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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정출 흑룡강성 녕안시조선족중학교장 '목단강시 명교장'으로 된 이야기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03.03일 14:12

(흑룡강신문=하얼빈) 경박호의 맑은 물줄기가 원류인 목단강 상류에는 유서 깊은 녕안이라는 곳이 있다. 두손 모아 기원하는 “안녕!”을 바꿔놓은 이름이여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이름이다. 그만큼 녕안이란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른다는 생각이다.

  이 곳은 3만4천여 명을 헤아리는 우리 민족이 오붓이 살고 있는 산 좋고 물 맑은 곳이다. 이 곳에는 옛날 왕궁의 공양미로 소문 높은 석판에서 재배하는 질 좋은 “향수입쌀”이 있는가 하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언새호 인 경박호 그리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하삼림이 있다. 하여 국내외에 웬 간히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녕안이라는 자연지리 에 대한 자랑이라고 본다. 결코 어느 개인의 피타는 노력과 신고에 의하 여 가꿔낸 것은 아니다. 오직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는 이곳 사람들의 자지 방에 대한 자호일 뿐이다.

  내가 오늘 이 글에 모시려는 주인공은 장장 7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녕안시조선족중학교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며 빛내고 있는 녕안시조선족 중학교 현임 교장이다.

  2005년 11월에 교장으로 부임되어서 부터 학교를 자기 집처럼 알뜰히 꾸려가는 그의 참모습을 지켜보면서 농군이 아닌 그에 게 나름대로 “실농군”이란 이름을 선사한다. 실농군에게는 척박한 땅이 없듯 그의 교장경력은 신근한 농군과 너무도 흡사하기에 자연히 떠올린 연상이다. 그의 역역한 발자취를 더듬어보노라면 오직 실농군에게만 있을 수 있는 근면과 발붙인 땅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이 가능한 결실에 깊은 감동을 여미게 된다. 그 피타는 노력과 끈임 없는 추구에서 보여 진 오직 그 에게 속하는 그의 인생 3부곡을 엮어보련다.

  그와 녕안과의 인연

  리정출, 남, 1963년 흑룡강성 태래현에서 출생, 녕안과는 꼬물만한 연관이 주어지지 않은 천리 상거한 태래현의 태생이 어쩜 녕안중학교의 주인으로 당당히 자리 굳혔으며 또한 녕안 본토의 사람보다 녕안을 더 아끼고 녕안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한 것일까?

  이런 의문의 고리를 풀자면 그의 대학생활부터 추적이 되여야 할 것 같다. 1981년 8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흑룡강성사범학교 일어전업에 입학한 그는 사범에서 학습하는 기간 줄곧 우수한 성적의 보유자였다.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우수하여 학습하는 내내 선생님들의 총애를 한 몸에 안았으며 동학들과의 관계도 좋아 말 그대로 참하다는 인상 그 자체가 전부였다. 그런 그였기에 최우수생으로 졸업을 맞이하였다. 전 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상에 대한 높은 요구의 체현이고 평소에 다진 실력의 과시였다.

  바로 그가 바야흐로 졸업을 맞이하는 1983년 7월, 그때 한창 호황을 맞으며 우리성에서 두각을 보이던 녕안시조선족중학교에서 사범으로 교사 초빙을 갔다. 당시 녕안조중은 전성적으로 손을 꼽는 학교였다. 특히 일어 과는 전성에서 제일 앞자리에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하기에 일어 전업을 배운 학생을 상대로 교사를 초빙하는 데는 조건이 각박하였다. 문법 같은 기초지식은 물론 회화에도 상당한 요구를 제기하였다. 졸업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녕안조중의 초빙조건은 다른 학교에 비해 좀 까다로웠으나 녕안이란 곳의 흡인력이었던지 아니면 학교이미지가 좋아서였던지 선후하여 10여 명이 응하였다. 하지만 웃고 들어갔다 울고 나오는 우거지상이었다. 모두 낙방이었다. 그때 그는 아예 응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그의 속셈을 말한다면 녕안조중에 유혹이 없은 것은 아니었지만 고향에 부모님이 계시는데 어찌 천리 상거한 타향을 선택하겠는가 하는 우려에 선 뜻 나서지 않은 것이 진짜 이유였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를 놓지 않았다. 자원도 하지 않았고 주동적으로 초빙에 나서지도 않았지만 녕안조중 당시의 교무주임선생님은 직접 학교와 학급담임을 찾아 그의 정황을 속속들이 요해하고 그를 짚었다. 과연 그는 녕안조중의 기대에 가장 알 맞는 적임자로 뽑혔다. 물론 그 까다로운 초빙 관문을 거뜬히 통과하여 당장에서 계약을 체결하는 파격적인 수속까지 마무리 했다.갈고 닦은 숨은 노력이 드디어 햇빛을 보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녕안과의 인연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정직한 성품은 그의 재부

