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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고개의 실종된 옛날의 그 추억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10.26일 07:47
(흑룡강신문=하얼빈)아직 인적이 드물던 그때 그곳에는 귀신이 출몰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늘을 가린 원시림이 그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렵이나 채집을 위해 원시림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적었다.

  "귀신이 나와서 늘 사람을 잡아먹는대요. 그래서 '귀신고개(鬼嶺)'라고 하지요."

  흑룡강성 오지의 목릉(穆棱)에 파다히 전하고 있는 옛 이야기이다. 이 귀신의 고개에는 청(淸)나라 대신 오대징(吳大徵, 1835~1902)이 개발한 후 동서남북이 통하는 사통발달의 곳으로 되었다. 나중에 오대징은 저도 몰래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이곳이야말로 팔면통(八面通)이구나." 목릉의 팔면통은 그렇게 청나라 대신의 입에서 작명되었다.

화평촌의 일각, 팔면통 시내의 일부로 되고 있다.

  실제 목릉하(穆棱河)의 유역은 일찍 발해국 때부터 사통발달한 곳으로 말을 달리던 목마장이었다. 목릉이라는 이 이름이 바로 강 이름으로 지은 것이며 만족말로 말(馬)이라는 뜻이라고 향토지 '계림구문록(鷄林舊聞彔, 1913)'이 밝힌다.

  조태삼(1928년 출생) 옹에게 팔면통이 처음 심은 건 지지라도 싫은 옛 추억이었다. "그땐 이불도 없었어. 포대기 하나만 달랑 들고 왔는데… 나무장사를 해서 입에 겨우 풀질을 했었거든."

  1936년경, 조태삼 옹이 8살 나던 그 무렵이었다. 그때 그 시절,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임당동에서 살던 조태삼 옹의 가족 4명은 제1진 개척단(開拓團)에 합류하여 팔면통의 신흥툰으로 건너왔다.

  중국에서 전선의 확장과 더불어 일본은 조선반도에서 대량의 조선인들을 집단적으로 만주와 몽골 지역에 강제 이주시켰다. 집단부락의 설치는 교통이 발달한 지역을 우선으로 진행되었다. 1936년까지 만주지역 특히 간도지역 집단부락의 추진주체는 조선총독부였으며 1937년 이후 만선척식(滿鮮拓植)주식회사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10년간 흑룡강성의 조선인 인구는 해마다 늘어났다. 1938년 1년 동안 조선인은 목릉현 한곳에만 해도 266가구의 1,249명이 정착했다.

조태삼과 홍길영 부부가 팔면통에 이주한 시일을 손꼽아 확인하고 있다.

  팔면통 지역에 이주한 농부들은 주로 경상북도 출신이었다. 조태삼 옹의 아내 홍길영(1936년 출생) 노인도 고향이 경상북도라고 한다. 홍길영 노인은 네 살 때 가족을 따라 이주, 처음에는 팔면통 북쪽의 조양촌(朝陽村)에 살다가 서쪽의 광의툰(光義屯)에 이주했다.

  그 즈음 스물여섯 살의 서재봉(1914년 출생, 이미 사망) 옹도 개척민으로 광의툰에 들어섰다. 그는 조부모와 부모, 남동생 셋, 큰형의 아들 등 아홉 식솔의 가장이었다. 아직 철부지였던 조태삼 옹이나 홍길영 노인과 달리 이주 과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경상북도의 영천 역에서 열차에 오른 후 환승 한번 하지 않고 줄곧 팔면통까지 달려왔다. 그들 개척민의 열차는 일본 군수열차의 시간표 틈새에 끼여 장장 1주일의 시간을 소요했다고 한다.

  그러나 호의호식을 할 수 있다고 선전하던 만주는 결코 낙토가 아니었다. 광의툰에는 갑자기 이상한 전염병이 돌았다. 서재봉 옹의 조부모는 마치 서로 뒤쫓기라도 하듯 사흘 만에 둘 다 사망했다. 그날따라 비가 하염없이 출출 내렸다고 서재봉 옹이 훗날 자식들에게 추억했다. 그때 마을은 흡사 무덤처럼 괴괴했다고 한다. 장례를 연속 치르게 된 서재봉 옹의 가족만 남았던 것. 사람들은 전염병을 피해 모두 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나중에 서재봉 옹이 가족을 이끌고 팔면통 시내에 내려온 것은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토비 우환 때문이었다.

1957년 서재봉 가족의 일부가 화평촌에 남긴 기념사진, 붉은 넥타이를 맨 '홍소병'의 두 딸 사진이 유표하다.

