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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별]오오무라 마스오의 이국 력사와 문학에 대한 애착(1)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7.03.07일 16:05

오오무라 마스오교수

머리글:

처음으로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선생님과 만나게 된것은 2016년 10월 2일 도꾜니혼대학(日本大学)에서 펼쳐졌던 조선족연구학회(일본) 전국학술대회 취재때이다.

오전 발표가 끝나고 휴식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회의측에서 정성들여 배렬해 놓은 점심식사자리의 제일 오른쪽 모퉁이 자리에서 홀로 식사하고 계시는 선생님의 뒤모습이 눈에 띄였다. 중간자리로 모시려 했더니 여기가 편하다며 기어이 구석을 고집하셨다.

세상이 인정하는 그 유명한 업적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수가 적으시고 온화하고 겸허한 분이셨다.

감히 명함을 꺼내여 선생님께 드렸다.“나하구 가까운 동네에서 사네.” 낮은 목소리와 함께 선생님께서도 명함을 주셨다.

그 말씀을 연줄로 전화와 메일을 선생님께 드리게 되였고 저택에 여러번 다녀올수 있는 오늘에 이르렀다.

오오무라 마스오선생님은 일본 와세다(早稲田)대학 명예교수이며 일본에서의 중국문학연구 학자인 동시에 조선문학연구학자이기도 하다. 일찍 중국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전반 조선반도의 문학에 대한 연구를 거쳐 연변의 조선족문학에 이르기까지 60여년을 쉼없이 지속적으로 달려왔다.

그는 고대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가 로자와 전국시대의 도가사상가인 열자의 사상을 알기 쉽게 일본에 전파한 일인이며 조선민족시인 윤동주의 사적(事跡)을 그 누구보다 앞서 발굴조사한 지구상 최초의 연구자인 동시에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중국조선족을 대표하는 작가인 김학철선생을 일본에 널리 알렸고 김학철문학을 파고들기 위해 긴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주고받은 김학철선생의 마음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 열정과 인내, 세밀한 탐구는 세인을 감동시킨다.

“오오무라선생을 두고 사람에 따라서는 일본인이라는 당시로서는 썩 유리한 처지에 있었기에 가능한 업적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으나 윤동주의 유고, 육필을 조사 검토한 지구상 최초의 연구자라는 점에 대해 모종의 토를 달 사람은 아마도 없지 않을가 싶다.”(문학평론가 서울대 김윤식교수)

“오오무라교수는 랭철하고 진보적인 지식인의 자세로 ‘남북한 등거리 문학연구’에 매진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진지한 학자이며 원만한 인격자요 진보적인 지식인’이란 3위일체로 조선민족 문학을 연구하는 외국인으로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한국문학평론가 중앙대 임헌영교수)

올해 83세 고령인 오오무라교수님, 그리고 평생의 동반자로 희로애락을 함께 해오신 78세의 아키코(秋子)부인님을 가까이에서 뵐수 있는 행운에 감격을 금할수 없다.

함께 웃고 함께 기억을 더듬으며 때로는 울컥하는 자신을 억제하면서 두달에 거쳐 천천히 나누어온 이야기를 그대로 적으려 한다.

중국문학연구와 조선문학연구

마스오선생은 1933년 5월, 도꾜 도시마구(豊島区)에서 동요 시인이셨던 아버지 오오무라 가즈에(大村主計)씨와 어머니 쿠니에(くにゑ)씨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였던 소학교시절에 도시부의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농촌에 이동시켰던 학동소개(学童疎開) 즉 가족이 흩어져 사는 그런 일본의 전쟁력사도 겪었던 그는 독일 문학가 헤르만 헤세를 숭배하는 문학소년시기를 보냈다.

중학교 1학년때 전쟁으로 인한 가난때문에 어머니를 잃게 된 그는 동시를 가끔 쓰기도 한, 어둡고 비뚤어진 성격의 아이였다.  