  일반적인 경우 새로 온 교사에 대해선 단련의 기회를 주는 것이 상례다. 그러기에 처음에는 과임을 맡기거나 보조역할이 가능한 자리를 주게 되여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혜택이 없었다. 그해 녕안조중에서는 무려 13 명의 새 교사를 새로 보충하였는데 대부분의 교사들은 우에서 말한 그런 가벼운 짐이 차례졌지만 유독 그에게는 첫 시작이 담임이었다. 어찌 보면 그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그것도 말썽이 좀 있었던 학급이었다. 까다로운 초빙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보상이랄까? 학교의 기대와 믿음은 당사자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적어도 새로 들어온 기타 교사들과 비교하면 남다른 “혜택”이였다. 하지만 사업 분배가 있자마자 투정을 부리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는 것도 새로 들어온 교 사들의 처지기도 하였다. 훗날 일련의 사실들이 웅변적으로 말해주다시피 그에 대한 학교의 신뢰와 믿음은 엇나가지 않았다. 그런 중임은 당사자의 잠재력을 발굴하는데 밑거름을 깐 겪이 되였다. 말하자면 눌리거나 깔리면 더 용을 쓰는 성격의 개성에 어쩜 합일이 된 경우라고 해야 겠다.

  지나간 일을 이야기 하기는 서서 물 마시기라는 말이 있듯 오늘날 회고 해보면 자랑스러운 어제이나 당시로 말하면 그에게는 너무도 무거운 짐이 였음을 우리는 묵과할수 없다. 금방 교문에 들어선 햇내기 교사에게는 고험이었고 전쟁이나 다름이 아니었다. 원래 기초가 그리 탐탁한 학급이 아니라는 것이 첫날 첫 대면에서 드러났다.

  일부 남학생들의 어째보려는 듯한 까부장한 눈길, 삐딱하게 걸상에 기대앉은 자세, 웃옷단추 다 풀어놓고 부채질이 분주한 초면인사는 전혀 마음 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다 학생 수는 반을 꽉 메웠다. 교탁 앞까지 빼곡하였다. 한마디로 숨이 꽉 막혀왔다. 갸름한 얼굴에 하얀 피부, 정다운 눈매 에 후리후리한 체격의 애숭이 새 교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었다. 하지만 이는 현실이었고 이 학급은 그가 맡아야 할 학급이었다. 책임감은 그에게 서뿔리 대해서는 밥도 죽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주었으며 나약함을 보여서는 절대 원래 달고 있던 꼬리표를 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게 하였다. 그렇다고 막나가는 것 또한 명지한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만큼 사범에서 배운 이론지식을 실천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자신의 참다운 자세로 학생들의 신뢰를 얻어낸 것이 그의 첫 걸음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리력을 료해하는 일에 모를 박았다. 녕안시는 동경성진을 중심으로 남쪽과 녕안진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으로 나누어진 면적이 비교 적 큰 현급시다. 학생 내원으로 보면 녕안시의 제일 남쪽 마하향 마련하촌 에 있는가 하면 제일 북쪽 범가향 삼가자 까지 망라되었다. 이틀이 멀다하 게 싸움질에 과임과의 버성김에 이런 번다한 일이 빌새 없는 개학초기 그는 마음을 다잡고 “자전거여행”을 결심하였다. 골칫거리 학생들을 중심으로 가정방문의 길을 선택하여 실천하였다. 한학기의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을 모두 바쳐 “자전거여행”으로 전 학급 60여명 학생들의 가정을 누계로 두 번이나 돌았다. 가정방문은 그냥 가정방문에 그치는 일이 아님을 그는 피부로 느꼈다.

