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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의 딸이 조선족무용가로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02.16일 08:56

무용극 《인삼처녀》와 《장백산 천지의 전설》 창작

  (흑룡강신문=하얼빈) 싸락눈이 흩날리던 그날은 진향란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기고있었다. 1967년 1월의 어느 날 밤, “문화대혁명”의 격앙된 구호소리가 강 이쪽에서 울려퍼질 때 진향란은 막내를 등에 업은 엄마와 함께 동생의 고사리손을 꼭 잡고 두만강을 건넜다.

  후날 장백산의 “인삼처녀”로 거듭난 진향란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때 엄마는 강안에 이른후 우리더러 고향쪽을 향해 몸을 돌려 절을 하게 했어요.”

  진향란의 어머니는 조선반도 남쪽의 제주도 성산반도에서 태여난 해녀였다. 사실상 그녀의 이야기는 딸 진향란과 별도로 그 시절의 한 조선녀인의 애환의 장편소설을 만들고있었다.

  진향란은 1990년대 중반에 방문학자의 신분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이때는 평양에서 공부하던 풋풋한 15세의 소녀가 아니라 곧 50대에 올라서는 원숙한 무용인이였으며 국가1급 안무가로 변신하고있었다. 그녀가 어릴 때 춤을 배웠던 “평양무용학교”도 이미 전에 개명을 하고 “평양무용대학”으로 거듭나고있었다. 이 무용대학은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의 이름을 빌었던 “최승희무용학교”가 그 전신이였다. 최승희는 광복(8.15)이전 조선의 무용계를 주도했던 전설의 무희이다.

  “그때 최승희의 딸 안성희로부터 무녀춤(巫女舞)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다들 쟁강춤이라고 부르는 그 춤이지요.”

  진향란은 안성희가 직접 가르쳤다는 무녀춤을 인터뷰도중에 일행에게 보여주었다. 금세 “쟁강쟁강”, “딩딩당당” 하는 곡조가 그녀의 입가에 흘러나오고있었다. 신들린듯한 그 춤사위는 그녀의 화려한 무용 형체를 만든 옛 기억의 잔상(殘像)을 일일이 눈앞에 떠올렸다.

  옛 이야기는 썰렁한 기억으로 시작되고있었다.

  장백산에 나타난 전설의 인삼처녀

  1975년, 화교정책이 시행되면서 진향란은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무용배우로 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길림성가무단에서는 저의 키가 작다고 받지 않으려다가 조선춤을 추는 인재가 적으니 마지못해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모래에 묻힌 구슬은 언제인가 꼭 빛을 뿜기 마련이다. 1979년 진향란은 중앙가무단과 함께 “보석처녀”등 2개의 소형 무용작품을 창작했다. 그녀가 만든 이 아름다운 조선춤은 금방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후 진향란은 북경무용대학에 추천되여 첫 안무•연출학과에 입학, 조선무용과 중국 고전무용, 만족무용, 발레 등을 배웠다. 2년반의 무용학습은 진향란을 무용의 세계에서 또 한 단계 올라서게 했다. 대학에서 돌아온후 그녀가 창작한 3인무 “명절의 금바라(金哱囉)”는 1981년 전국무용경연 2위 입상작으로 되였다.

  “작품을 많이 만들었지만, 인상에 제일 깊은건 그래도 무용극〈인삼처녀>입니다.”

  무용극 “인삼처녀”는 장백산기슭의 민간전설을 모티브로 삼고있다. 1989년, 진향란이 총 안무•연출을 맡은 이 무용극은 길림성의 첫 무용극이였다. 무용극은 이듬해 북경 아시안게임 축전 때 성황리에 공연,중국 최고의 정부상인 문화상(文華賞)을 수상했다. 중국 대륙 전문무대의 예술의 최고상이였다.

  “인삼처녀”는 진향란의 무용생애에서 화려한 전환점이였다.

  잇따라 진향란이 총 안무•연출을 맡은 길림성가무단의 무용극 “장백산 천지의 전설”이 출품되였다. 글 줄거리의 발전에 따라 진향란은 북춤, 쟁강춤 그리고 학춤과 곰춤, 꽃사슴 춤 등 많은 군무를 설계, 조선족무용의 멋과 맛을 마음껏 흠상하게 했다. 이 무용극은 1992년, 심양에서 진행된 전국 무용극공연에서 우수극목 안무•연출상 등 5개 대상을 일거에 획득한다. 진향란은 나중에 중국무용예술의 “돌출한 기여를 한 무용가”로 되여 국무원의 수당금을 받게 되였다. 심산의 땅밑에 숨은 인삼은 드디여 수림속에 향기를 발하고있었다.

  사실상 “인삼처녀” 진향란은 일찍 평양에서 무용대학에 입학할 때 벌써 무용인의 천부를 드러내고있었다.

  평양의 무녀와 접신한 중국의 소녀

  무용대학에 입학하게 된건 우연한 기회때문이였다. 그때 고중 1학년을 다니던 진향란은 학기말에 청진의 집을 떠나기에 앞서 외국인상점에 물품을 사러갔다. 그 시절 중국인 고등학교는 조선 전국에 단 1개뿐이였으며 평양에 있었다.