  어찌됐거나 조태삼 옹에게 아직도 창자를 아프게 긁고 있는 옛날의 기억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밥'을 먹어야 했던 일이었다. "그때는 거의 끼마다 정말로 '회억대비의 밥'을 먹었어. 그 밥이 싫어도 주린 배를 채우려면 별수 없었지."

  '회억대비의 밥'은 '문화대혁명' 때 중국에서 '종교의식'처럼 행하던 활동이었다. 옛날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을 체험, 이로써 해방 전의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고 오늘의 행복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그때 그 시절의 흔적을 지명에도 남기고 있었다. 조태삼 옹이 살던 팔면통의 마을은 1960년대 초에 화평촌(和平村)으로 지명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촌(紅衛村)'으로 개명했으며 그 후 다시 화평촌으로 옛 이름을 되살렸다. '홍위촌'은 '문화대혁명'의 추진력으로 된 학생조직 '홍위병(紅衛兵)'에서 파생된 지명이다. 참고로 그때 중학교 이하의 소년 대원은 홍소병(紅小兵)이라고 불렸다.

야유회때 기념사진을 남긴 화평촌사람들, 앞줄의 왼쪽 두번째 사람이 서재봉이다.

  이 '홍위병'처럼 화평촌도 중국에서 흔하게 불리는 지명이다. 화평촌은 전국적으로 무려 686개나 된다는 통계가 있다. 오히려 팔면통의 화평촌의 인구는 마을의 이 숫자만큼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비록 호적에는 1,760명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실은 200명 정도 살고 있다고 황정태(1957년 출생, 촌 당지부서기) 씨가 밝혔다.

  "한때는 2,520명이나 살고 있는 큰 마을이었는데요. 마을에는 촌민소조만 해도 11개나 되었지요."

  황정태 씨는 마치 옛날 옛 이야기를 하듯 긴 추억에 잠기고 있었다. 일행도 옛날 팔면통을 만들었던 그날의 원시림을 다시 읽을 것 같았다.

  1930년대 팔면통에는 아직도 조선인 마을이 추형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1945년 8.15 광복 후 서재봉 옹의 가족이 이사할 때도 팔면통에는 평안도 장씨네 가족 등 조선인이 10여 가구 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조선마을'은 홍길영 노인이 팔면통에 오던 1954년에 즈음하여 100여 가구의 큰 동네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 무렵 조태삼 옹은 '조선마을'의 호조조(互助組, 상호 지원조직) 조장으로 있었다. 호조조는 초급사(初級社), 고급사(高級社)와 더불어 중국에서 사회주의경제제도의 구축 과정에서 1951년부터 1958년까지 농민들이 거쳤던 3개 역사 단계의 하나이다. 최신버전의 사전에는 고급사 등 일부 어휘를 더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실종된 역사의 기억으로 되고 있다.

  한 인간의 경력은 더구나 역사의 실종된 기억으로 될지 모른다. 조태삼 옹은 옛날의 경력을 승인받지 못하는 것 같아 못내 서운하다고 말한다. "난 몇 십 년이나 생산대(촌민소조) 대장으로 있었어, 그런데 따로 아무런 혜택도 없는 거야."

  화평촌 제2소조는 조태삼 옹에게 대장 직무를 일임하다시피 했다.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 대장으로만 계속 있어달라는 사원(社員)들의 특별주문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농촌에는 공수(工値)를 기입하고 있었다. 공수는 작업량과 노동의 보수를 계산하는 임금점수이다. 그 시절 1공(수)은 인민폐 0.1원인 경우가 허다했다. 인력 1명의 1년 공수 3천여 공(수)에서 하나도 덜지 않더라도 겨우 3백여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2소조는 1공(수)이 3원이나 되었다. 연말 정산 때 현금을 1천여 원씩 받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2소조는 화평촌은 물론 부근 마을의 처녀들이 제일 시집오고 싶은 '노란 자위'로 거듭나고 있었다.

  "축산도 하고 석탄도 캐고 또 약재도 심었어. 그때는 마을의 소득이 아주 높았지."

  그렇다고 주업인 논농사를 도외시한 게 아니었다고 조태삼 옹이 거듭 말했다. 벼농사를 하도 잘해서 팔면통의 볍씨는 그의 생산대가 전문 제공했다는 것. 그 즈음 흑룡강성 560만무의 논에서 조선족 마을의 논은 160만무, 전부의 499개 조선족 마을은 이처럼 모두 '벼의 고향'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옛날의 옛 이야기로 되고 있었다. 2소조를 망라하여 화평촌에서 논농사를 하는 촌민은 인제 하나도 없다고 한다.