  감정을 중히 여기고 인간성을 앞자리에 놓은 그의 인도주의 소행은 대뜸 학부모들의 감동을 자아냈으며 그의 성근한 태도와 학생들에 대한 책임성은 대뜸 학부모들의 찬성을 이끌어냈다. 자연 학부모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을 뿐만아니라 학생을 교양하는데도 크게 한몫을 하였다. 강다짐이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는 진정으로 이어진 사생관계는 그만큼 상상 밖의 힘으로 바뀌였다. 애꾸러기는 더는 애꾸러기가 아니라 학급의 기둥으로 부상하는 양성순환을 이끌어낸 학급은 학습이나 활동에서 선두주자로 달렸다. 짧디 짧은 1년간 문제거리 학급이라는 꼬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일약 학교의 우수학급으로 평선되어 표창까지 뒤따랐다. 정말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한 학기였으나 그 어려운 한 학기는 그에게 교사에게 있어어 제일 소중한 재부- 신뢰의 중요성과 인성교육의 단맛을 보게 하였다.

  고달픔과 성공의 단맛을 함께 감내하면서 착잡한 한해를 넘긴 1984년 9월 금방 개학이여서 개학초 사업에 한창 열을 쏟고있는 데 뜻하지 않던 동창으로부터 하해를 권고하는 전화를 받게 되였다. 학교 때 단짝이던 그는 한 달 봉급 3000원이 웃돈다면서 자기가 일하는 일본회사의 사장비서직에 그를 추천했는데 사장이 이미 90% 답변한 상태라며 가급적이면 교사직업 을 때려치우고 빨리 나와달라는 것이었다. 잠간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의 3000원이면 로임의 열배에 해당한 돈이다. 물론 돈 문제 뿐만도 아니었다. 교사직이 이렇게 힘에 부치는 일이라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 한 그에게는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그만큼 그때 그는 녕안에서 혈혈단신 이였으며 충분히 뛰쳐나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상황이었다. 그리고 비난 받을 일도 아닌 때였다. 10여년의 교령을 가진 교사들도 얼굴색 하나 변하 지 않고 자랑스럽게 교단을 떠나는 시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최종선택은 포기였다. 그런 선택을 했을 거면 졸업 그 당시 에 했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다면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길을 피해 달아나는 같은 죄책감을 감당하기엔 자기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것이 전부 였다. 역시 그 사람만이 가능한 선택이었다. 마음을 차분히 갈앉힌 그는 교육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일관적인 사업 작풍과 학생을 우선시 하는 교육이념은 담임을 맡은 내내 변함이 없었으며 그런 초지일관은 끝내 사회 와 학교 그리고 동사자들의 긍정과 찬사가 뒤따랐다. 그런 일매진 신고로 하여 그는 담임경력 6년이 되던 해인 1989년 교사절을 맞으며 녕안조중 에서 유일하게 성급 우수담임으로 당선되어 표창 받았다. 이는 오늘까지의 녕안 조중 역사에서 전무후무의 영예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그의 교육교수 생애에서 더는 주어지지 않은 담임경력이기도 하다.

  그의 지꿎은 추구는 충분히 학교의 중시를 불러일으켰으며 대담히 등용 하는데 이르렀다. 1989년에 새 학기를 맞으며 그는 학교 공청단서기로 발탁 되였다.

  그는 일단 일을 시작하면 끝을 보며 오직 그 일을 완미하게 해야 직성을 푸는 성격이다. 담임사업을 내려놓고 공청단과 학생회의 사업을 맡은 그 에게는 기정된 모식이 따로 없었다. 모든 사업전개는 오직 자체의 힘에 의거해야 했다. 그만큼 그때까지 학교의 공청단사업은 거의 공백에 가까운 실정이었다. 두서가 잘 잡히지 않는 초행길에서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학교 단조직이나 학생회는 학생단체이기에 학생들의 심리특점에 맞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힌 그의 첫걸음은 학생간부 배양이었다. 한학기의 노력을 거쳐 학교 단지부와 학생회는 그 존재를 과시하였다.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학생회사업은 학교의 정기를 고양했을 뿐만 아니라 활역소가 되여 교정문화에 생기를 부여하였다. 그가 서기직을 맡아 짧은 3년 만에 예의교양을 선도로 하는 교정문화를 창출하여 녕안 조중만의 특색은 차츰 학생들의 몸에서 빛을 뿌렸다. 수지 한장 볼수 없는 깨끗한 교정, 오는 손님들에게 깍듯이 인사 올리는 학생들의 자각적인 행위 속에는 그의 숨은 노력이 깃들었으며 아울러 그의 사업능력도 과시되었다.

