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문화/생활 > 문화생활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얇게 썰어 더 섬세한 식감… 바싹 구운 고기에 매운 파채 '듬뿍'

[기타] | 발행시간: 2017.03.16일 10:57
[정동현 셰프의 생각하는 식탁] (47) 대패 삼겹살

육지에 닿는 데 꼬박 여섯 시간이 걸렸다. 연평도와 육지를 잇는 500t 급 카페리 '실버스타'호는 폭풍주의보가 내려도 바다를 건넌다고 했다. 하지만 악천후에 일정이 지연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늦게 도착한 동인천 연안부두 선착장은 흐릿한 어둠에 물들어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군대 선임 둘과 함께 나선 첫 휴가길이었다. 한 명은 1년, 또 다른 하나는 1년 반 선임이었다. 음침한 부두 풍경에 휴가 기분이 나지 않았다. 1분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눈이 째지고 머리가 작았던 1년 선임은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야, 뭐 먹고 싶냐? 고기? 대패 삼겹살 어때? 좋지?"

군견병이었던 그는 악명이 자자했다. 셰퍼드 군견을 길들인다며 자주 몽둥이를 들었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부대에 들어갔을 때 가까운 선임들은 그를 몰래 가리키며 '조심하라'고 속삭였다. 1년 선임은 아버지 기수, 2년 선임은 할아버지 기수라는 해군식 계산법을 대며 나를 싸고 돌았지만 고맙지 않았다. 그와 나는 동갑이었다. 그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흠칫했다. 그 와중에 나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인천에서 굳이 삼겹살을 먹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사이를 못 참고 그가 재촉했다.

"뭐 먹고 싶냐고?"

짜증이 섞인 그의 말에 나는 삼겹살이 좋다고 크게 답했다. 어딘가 약간 모자랐던 다른 선임과 그는 알고 보니 인천이 집이었다. 그 둘이 자주 간다는 대패 삼겹살 집은 동인천 부두 언저리에 있었다. 빳빳이 다린 해군 정복을 입고 부모님 앞에 서려던 계획은 어긋났다. 선임 뒤를 따라 기름기로 온 천지가 뒤덮인 가게에 들어섰다. 치우지 않아 더러운 탁자가 몇, 이미 고기를 굽고 있던 탁자가 몇 있었다. 노란 단발에 짧은 치마를 입은 종업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문을 받았다.

"대패 삼겹살 5인분에 소주 두 병요."

선임은 마치 대단한 주문을 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대패 삼겹살 1인분은 1500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당시 물가로도 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잠시 뒤 종업원은 큰 냉동고에서 대패 삼겹살을 가득 담아 테이블에 던지듯 올려놨다. 굽는 것은 내 차지였다. 대패 삼겹살은 불판에 오르자마자 노릇해졌다. 불길만 스쳐도 익는다는 말이 실감 났다. 선임은 계속 술을 권하며 "굽지만 말고 너도 먹어" 하고 말했다. 나는 급한 대로 고기를 입에 욱여넣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열기와 술기운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둘은 다른 간부들을 욕하며 술잔을 비웠다. 1년 선임은 작은 눈으로 카운터에 기대선 종업원을 계속 흘깃거렸다. 먹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두 선임이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나는 불판 구석에 놓인 바삭하게 구운 삼겹살을 집었다. 매운 파채도 양껏 얹었다. 짙은 갈색빛으로 익은 대패 삼겹살은 고무처럼 질겼다.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듬뿍 친 파채를 곁들여야 그나마 먹을 만했다. 나는 혹시나 들킬까 둘이 들어오기 전에 소주잔을 급히 들이켰다. 그제야 가슴 한구석 막힌 듯한 체기가 가셨다. 그리고 몇 인분을 더 먹고 나서야 저녁이 끝났다. 선임은 붉은 얼굴을 숙인 채 계산을 치렀다. 그는 종업원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사람 없는 길거리에 휴가 나온 셋이 서니 더욱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선임은 뭐가 아쉬운지 계속 뒤를 돌아봤다. 2차를 가자는 그들을 간신히 떼어내고 한 시간이 넘게 지하철을 탔다. 집에 와서도 내 몸에서는 기름 군내가 가시지 않았다. 나는 구겨진 정복을 벗어 세탁기에 던졌다. 그 뒤로 오래동안 대패 삼겹살을 먹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라디오에서 생고기가 고급이라는 광고가 나온 것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얼린 고기는 하품이고 두툼하게 썬 생고기가 상품이라고 했다. 근래에는 대패 삼겹살이 좋지 않은 고기를 얇게 썰어 사람 미각을 기만하는 장삿속이라며 비난하기도 한다. 새끼를 낳다 늙은 암퇘지는 등급외로 처리된다. 200㎏이 넘지만 고기 자체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기다. 이것을 냉동해 얇게 썰어 소비법을 개발한 것이니 어찌 보면 칭찬받을 일이다. 국내산 암퇘지라는 설명은 맞지만 틀리다. 등급외라는 표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돼지고기 원산지 표시는 의무이나 등급 표시는 의무가 아닌 탓이다. 허술한 제도와 이를 악용한 상술에 소비자만 피해를 보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대패 삼겹살은 여러모로 영리한 조리법이다. 맛의 원리를 따지면 서양의 베이컨과 비슷하다. 베이컨은 염지(소금에 절이기) 과정에서 수분이 빠지고 맛이 농축된다. 하품 베이컨은 염지하여 수분을 빼기보다 염지액을 살 속에 주입해 증량을 높인다. 그래 봤자 굽게 되면 빠지고 말 수분이다. 팬 위에서 턱없이 쪼그라드는 베이컨 맛은 보나마나다. 어찌 되었든 베이컨을 굽는 방법은 간단하다. 팬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고 열을 서서히 가한다. 그러면 베이컨에서 기름이 빠져나온다. 베이컨은 바로 이 기름으로 굽는다. 바싹해질 때까지, 단풍나무 색이 들 때까지 굽는 게 포인트다. 흐물흐물한 베이컨은 익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등급을 쓴 대패 삼겹살은 베이컨처럼 그 자체로 훌륭하다. 생고기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 맛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맛이 더하다. 얇게 썰었기 때문에 식감이 섬세하다. 면이 얇으면 얇을수록 총표면적이 넓어져 맛이 풍부해지는 효과와 같다. 이때 씹는 식감은 덜하지만 맛은 증폭된다.