  1982년부터 중국에서는 일명 '도거리'라고 하는 가정연대책임제(家庭聯産承包制)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농촌에서 70%의 인력을 해방하였으며 농민의 생산 적극성을 동원했다. 사람마다 배가 불렀고 옷이 따뜻해졌으며 마을에 벽돌집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현성인 팔면통도 급성장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큰 건물이라고 하면 영화극장과 백화청사밖에 없었지만 급기야 빌딩과 아파트가 수풀처럼 일떠섰다.

  아이러니하게도 화평촌에 인적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황정태 씨는 촌에서 조직한 운동회는 1987년 그해가 마지막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거의 1년에 한 번씩 운동회를 열었는데요, 운동장 주위에는 사람들로 바자를 쳤습니다."

  팔면통에서 운동회를 조직할 때면 운동장 부근에는 더구나 인파가 북적이었다. 축구경기는 언제나 운동회의 인기 종목으로 부상했다. 현성의 마을인 화평촌과 부근의 큰 조선족 마을인 보흥촌(普興村)은 늘 결승전의 두 주인공으로 출마했다고 한다.

  뒤미처 조선족 마을에는 도시 진출이 시작되었고 외국 진출이 일어났다. 조태삼 옹의 큰 아들 조성구는 외국진출에서 단연 주인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마을에서 일찍이 러시아에 장사꾼으로 다녀온 사람이다. 그때 조성구는 루블화를 뭉치로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마을에 전한다.

  "큰 아들을 그 후에 더 보내지 말아야 했는데…" 조태삼 옹은 아픈 옛 기억을 들추다가 말고 뒷말을 흐린다.

조태삼 부부와 두 아들의 기념사진, 실종된 큰 아들 조성구는 뒷줄 오른쪽 사람이다.

  1990년대 초, 조성구는 기어이 일본으로 떠났다. 조성구처럼 돈벌이를 한다면서 마을에서 여럿이나 졸졸 뒤를 따라나섰다.

  "아들애가 세 살 때 집을 떠났으니… 올해로 꼬박 27년이 되는 거야."

  조성구는 더는 화평촌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동행한 마을 친구들도 더는 화평촌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도 편지 한 장 없었다. 마치 누군가 고무지우개로 빡빡 지운 듯 세상에서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화평촌의 '일본행 실종사건'은 미구에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한국에 던졌다. 그로부터 10년 후 한국 남해상에서 시체 25구가 버려진 사건이 일어난다. 그때 한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한 조선족들이 중국 어선에 승선해서 배를 옮겨나며 한국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어구 창고에 갇혀 숨었던 조선족 25명은 질식하여 차가운 주검으로 변했다. 살인사고를 은닉하기 위해 한국 '제7태창호'의 선원들은 시체를 모두 바다에 버렸다. 이 '선상 살인사건'은 많은 언론에 실리지 않았으며 이로 하여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졌다.

  화평촌의 '일본행 실종사건'도 벌써 많은 사람들의 추억에 실종되고 있었다. 조태삼 옹 자신도 그때의 실종사건을 아픈 추억에서 애써 지우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은 조태삼 옹의 옛 사진을 찾다가 큰아들의 사진을 만나면서 그의 가슴에 또 한 번 칼자국을 남겼다.

  사실상 마을에서 실종된 사람은 조태삼 옹의 큰아들과 그의 동행자뿐만 아닌 듯 했다. 현재 마을을 떠난 젊은이들은 거의 다 귀향의 가능성이 없다고 황정태 씨가 거듭 말하고 있었다. 마을에는 조태삼 옹이나 홍길영 노인처럼 나이가 많은 기성세대만 남아있다는 것.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은 화평촌 촌민센터의 놀이실에는 노인들만 웅기중기 모여앉아 마작을 하고 있었다.

  말이 농촌마을의 농부이지 다들 땅을 떠난 지 오랬다. 일명 '땅집'이라고 하는 단층집 생활도 올해 끝나게 되며 촌민들은 전부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다고 한다.\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을은 장차 없어지게 되겠죠."

  황정태 씨는 마을의 성공모델을 찾으려고 민속마을 등 여러 마을을 다녔다고 밝힌다. 아름다운 풍경의 멋진 집을 만나고 동네방네 소문난 마을의 축제를 구경할 수 있었지만 그 마을에 돌아오는 젊은이는 여전히 찾아보기 어려웠다.

  기실 팔면통 현성에서 화평촌의 옛 모습도 더는 읽기 어려운 그림이다. 시가지에 나타나는 것은 화려한 시멘트의 수림과 귀를 찢는 차의 소음뿐이었다. 초가의 굴뚝과 어린애가 뛰놀던 마당, 개구리가 울던 논은 더는 없었다. 팔면통의 옛날의 그 옛 마을은 인젠 옛날의 추억에만 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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