  사업성과와 중용은 정비례가 된다. 1992년 9월부터 그는 학교 정교처 주임사업을 책임지게 되였다. 정교처는 담임사업과 학생사업을 주관하는 부서로서 학교의 일상에서 제일 골치거리가 많은 사업이었다.

  사업의 수요에는 무조건 복종을 하여온 그였지만 이 사업의 분량만은 어 깨가 뻐근해났다. 한주일이 멀다하게 들이닥치는 사건들에 정말 손을 놓고 싶을 만큼 힘에 부쳤다. 사업은 그의 유연하고 화합적인 성격마저 고치지 않으면 안될 만큼 핍박하였다.

  정교처주임사업 10년에 학교의 일상은 평온을 찾았지만 그의 심신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그의 발길은 공안국과 병원 그리고 법원에 이르기까지 닫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만큼 그 세월에는 학생들의 악성사고가 빈번하였다. 지어 원칙적인 문제에서 한발자국도 드틸 줄 모르는 그의 정직 성은 야밤에 창문유리를 부수는 “보상”까지 받은 적이 있으며 “호랑이선생” 이라는 격에 맞지 않는 별명도 얻게 되였다.

  하지만 불의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의 원칙성은 드디어 사람들의 인정과 긍정 그리고 찬사가 뒤따랐다. 지어 악의를 품었던 일부 학생이나 학 부모들도 나중에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무릎을 꺾었다.

  존경과 신뢰는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로가 싱갱이질하는 과정이었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서로에 대한 요해가 깊어지면서 결국 보석같이 반짝이는 인간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다. 이런 과정의 아픔 끝에 그에게는 강의함이 더 보태진 것도 사실이다. 하 기에 그에게 교장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아주 당연한 걸로 받 아 들였으며 오직 믿음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그는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사람

  “그는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사람이다.” 이는 녕안시조선족중학교 1인자의 '학교경영의 이념'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는 또한 녕안시조선족중학교를 다녀간 모든 분들의 한결같은 평가이기도 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조선민족학교들에서 겪고 있는 진통을 녕안중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5년 11월에 교장으로 발탁한 그의 앞에는 희망 보다 곤란이 첩첩 했다. 한창 저조기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다. 학생수의 격감, 교사대오의 교단 리탈에 잇따른 사회의 불신과 의심이 머리를 들었 고 교원들의 사업열성이 식어가고 책임감도 많이 떨어진 현실이었다. 거기 에다 학교는 380만원에 달하는 채무로 쉼 쉬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선 자리 답보는 죽음이다.” 이는 그가 교무회의에서 한 첫마디이며 그 의 학교운영사상이기도 했다. 주어진 곤란을 하나하나 실천으로 풀어나가 는 것을 목적으로 우선 틀어쥔 사업이 교사들의 “형상수립공정” 이였다. 안을 잘 단속하면 밖의 평판이 나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올곧은 주장이다.

  우선 학교지도부 지도자들의 모범역할에 모를 박았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지도자들은 우선이 되여야 하며 일반교사들이 할 수 없는 일도 지도자들은 해야 한다”는 강력한 조치였다.

  “하루가 비뚤면 당직 지도자 문제이고 한주일이 비뚤면 교장의 문제” 라는 타이틀에 분공이 명확하고 책임이 분명하게 되자 자신이 설 자리 앉 을 자리가 확실해지며 학교의 일상은 단 번에 긴장되고 박력을 찾게 되여 게으름이나 잔꾀로 응부하던 현상은 꼬리를 사리게 되였다.

