 등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학자들의 친선과 학술교류도 추진했다.

선생은 사업으로 림종을 맞은 분이시다. 그이는 연변주 지도부의 청탁을 받고 국제공공관계협회와 해외문제연구소 이름으로 《연변조선족사》를 편찬했던것이다. 중국조선족력사 시원의 시간대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다년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있었다. 비교적 과학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그것을 론증하기 위해 국제공공관계협회와 해외문제연구소에서는 3년이란 시간을 들여 조사연구를 병행했는데 와중에 선생은 많은 정력을 이 작업에 쏟아부었다. 선생의 심혈이 깊이 슴배여있는 이 책은 상하권으로 되여있는데 상권은 이미 출판되였고, 하권의 마지막 탈고를 위해 선생은 지난해 12월말 병상에 눕기직전까지도 로심초사하고있었던것이다!

리송영선생의 일생은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혼신을 당과 인민의 사업에 바쳐온 일생이고 우리의 문화사업에 불태워온 일생이다. 선생의 영령은 우리 마음속에 영존하리라!

편집/기자: [ 박문희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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