  “상점에서 나오는데요, 맞은 쪽에서 북소리랑 노래소리랑 떠들썩했습니다.”

  알고 보니 평양무용학교의 신입생 환영행사였다. 나도 무용학교에 다닐 수 없을까? 진향란은 제잡담 수위실을 찾아갔다. 실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춤을 아주 즐겨 지원군아저씨를 졸라 화고(花鼓)랑 방울춤이랑 배운적도 있었다. 무용학교의 예비시험은 벌써 끝났지만 진향란은 마음씨 좋은 김씨 성 교원의 도움으로 제2차 시험에 참가할수 있었다.

  실기시험에서 진향란이 제비로 뽑은 시험지는 “평양무용학교 입학통지를 받은후의 상황표현”이였다. 이 소품은 불과 3분정도의 준비시간을 갖고 만들어야 했다.

  “마을의 강가에서 소녀가 빨래를 하는데요, 자꾸 머리를 돌려 우편 배달원이 오는지 살펴보는겁니다. 따르릉 하고 배달부의 자전가가 달려오는 소리를 듣자 허둥지둥 달려가죠.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꺼내드니 합격이였습니다. 빨래하던 옷도 동댕이치고 막 집으로 달려가는데요, 마침 발에 가시가 들어요. 발을 절뚝거리면서도 입으로는 희소식을 전하면서 달려가요…”

  심사관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박수를 쳤다. 진향란은 무용을 만드는 천부가 있고 상상력이 좋다는것. 뒤이야기이지만, 최승희는 훗날 진향란의 졸업시험 때 심사위원으로 앉아있었다.

  최승희의 딸 안성희는 무용학교에서 진향란 등을 배워준적이 있는 은사였다. 진향란은 안성희가 구쏘련에서 발레를 배웠으며 키가 컸고 또 그녀의 영향으로 학원생들은 발레와 조선춤이 가미된 춤을 췄다고 회억했다.

  “안성희는 우리에게 무녀춤을 배워줬는데요, 무당의 춤에서 소재를 받아서 만든 작품이거든요.”

  안성희는 무녀춤을 추는 그 순간만은 흡사 하늘과 땅을 교접하는 무당을 방불케 하고있었다. 진향란은 저도 몰래 무아몽중의 다른 춤의 세계에로 끌려들어가고있었다.

  1966년 8월, 진향란은 안성희의 무용학교를 졸업한후 함경북도 가무단에 배치되였다. 그러나 7일만에 가무단에서 나와야 했다. 예술부문 등 조선의 상층건축에 외국인은 있을수 없었다.

  화교와 제주도 해녀의 연분

  진향란의 부친 진씨(陳氏)는 산동반도의 봉래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상륙한 화교이다. 그곳에서 산동의 동향사람을 따라 청진에 갔으며 일본인의 회사에서 일거리를 얻어 살았다.

  “외할아버지도 목수인데요, 아버지도 일본인의 가구점에서 목수일을 배웠대요.”

  중국 한족이 본격적으로 조선반도에 머물며 살게 된것은 19세기 말부터이다. 1882년 40여명 상인이 반도에 입국하면서 이들이 화교의 시초가 되고, 1884년부터 인천 등 지역에 화상(華商)조계지가 설치됨에 따라 인천의 화교가 천여명에 달했다. 지금은 화교가 6천여명, 산동에 본적을 둔 화교들이 대부분이다.

  모친 김순덕은 열일곱살 나던 1939년에 청진으로 숙명의 북진(北進)을 한다. 제주도의 다른 해녀들과 함께 청진의 제일 큰 일본회사에 일군으로 모집되였던것이다.

  그런데 바다의 물귀신처럼 무서운 소문이 돌았다. 일본군이 싱가포르에 위안부를 배로 실어 간다고 했는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뽑혀서 징집된다는 것. 결혼은 그때 김씨에게 생명의 동아줄과 다름이 없었다.

  김씨는 심부름을 다니던 세탁집 녀인의 주선으로 서둘러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자주 만나던 사람이였다고 해요. 그때 아버지가 뜨거운 물에 발을 상했답니다. 엄마가 병문안을 가면서… 마침내 결혼이 됐어요.”

  물귀신의 바다같은 “위안부”의 배에 오르지 않기 위해 김씨는 정말로 쉽지 않은 용단을 내렸던것이다.

  조선전쟁 때 진향란이 살던 시골집은 폭격을 맞아 굴뚝 하나만 달랑 남았다. 김씨는 큰 동생을 업고 콩기름이며 입쌀을 들고 이불을 지고 다니면서 자식들을 먹여살렸다. 중국에 온 후 김씨는 단 두 달만에 랭면료리를 배워내고 공영식당의 료리사로 되였다.

  조선족 무용인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지금 진향란의 신분증에 등재된 족명(族名)은 아버지의 한족이나 어머니의 조선인이 아닌 중국의 조선족이다.

  “전문지에 ‘조선무용의 전승’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요, 구설수가 따라왔습니다.”

