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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동네'의 천수포를 지키는 파수꾼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11.28일 10:31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노인이 시초에 살고 있던 곳은 워낙 천수포(泉水浦)가 아니었다. 천수포의 뒤쪽 골짜기에 있었는데, 곰취가 많이 자라는 더기라고 해서 곰취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더기의 이름 자체가 옛 부락의 지명이었다.

  예전에 두만강은 용정시(龍井市) 삼합진(三合鎭)을 흘러 지나면서 서쪽의 강기슭에 이렇듯 크고 작은 동네를 여기저기에 만들고 있었다.

  "우리 더기에는 열대여섯 가구 있었는데요. 모두 생활이 구차(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양기현(梁基鉉, 1933년 출생)은 어릴 때 곰취덕의 초막집에서 자랐다고 회억했다. 눈만 뜨면 산의 풀이요, 나무가 금세 강물처럼 시야를 꽉 채웠다. 더기의 산나물과 좁쌀, 강냉이는 사람들에게 곰취처럼 산골의 쓰디 쓴 입맛을 만들고 있었다.

삼합의 국경다리 오른쪽의 조선 회령 일경.

  훗날 부친이 일찍이 사망하면서 양기현의 집안은 졸지에 대들보가 무너졌다. 부친은 황해도 해주에서 살길을 찾아 허위허위 두만강을 건넜지만 결국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강 저쪽에서 아들 하나 데리고 왔고 강 이쪽에서 아들만 셋을 낳았으니, 인제 올망졸망한 잔입들만 늘린 것이다. 나중에 모친은 젖먹이의 양기현을 다른 집에 양아들로 보냈는데 형들이 울면서 대신 간다고 해서 다시 양기현을 데려왔다고 한다.

  모자가 골짜기를 벗어나서 벌의 천수포에 나오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동네의 누군가 집을 짓게 되었는데요, 일군들에게 밥을 지을 여인을 구했지요."

  모친은 양기현을 데리고 마을에 유숙하면서 남의 가마 목을 타고 앉았다. 그해 양기현은 세 살 나이를 잡고 있었다. 그가 아직 걸음마를 떼고 걸어 다니는 철부지였지만 천수포는 광서(光緖, 1875~1908) 말년에 생겨난 오랜 마을이었다. 말짱 생활이 풍족한 부자들만 모여 살고 있다고 해서 다들 '부자동네'라고 부르고 있었다.

  부자가 많았지만 실은 부자보다 샘물이 동네에 더 많은 듯 했다. 그 무렵 천수포는 아래쪽의 어디로 가나 땅위에 퐁퐁 솟아나는 샘물이었다고 한다. 미구에 천수포라는 마을 지명을 생성한 원인이었다.

천수포의 조선족 전통민가, 두만강 저쪽의 산을 오른쪽에 두고 있다.

  그렇다고 천수포가 첫 이름으로 불린 게 아니다. 중국이름으로 기록하면서 지은 이름이지 실은 다른 지명이 있었다고 한다.

  "샘물개(가)라고 했지요. 다들 천수포라고 하면 몰라도 샘물개(가)라고 하면 알았지요."

  양기현의 기억에 따르면 해방(8.15 광복)이 나던 그때 샘물가 아니, 천수포에는 24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후 부근의 동네에서 이주, 합병하면서 나중에 45가구의 200명이 사는 큰 동네로 급격히 늘어났다. 부근의 촌 소재지인 북흥(北興)은 역시 천수포와 비슷한 시기에 생긴 동네이지만 이때는 114가구, 460명의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흥성하라는 의미로 지은 북흥의 이름 때문일까… 사실상 북흥은 이 지명이 만들어졌던 1936년까지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방죽이라는 의미의 송언(松堰)으로 불렸다고 한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부근의 비전(菲田)은 순 우리말로 '빼박골'이라고 불리던 동네였다고 한다. 현지의 '지명지(地名志)' 해석에 따르면 '빼박골'은 무청(蕪菁)을 심던 밭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인 것 같다. 이름만 아니라 해석이 전혀 다른 동네도 있었다. 북흥촌에 합병된 동네 승지(勝地)는 '응달'의 방언으로 해가 적게 비추는 곳을 이르는데, 항간에서는 거개 중국글자의 이름으로 해석해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지명과 해석이 바뀌듯 부자의 신분도 변하고 있었다. 토지개혁이 진행되던 1947년 그때 '부자동네'에는 하늘과 땅이 뒤번지는 일장 변혁이 일어났다. 소작농과 땅, 고리대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지주와 부농의 성분을 구분하고 투쟁을 했으며 땅을 다시 나눴다. 천수포에는 '부자동네'라는 이름에 걸맞게 부농이 대여섯이나 배출되었다.

집마당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양기현 부부, 살창문과 마늘타래, 고추, 강아지가 정겹다.

생생하다고 말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문밖에 나서면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생겨났지요. 분명 온 가족이 야음을 타서 남몰래 강을 건너간 거였지요."