1953년 당시 신문기자였던 아버지의 뜻대로 와세다대학 제1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내성적이고 고집스러운 아들이 앞으로의 삶에 보장을 받을수 있도록 강경하게 추천하는 아버지의 의견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정치에 대한 실망을 느끼고 있은 마스오청년이였다.

그 즈음에 중국사상사(中国思想史)학자인 안도히코타로(安藤彦太郎)교수를 만나게 되고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때가 그의 연구인생에서의 작은 전환점이기도 했다.

당시 “아침8, 9시의 태양으로 나타난 중국”이라는 모택동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그는 아시아 일각에서의 중국의 정치와 문화에 대해 흥취를 갖게 되였다. 그는 쿠라이시(倉石)중국어강습회에 일주일에 세번씩 가면서 2년간을 중국어공부에 몰두하였다. 정치경제학부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중국어와 중국문학에만 열중했다.

1957년에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도꾜도리츠(都立)대학 인문과학연구과에 중국문학전공 석사로 입학한 오오무라선생은 “청조말기 사회소설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때로부터 《‘로잔유기(老残遊記)’에 대한 장필래의 평가》(평론), 《로신’인류의 력사’》(번역해설), 《중국부녀운동사의 한페지 추근사적(秋瑾史蹟)》(서평), 《로자・렬자》(번역), 《청말사회소설》(상・중・하)(론문), 《중국어교육의 문제점》(론문) 등 수십편을 발표하였다.

청나라말기의 견책소설 《로잔유기(老残遊記)》에 연구중심을 두면서 같은 시기에 무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한 청나라 말기 사상가인 량계초( 梁启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량계초가 일본의 정치인이며 소설가인 도카이산시(東海散士)의 정치소설 《가인의 기우(佳人之奇遇)》를 번역하기 시작한 시대배경과 번역과정, 중도에 번역을 중단한 원인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점을 발견했다.

12년 동안의 오랜 세월을 거쳐 집필한 《로잔유기》는 전 16권중 10권까지에는 약자들의 저항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량계초가 번역을 시작한 시도도 망국의 슬픔,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 등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기때문이였고 아시아의 련대감에서 시작된 량자의 비슷한 정치립장이 있었기때문이다.

허나 후반기에 들어서서 소설이 자유민권운동으로부터 국권주의론자로 모습을 바꾸어 가게 된다. 동시에 작가인 도카이산시가 조선왕조 민비(명성황후)학살사건을 추진한 중심인물이 되여버리고 조선에서의 중국세력을 배제하고 조선을 일본의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쯤에서 량계초는 붓을 꺽고 번역을 중단하게 된다.

연구과정에 오오무라선생은 번역 하나를 문제삼는다 해도 조선, 중국, 일본 이 3개 국의 사회상황과의 련관속에서 연구를 해야 된다는 점을 느끼게 되였다.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조선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한 오오무라선생은 “그 시대 당사자였던 조선사람은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을가?”라는 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시아의 문화와 력사가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되여야 한다는 생각에 중국문학과 동시에 조선문학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오오무라선생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될줄을 그때 그 자신도 몰랐다 한다.

선생님의 연구방식이라할가 중국문학을 연구하려면 우선 중국어를 익혀야 하고 조선문제를 취급하려면 또한 조선어를 배워야 하였다.

석사공부를 갓 시작했던 1957년 여름, 그때 일본에는 조일사전도 없었다. 학교안팎에서 조선어를 배울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하여 한영(韓英)사전을 무기로 자습하였던 그는 조선인 기관인 류학생동맹을 찾아갔다가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4월에 재일조선청년동맹 도꾜지부에 찾아 가서 야간학교에서 “아야어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놈이 왜?” 재일교포들을 위한 청년동맹인만큼 뜬금없이 찾아온 일본청년을 보는 눈길들이 곱지를 않았다. 간첩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받았다.

하지만 문턱을 넘은것만으로도 다행이였던 그 세월에 눈길따위는 두려운것이 아니였다. 결국 제주도에서 온 음성학전문가인 박정문선생님의 교실에 마지막까지 남은 세 학생중의 한명으로 열심히 조선어를 배웠다.