  연변의 모 잡지에서 항의가 비발쳤다. 조선족이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조선족무용을 연구하냐고, 진향란은 그 걸음으로 파출소에 달려가서 호적부를 고쳐버렸다. 그녀는 조선인 모친을 두고있었고 또 그녀의 출생지가 바로 조선의 청진이고 부친이 중국인이였기때문에 중국조선족으로 고치는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귀국후 13년만인 1980년에 진향란의 족명(族名)이 바뀐 비사(秘事)는 이렇게 생겨났다.

  진향란의 무용전승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결코 끝나지 않았다. 1981년, 중국예술연구소의 연구원이 특별히 길림성으로 만족무용고찰을 왔다. 길림성문화국에서는 춤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진향란을 연구원에게 소개, 고찰팀원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3개월동안 길림성의 구태 등 만족지역과 흑룡강성 경박호지역을 일주했다.

  이때 진향란은 만족 민간의 무속무용을 체계적으로 발굴, 정리할수 있었다. 만족무용은 크게 민간무용과 궁정무용 두가지로 나뉜다. 궁정무용은 문자기록에서 발견, 발굴할수 있으며 무대에 재현할수 있다. 그러나 만족의 민간무용은 글마저 사라진 현상황에서 유실되는게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반에서 만족무용이라고 불리우는 일부 춤은 기실 한족무용과 혼용되고있는것이 현주소라고 진향란은 밝힌다.

  “만족의 무속 북춤인‘조고(抓鼓)’에서 샤먼의 주문은 한족의 전형적인 북춤인 태평고(太平鼓)에서 읊는 주문과 전혀 달라요. 음조도 당연히 서로 같을수 없죠.”

  후날 진향란이 창작한 만족무용 《팔기(八旗)녀자》는 단연 가무단의 대표작으로 출품된다. 진향란은 30여년전에 그가 만났던 오랜 예술인들이 이미 전부 사망했다고 하면서 연신 탄식을 했다. 만족 민간무용의 연구가 아주 시급하고 필요하지만 전문자금이 결여하고 또 그 무용을 전승할 후계자가 없는것이 문제라면서 진향란은 얼굴에 그늘을 짓는다.

  그런데 왜서 아직도 무용학교를 계속 운영하고 있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진향란은 법인으로서 무정하게 학교를 팽개칠수 없다고 대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무용인들은 모두 관광을 다니고 온천에 가는 등 여유를 즐기고있는 상황이란다. 그냥 춤에만 몰입하고있는 그녀를 비웃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고 진향란은 말한다.

  “저의 큰 녀동생은 중국 공정원 원사이구요, 둘째 녀동생은 유명한 건축회사의 부리사장입니다. 넷째 녀동생은 성화교련합부의 고급 관원이고 막내 녀동생은 일본에 정착하구 있어요. 뭐가 부족한게 있다고 아직도 춤을 놓지 않고있는가고 물는 사람들이 있어요.”

  진향란은 일찍 1998년부터 무용학교를 운영하고있었다. 길림성가극원의 소속으로 출범한 이 무용학교는 워낙 무용인들을 양성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게 목적이였다. 후날 가극원이 해체되면서 민영학교로 바뀌였고, 이에 따라 진향란은 자의든 타의든 무용학교의 운영자로 변신하게 되였던것. 현재 무용학교는 동북의 특성에 따라 조선무용과 동북의 양걸, 만족무용, 민족무용을 주체로 체형미 등을 위한 발레 등 4개 과목을 가르치고있다. 그동안 무용학교의 두 작품이 교육부에서 개최한 전국성 예술축제에서 모두 1위 입상작으로 되였다.

  “낳은 정 보다 기른 정이 더 깊다.” 진향란은 엄마처럼 따르는 아이들에게 깊은 모정을 느끼고있었다. 그녀는 이런 학원생은 졸업한후 따로 그 무슨 소개가 필요없이 100%로 직장을 찾게 될것이라고 자랑스레 말하고있었다.

  “실습을 나갈 때면 서로 다투어 나가지요. 학원생 래원도 많구요.”

  조선족 무용인 손룡규와 함께 있는 진향란, 뒤쪽의 서예작품은 저명한 중국 고구려 연구학자인 방기동이 무용인안해에게 남긴 유작이다.

  2016년, 진향란의 무용학교는 중국 교육부가 인가한 “민족전승학교의 모범”으로 뽑혔다. 그러나 무용학교는 지난 15년동안 국가의 돈 한푼도 쓰지 않았다.“하자면 무조건 해내는” 엄마의 해녀정신이 또 딸애의 몸에서도 빛을 발한것이다.

  진향란은 지금 어린 제자들이 무용인으로 사회에 진출할 때 그녀가 예전에 입상한것처럼 더없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산중에 보배 인삼을 심고 키우듯 무용의 전당에 춤을 만들고 키우며 삶의 보람을 찾고있는 것이다.

  “춤을 출 수 있을 때까지 춤을 만들겠습니다. 학교를 벗어나면 그때는 전문 무용연구를 하고싶어요.”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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