  다음 교사들의 도덕건설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교사들의 책임감과 사업 열정을 살리기 위해 공평, 공정, 투명을 체현하는 완벽한 제도를 세우고 엄격히 집행하여 제도가 교사들의 자각적인 행위로 전환하게 하였다. 특히 학교이미지를 흐리는 “술 문화”에 대하여 각별한 중시를 돌려 교사신분 을 먹칠하는 그 어떤 사소한 행위도 자리를 틀지 못하게 닦달 하였다. 교사들의 사업실적에 따르는 상벌제도, 교사와 학년조 그리고 교연조의 연대책임을 강화하는 평가제도를 구축하여 교사들의 사업태도와 행위는 질적으로 변하였다. 교사들이 술을 마시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회의 평판은 조용 히 갈앉았다.

  바로 이런 교사도덕건설의 양성순환을 틀어쥐고 그는 학교의 핵심 공정 인 학습기풍건설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학교지도부 성원 모두가 전교 6개 학년을 책임지고 과학적인 학습동원을 하였으며 명망이 높은 교사나 북경대학 등 명문대 입학생들을 청하여 강좌나 좌담을 진행하여 학생들의 학습욕구를 불러일으키고 학습목표를 명확히 하였다. 동시에 학습 성적이 훌륭하거나 진보가 빠른 우수학생에 대한 장려제도를 실시함으로써 학생들 의 주동학습열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그의 단호한 결책으로 한마음이 된 힘은 성적으로 주렁졌다. 전교 사생 이 단합된 모습은 녕안시중소학교문체예술제에서 본때를 보여주었다. 우리 민족 무용을 바탕으로 내놓은 집체무와 집단태권도 표현은 장내의 분위기를 고조로 이끌어 관중들로부터 “녕안조중이 최고”라는 절찬을 받았다. 뒤 이어 조직된 교정문화예술제도 생기와 활력, 조화로운 교정문화를 선보여 사회와 학부모들과의 화합의장으로 되여 좋은 효과를 보았다. 인성교육을 고양한 보람으로 녕안조중은 그가 교장으로 된 짧디 짧은 1년 안에 교사가 달라지고 학생이 달라지고 학부모들이 달라졌으며 학교를 보는 사회의 시 각이 180도로 달라졌다.

  교사들의 사업욕구가 봄풀마냥 되살아나고 집단영예를 자신의 생명처럼 아끼는 양호한 자각이 떡잎을 펴기 시작하자 사업에 대한 열정은 그대 로 행동에 옮겨졌다. 휴식일도 마다하고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는 고중 3학 년과 초중 3학년 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업은 학부모와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하면 초중1, 2학년 교사들은 아무런 보수도 따지지 않고 아침 점심 출근시간을 당겨가며 학생들에게 따스한 부모정을 대신하는 자각적인 소행은 학부모와 더불어 그를 감동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교직원 모두가 학교를 자기집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뜨거운 마음에 받들려 학교의 일상은 생기와 향상으로 차 넘쳤다.시대를 리드하는 그의 탄탄한 사업 자세는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을 바탕으로 허상이 아닌 실상을 펼쳐보였다. 하지만 학교의 종합실력을 키우는데 있어서 이는 근근히 시작에 불과하였다. 그가 이루어낸 실적은 다만 이것뿐이 아니었다. 그의 명지한 결책으로 가꿔낸 호함진 열매에서 이 두가지는 빼놓을 수 없다.

  1) 교수질로 학교를 홍보

  녕안시조선족중학교는 70여년의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완전중학교로서 흑룡강성민족교육의 발전에 빛나는 한 획을 그었다. 학교가 설립한이래 7000여명의 초중졸업생과 5000여명의 고중졸업생을 양성하였으며 선후하여 흑룡강성 문과 수석, 목당강시 리과 수석과 문과 수석을 배출하였으며 북경대학, 청화대학, 복단대학 등 명문대학과 국가 중점대학에 700 여명 학생을 보냈다.