시중에 대패 삼겹살을 파는 집은 많지만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한 곳은 많지 않다. 그중 이태원에 있는 '나리의 집'은 대패 삼겹살로 일가를 이루었다. 뜨겁다는 이태원의 밤, 헐벗고 허기진 남녀가 이 대패 삼겹살을 먹겠다고 줄 선 광경은 매일 밤 벌어진다. 기름기로 칠갑이 되어 반질반질한 바닥을 조심스럽게 걷는 것은 단골의 노하우, 어차피 많이 먹게 되니 양껏 미리 주문하는 것은 이 가게를 지키는 나이 든 종업원들에 대한 배려다. 질 좋은 고기를 바싹하게 구워 달고 짠 파채를 곁들이면 무섭게 인분 수가 늘어난다. 이 집에서 직접 띄운 청국장까지 시키면 가장 이국적인 동네에서 가장 토속적인 한 끼가 완성된다.

강남 논현동에 새롭게 문을 연 '대삼식당'은 나리의 집을 제대로 벤치마킹한 곳이다. 불판 종류, 테이블 디자인, 심지어 미끌미끌한 바닥마저도 닮았다. 그러나 일을 하는 이는 머리에 포마드를 바른 젊은 청년들이다. 빛깔 고운 삼겹살은 상품이 확실하고 아쉽지 않게 듬뿍 담아주는 파채와 무채, 김치는 이 집만의 개성을 더한다. 부대찌개와 김치찌개를 합쳐 놓은 듯한 섞어찌개와 굽다 나온 돼지기름을 써 만든 볶음밥은 청출어람이라 할 만하다. 단지 문제는 쉴 새 없이 먹다 보면 만만치 않은 값이 나온다는 것뿐이다.

지금이야 "내가 낼게!" 하고 호기를 부려도 지갑에 큰 무리가 가지 않는다. 혀도 간사해져 맛이 없는 것은 쉽게 가려낸다. 그러나 주머니가 가볍던 어린 시절에도 맛은 알았다. 단지 형편이 닿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을 유난히 많이 때리던 날카로운 눈빛의 선임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추억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도 가끔 살기 어린 그의 두 눈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십여 년 동안 이 대패 삼겹살을 먹지 않았던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된다.

[정동현 셰프]

조선일보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40%
10대 0%
20대 20%
30대 0%
40대 20%
50대 0%
60대 0%
70대 0%
여성 60%
10대 0%
20대 40%
30대 2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애니메이션 '짱구'에서 봉미선, 즉 짱구엄마 목소리를 연기했던 성우 강희선이 4년 전 대장암을 발견했던 때를 떠올리며 근황을 전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17일 tvN 예능 '유퀴즈 온 더 블럭' 에서는 짱구엄마, 샤론 스톤, 줄리아 로버츠, 지하철 안내방송 목소리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밥카드폰' 은밀히 류행, 학교 및 부모 경계해야!

'밥카드폰' 은밀히 류행, 학교 및 부모 경계해야!

최근 일부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일종의'밥카드폰'이 류행하고 있다고 반영하고 있다. 이런 장비는 밥카드케이스에 넣어 보관할 수 있으며 화면에서 나오는 백색광과 밥카드가 융합되여 은페성이 매우 강하다. 사용자가 편광필름(偏光膜)이 있는 안경을 착용했을 때만

민정부 긴급 성명! '이양가원건설' 등 활동 조직한 적 없어!

민정부 긴급 성명! '이양가원건설' 등 활동 조직한 적 없어!

'중국민정' 위챗 공식계정에 따르면 최근 민정부 양로서비스부는 범죄자들이 민정부 양로복무사(养老服务司)의 이름을 사칭해 이른바 '이양가원건설(颐养家园建设)' 등 활동을 벌인 것을 발견했는데 관련 행위는 사기혐의가 있다. 이에 대해 민정부 양로복무사는 다음과

수분하통상구 1분기 화학비료 수입 전년 동기 대비 4배 증가

수분하통상구 1분기 화학비료 수입 전년 동기 대비 4배 증가

4월 18일, 염화칼륨(氯化钾) 비료를 가득 실은 컨테이너렬차가 서서히 수분하철도역에 들어섰다. 이는 올해 들어 9번째 비료 운송 렬차로 벨로루시(白俄罗斯) 물랴로프카(穆利亚罗夫卡)역에서 출발해 러시아 글로데코보(格罗迭科沃)국경역과 수분하철도역을 거쳐 심양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