1961년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박사공부를 계속했던 오오무라선생은 아키코부인과 결혼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원문으로 읽는것을 목표로 삼았던 그는 아들이 태여나면 이름을 지원이라 짓자고 부인과 약속했다 한다. 조선문학에 대한 대단한 애착이였다.

1962년 3월에 도꾜도리츠대학 박사과정을 마친 오오무라선생은 1963년부터 2004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와세다대학 어학연구소, 와세다대학 제1・제2 법학부에서 중국어와 조선어 전임강사를 맡으면서 중국문학과 조선문학에 대한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최서해의 《탈출기》(상하), 조명희의 《락동강》(상하), 윤세종의 《빨간 신호탄》, 《조선문화사》(상하), 《김일성의 문예에 관한 론문①〜④》등을 번역하였고 《해방후의 조선문학》, 《20년대의 조선문학》, 《조선초기 프로레타리아 문학-최서해의 작품들》, 《2차 세계대전하의 조선의 문화상황》등 론문 수십편을 발표하였다.

중국문학에 비해 조선문학연구는 연구자가 적고 책자의 출판도 어렵고 소외된 분야였다. 더우기 도움을 받고싶었고 또 반드시 받아야 할 조선사람들은 일본사람을 믿지 않았다.

“중국문학뿐이였다면 연구가 쉽지 않았을가요? 왜 하필 험난한 길을…” 필경 세상사람들 모두가 궁금해할 질문을 드렸다.

“앞도 끝도 보이지 않는 어려운 곳이 연구자가 가야 할 길이고 재미있고 알고싶고 가치가 있는 연구였어요. 사실 20년전까지 일본에서 조선근대문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는 4,5명에 지나지 않았고 현재도 20여명에 지나지 않아요.”

환하게 웃으시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걸어온 길에 대한 긍지와 보람을 느낄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고생스러우면서도 의미가 있는 일들이였다.

1961년에 교직원을 대상으로 “조선어강좌”를 와세다대학 어학연구소에 설치하였고 점차 범위를 학생들로 넓혀가게 되였으며 오늘에까지 이어져왔다.

1970년 12월, 오오무라선생의 주최로 일본의 조선문학연구 사상 처음으로 된 관련 책자 《조선문학-소개와 연구》가 창간되였다. 언어학, 중국문학, 물리학, 생물학 등 전문연구분야에 종사하는 순수 일본인, 그것도 조선문학에 한해서는 아마츄어인 다섯명의 연구학자들로 무어진 그룹이 세워진것이다.

창간호를 낸후 독자들의 의외의 반향에 대해 쓴 오오무라교수의 글 《기쁨과 당혹과》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 따뜻한 격려의 말씀에 깊이깊이 머리를 숙인다. 그러면서도 ‘여기에 인간의 사랑과 일본인의 량심이 있다’든가 , 이 잡지의 창간이 ‘현대 일본문학 사상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씀까지 들으면 ‘잠간만, 우리는 안 그래’하며 도망가고싶어진다. 때로는 등에 지워진 책임의 막중함에 견딜수 없다고 느낀적도 있다. 우리의 힘은 보잘것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초라한 우리가 그러한 기대를 받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지금까지 일본인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것이다. 조선인 여러분의 말씀은 우리에게는 감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잔혹한 채찍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엉덩이를 내리치는…”

이때로부터 “장백산 이남에서 현해탄에 이르는 지역에서 살았던, 또는 살아가고 있는 민족이 낳은 문학을 대상으로” 《조선과 한국의 등거리 문학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한 오오무라선생은 조선반도의 민족, 민중 전체를 바라보면서 진정한 문학작품의 가치와 민족력사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줄곧 멈추지 않았다.

《사랑하는 대륙이여-시인 김용제연구》, 《시로 배우는 조선의 마음》, 《조선근대문학과 일본》, 《조선의 혼을 찾아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등 주요 저서들에 조선민족문학에 대한 오오무라선생의 순결한 애착과 순수연구에서 얻은 성과가 력력히 기재되여 있다.

/리홍매 일본특파원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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