  학교의 훌륭한 교수질은 사회적으로 한결같은 인정을 받게 되였고 수많은 학생들이 이상을 실현하는 요람으로 여기고 이 학교에 찾아들기도 하였다. 지난세기말까지 전 성 10여개 시, 현의 학생들이 이불 짐을 싸들고 밀물처럼 몰려왔으며 동북 3성의 형제학교들에서는 이 학교의 선진적인 교수관리 모식을 배우러 간단없이 찾아들었다. 물론 이는 한시기 휘황한 학교역사에 대한 회고이다

  “성적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어제의 휘황일 뿐 오늘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념이 확고한 그의 새로운 사업모식은 또다시 녕안시조선족중학교의 새로운 궐기를 겨냥했으며 새로운 리듬으로 새로운 악장을 펼쳤다. 지속적인 “교사형상공정”의 실시로 일신한 교사들의 정신면모의 크나큰 변모를 기초로 그는 현유 90여명 교사들의 업무수준제고 등 시대와 동보 하는 교학교수질 제고를 위하여 물심 양면의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자아조혈공능”을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교사 노령화가 부단히 확장되는 실태을 감안하여 “낡은 터에서 이밥 먹던 배심”을 없애는 일환으로 노 교사들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교내 공개과(公开课)를 진행하였으며 그들 자신이 낡은 교수모식을 감안하도록 하였다. 인식이 선도하여야 그에 따르는 행동이 이어지듯 노 교사들의 은근한 배심은 세례를 받게 되였다.

  “새로운 교수모식에 머리를 싸매지 않으면 안 되겠다”가 그들의 공동한 반성과 반발이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이 된 교수질제고의 열풍은 몇 년 간 이 학교에서 이어 지고 있으며 해마다 새로운 열정으로 끓어번지고있다. 련 8년간 학교 에서는 교내 교수전시활동을 한학기도 거르지 않고 진행하여왔는데 교수일 선 교원 100%가 참가하였으며 이젠 완전히 학기교수임무로 각인되었다. 이런 “자아조혈공능”의 힘으로 일선교사들의 교수실력은 눈에 띄이는 향상 과 진보를 보여주었으며 괄목할만한 성적을 선사하였다.

  현재 학교에는 성급골간교사 5명, 성급교수능수 4명, 목단강시 교수능수 23명, 목단강시 골간교사 25명이 있다. 그리고 성급교수경연에서 25명 교사가 1등을, 8명 교사가 2등을 따냈으며 30여명 교사가 목단강 시교수경연에 참가하여 1등의 월계관을 따냈다. 몇 년 간 이런 실력을 키웠기에 학교는 선후로 “전국조선족중학교교수실험선진학교”, “흑룡강성민족 교육사업선진단위”, “목단강시교육교학연구선진학교”, “목단강시문명단위” 등 묵직한 공로패를 수여받았다.

  이 몇 년 간 그는 성교육학원 민족교연부와 손잡고 어문, 일어 등 학목별 활동을 3차나 개최하는 영광을 지녔으며 가까운 목단강시 교원연수학 원과 손잡고 수학, 정치, 역사, 지리 등 학과목 교수연구 활동을 수차 벌려 좋은 효과를 보았으며 회의조직 측의 한결같은 호평은 물론 회의동석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내놓은 “자아조혈활동”이 보여준 새로운 차원의 전시였으며 탄탄한 실력으로 시대를 도전하여 진로를 개척하는 실제적인 움직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몇 년 간 겨울방학과 여름 방학간 교사연수차로 강습에 참가한 교사가 전체 교사들의 80%를 웃돈다.

  언제나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랑에 린색한 그는 학교를 홍보한다는 말 에 마지못해 이 몇 년간 대학입시에서 보여준 성적을 내놓았다. 아래의 통계는 전성조선족 동류학교 대학입시성적통계표에서 체현된 녕안조중 학생들의 성적정황이다. 년도 별로 밝히면 아래와 같다.

  2006년 이 학교 학생들은 대학입시에서 전례 없는 성적을 기록하였다. 중점대학입학선에 든 학생과 보통대학점수선에 든 학생이 그 전해에 비하 여 두 배로 껑충 뛰어 올랐다. 그 해의 목단강시문과 장원이 나왔으며 그해의 대학입시 각 학과목성적이 학과마다 성 평균점을 대폭 초과하였다. 리과 종합은 성 평균을 16.7이나 초과했고 기타 과목도 성 평균을 10점이나 초과하는 좋은 성적이다. 하여 당시 흔들리려 하던 학생들에게 강심제가 되여 큰 학교로 움직이려던 일부 학생들을 100%로 안심시켰으며 오히려 다른 현, 시의 학생들이 자진하여 이 학교를 찾는 좋은 국면이 나타났다.

  2007년에도 계속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다. 중점대학과 보통대학 입 학선에 든 학생이 배로 늘어났는가 하면 600점 이상을 따낸 학생이 전해 에 비해 두 배로 뛰어 올랐다. 뿐만 아니라 2006년도를 이어 목단강시문과 수석을 쟁취하였다. 그해 북경대학입학점수선에 든 학생이 무려 3명이나 되었다.

  2008년에도 전성 17개 조선족중학교와의 비교에서 현저하게 앞자리를 차지하는 장거를 계속하였다. 600점 이상이 11명으로 응시생의 9.6%, 이는 600점 이상이 성 비률(4.05%)로에 비해 5.5를 초과하였으며 중점 대학점수선에 든 학생 16명으로 응시생의 14%, 이는 중점대학점수선에 든 성 비률(9.28%)보다 4.72를 초과한 것이고 일반대학 점수 선에 든 학생 43명으로 응시생의 38%, 이는 성 비률보다 9%이상을 초과하였다.

  2009년에도 전성동류학교대학입시성적통계표에서도 녕안조중의 위치는 변함없이 뚜렷한 한자리가 밝혀졌다. 전교 113명 입시생중 600점 이상이 2명(1.79%) 중점대학점수선에 든 학생이 17명(15%), 일반대학 점수선에 든 학생이 49명(43.3%)로서 모두가 흑룡강성의 평균 비률을 거의 배나 초과하였다.

  모든 성적의 배후엔 그만한 성적을 따낼 수 있는 노력이 숨어있는 것이다. 2010년 김려화학생이 북경대학에 입학하였고 2013년 김준수학생이 북경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2016년에도 줄곧 녕안조중에서 초, 고중학습을 마친 한국 류학생 서대원학생이 청화대학에 입학했다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녕 안조중은 마치 활활 타번지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기가 10여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혁혁한 성과는 사회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물론 이는 녕안조중 교사 전체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일인자의 명지한 결책과 신고 그리고 고심참담한 노력의 결실임을 묵과할 수 없다. 녕안시 정부에서는 그를 “녕안시 10대공복”으로 추대하였다. 이 특수한 영예는 그만큼 함금량이 많은 것이다. 전 시 교육계통의 유일이었으며 조선족으로는 오늘까지도 그가 유일하게 받은 특별한 칭호이다.

  2)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교정을 자기집 처럼 아담하게 꾸려가는 것도 홀시 할 수 없는 교정문화의 일환으로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함을 보여주는 현시대 이다. 학생들의 심미의식 그리고 그들의 물질적인 향상을 모른다면 결국 학교가 피동에 빠지는 국면을 만구하기 어려워진다. 학교 학생기숙사에 학생이 들려고 하지 않는 기숙사경영불황이 단적으로 이 점을 보여주었다. 40-50대의 눈에는 그만한 조건이면 괜찮다고 보지만 학생들의 눈에는 차 지 않는다는 것도 감안해야 하는 것이 현시대의 시각이다.

  학생들에게 마음껏 배우고 건실히 성장할 수 있는 양호한 학습생활환경 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2006년부터 자금마련을 위하여 발 벗고 “사회”에 나선 그는 말 그대로 몸을 절반 깎아내는 대가를 지불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불타는 사업심과 착실한 사업 자세는 인츰 녕안시 정부와 교육국 그리고 사회유지인사들의 긍정을 받았으며 한결같은 호응과 응집력을 구축하였다. 2006-2010년 5년간 녕안조중은 선후하여 녕안조중북경학 우회, 녕안조중상해학우회, 녕안조중심수학우회, 녕안조중학교발전기금회 그리고 녕안시 정계, 상계와 사회지명인사, 학부모로 구성된 녕안조중교무 이사회 등을 설립하였으며 한국 남서울대학, 강원도 인제군고등학교와 자매결연 등 사회영력 개척에서 전례 없는 “사회망(罔)”을 구축하여 유진인사 들의 전극적인 지지를 쟁취하였다. 학교에서는 선후로 멀티미디어교실, 어음교실, 실험실, 도서실, 미술전람실, 학생활동실, 교원사무실 종합활동 실 등을 전부 새로 수건 장식하였으며 원 학교의 낡은 쇠창 문을 전부 플라스틱 창문으로 바꾸었고 학교정원출입문을 비롯한 학교의 교실, 사무실출 입문을 현대식 문으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교원용사무상을 비롯한 사무실 설비의 최적화를 실현하여 교원들의 사업 환경과 설비를 최신식설비로 무장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학교교정에 사면 인행도를 포장하였으며 사회 의 창구로 알려지는 학교 정원대문도 새로운 최신식 문으로 바꾸었다. 이런 재건이나 수건에 든 총 자금이 500백만 원을 웃돈다. 거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크나큰 변화를 가져온 녕안조중이다. 하지만 이에 만족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의 추구는 그대로 학교의 추구이며 그의 꿈은 그대로 학교 전체 교직원들의 꿈이었다. 2006년부터 가동된 학교시설개변 및 학교 전체를 새롭게 구상해온 그는 전체 교직원들에게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그 꿈의 실현을 보여주었다. 2009년까지 우에서 말한 학교의 내부시설을 눈에 확 띄게 개변시켰다면 2010년부터 가동된 새로운 설계는 완전히 학교 전체 면모를 일신시켰다.

  몇 년 간의 고심참담한 노력으로 얻어온 하나 또 하나의 실적으로 정부와 유지인사들, 그리고 “사회망(罔)”과 학교학부모들의 전폭 지지를 쟁취한 그는 이런 유리한 시기를 틀어쥐고 또 한 번 새로운 전망계획을 위하여 200여만 원의 자금을 쟁취하여 학교 전체 외벽 면을 최신식으로 일신시켰으며 불황 을 겪어오던 6층 학생기숙사를 철저히 개조하여 학생과 학부모들의 눈 높이를 훨씬 넘어서는 “주택 식”으로 바꾸었다.

  언제나 말을 앞세우지 않고 행동으로 자신의 꿈을 보여주며 실천해가는 그의 드놀 줄 모르는 사업심과 초지일관을 보여주는 모든 사업실적들은 함께 사업하는 전체 교원들의 감동을 자아내기에도 족했다. 련 5년간 학교 는 해마다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지난해는 건축면적이 4800평에 달하는 체육관, 도서관, 종합활동 실을 일체화한 종합청사까지 일떠세워 학교의 모든 장비가 성급 표준화에 도달 하였다. 웬만하면 만족을 느낄 소지가 다분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완성 하지 못한 하나의 소망이 상급에 청시되었으며 이미 유관부문의 비준을 받은 상황이다. 바로 학교 운동장에 파란 잔디를 입히는 일이다. 올 여름 방학에 시공 일정이 잡힌 상황이다.

  “꿈은 바로 자신이 딛고선 발 밑에 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같은 환경이나 같은 조건에서 그 결과가 완전히 다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런 환경이나 조건에 대한 인간주체의 도전에서 기인되는 것이며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한 꾸준한 추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이미 이루어낸 모든 성과를 어제라는 지나간 자취로 가볍게 접으며 새로운 도전을 향하여 활보하는 그의 인생은 확고하고 보람찬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오는 말

  녕안 태생이 아니지만 장장 30여년 녕안의 교육사업을 위하여 헌신 적으로 사업한 그는 녕안 사람임에 틀림없으며 당당한 녕안의 별이 되었다. 그가 한 일은 사회의 긍정과 학부모 나아가 녕안시 조선족중학교 교직원들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으며 “목단강시 명교장”이라는 존함을 가지게 되였다. 겸손하고 사리에 밝은 그의 고매한 덕성은 우리의 귀감이 되기에 손색 이 없으며 그의 인생추구는 녕안의 보귀한 재부로 되여 역사의 한 폐지를 장식할 것이다. 끝으로 녕안시 정부에서 “10대공복”으로 추대할 때 그에게 차례진 수상 이유로 이 글을 마무리 한다.

  리정출 동지 수상 이유:

  어깨에 짊어진 중임을 사명으로 간주하고 창조적인 사업자세 로 맡은바 사업을 추진하여 저조기의 진통을 겪고 있던 학교를 “교풍이 바르고 학풍이 농후한 훌륭한 집단"으로 부상시킨 그는 학교를 집으로 간주하며 일 년을 하루와 같이 학교건설과 발전에 심혈을 쏟았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학교는 면모가 일신하여 사회 와 가장 그리고 사생들의 한결같은 절찬을 받았습니다.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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