  마을에 남은 부농도 최종적으로 고향을 부득불 떠나야 했다. 극좌운동이 대륙을 휩쓸던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 부농을 망라한 지주, 반혁명, 나쁜 분자, 우파 등 '흑오류(黑五類)'는 계급노선의 정치판도에서 인민의 개념에 배척된 적의 범위에 속했다. 그들은 계급투쟁과 무산계급독재의 대상으로 되어 정치운동 때마다 정화(淨化)와 숙청의 명단에 제일 먼저 기입되었으며 많은 경우 호적을 편벽한 시골이나 유배지에 이전했다. 천수포의 부농은 연변 내지의 팔도(八道)에 강제 이주되었다.

  이에 앞서 1960년대 초 양기현은 천수포의 생산대(生産隊, 촌민소조) 대장(隊長, 조장)으로 되었다. 골짜기의 초막에 살던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 일약 벌 동네의 수장으로 된 것이다. 사실상 양기현에게 천지개벽의 변천은 그가 대장이 되던 즈음인 1961년이 아닐지 한다. 그가 예전에 부농이 살던 천수포의 팔간 기와집에 새 주인으로 입주했던 것이다.

  "그때 이 기와집은 빈집으로 되었는데요, 생산대에서 저에게 살 것을 권장했습니다."

  잠깐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워낙은 부농 한씨가 이 팔간 기와집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씨는 부농으로 청산된 그 무렵 근처의 두만강에 익사했고 딸과 사위가 한동안 팔간 기와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나중에 타지로 이주하는 그들에게 생산대가 돈 500원을 주고 팔간 기와집을 사들여 마을 식당으로 운영했다. 1957년, 중국공산당은 보편적으로 주관주의, 종파주의, 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정풍(整风)운동을 진행했다. 이때 청수포 생산대는 이런저런 원인으로 식당 운영을 포기하고 개인에게 식당 집을 팔게 되었던 것이다.

문자가 새겨있는 지붕 끝머리의 옛 기와.

  사실 1961년, 양기현은 고향을 뜨려고 작심하고 이미 전부터 살고 있던 가옥을 팔아버린 상태였다. 그 무렵 중국은 연속 3년 동안 일명 '3년 재해'라고 일컫는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농업과 공업 산출이 급감했고 국가재정에 거액의 적자가 생겼다. 공화국은 창건 후 제일 어려운 시기에 직면했으며 어디서나 극심한 생활난을 겪었다. 이 시기 중국에 살던 조선족들이 대량으로 강을 건너 월북하고 있었다. 양기현의 형 둘도 두만강을 건너갔으며 그 후 내처 강 저쪽에 거주했다. 양기현도 언제든지 그들처럼 지척의 남몰래 지척의 두만강을 건널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도 쌀 고생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때 저쪽은 우리 보다 훨씬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삼합 지역의 사람들은 고무신도 강 저쪽의 신을 가져다 신었고 화학비료도 강 저쪽의 생산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양기현의 말에 따르면 삼합은 또 1964년까지 전기도 강 저쪽에서 끌어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매불망 그리던 팔간 기와집이었지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양기현은 혹여나 마을을 떠나게 되지 않을지 해서 선금을 낸 2년 만에야 잔금을 몽땅 청산했다고 한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생활은 시든 꽃이 물을 만난 듯 다시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강 저쪽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강물처럼 빨리도 흘렀다. 어느덧 팔간 기와집은 사이섬처럼 동네의 표식으로 되었고 나아가 연변 조선족 전통민가의 상징물로 되었다. 2014년, '북흥촌 조선족전통민가'의 이름으로 길림성 중점문화재로 등록되며 용정시 정부에 의해 가옥 입구에 석비가 세워진다.

  정작 가옥의 정확한 건축연대는 10여 년 전 천씨 성의 연변 민속학자에 의해 밝혀졌다고 한다. 그때 천씨는 민가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이모저모 살피다가 귀퉁이의 검은 기와에 기록한 옛 글을 발견했다는 것.

마을을 떠난 촌민들의 향수가 구락부의 벽에 사진으로 걸려있다.

  주인인 양기현도 이때 비로소 가옥의 건축연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천선생이 기와에 적힌 경오년(庚午年)의 글자를 읽었지요. 알고 보니 저보다 나이를 세 살 더 먹은 집이었지요."

  천수포의 이주연대 등을 감안하면 이 경오년은 1930년 그 해를 이른다. 팔간 토목구조, 헐산식(歇山式)의 지붕, 살창문 등 팔간 기와집의 형태는 조선족 전통가옥의 귀중한 실물자료 가치를 가진다. 천수포의 이 민가는 세상에 알려진 후 민속학자나 사진가,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시골의 옛 모습이요, 명소로 되었다.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천수포의 팔간 기와집은 나중에 연변의 어느 관광 홍보물 책자에 사진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민가의 이름은 엉뚱하게 백룡촌(白龍村)의 '백년부락'으로 탈바꿈한다. 백룡촌은 두만강을 따라 천수포의 북쪽으로 수십㎞나 상거한 다른 마을이다. 백룡촌에도 조선족 전통가옥이 있으며 이 옛 민가를 이용하여 옛것을 모방한 건축물들이 일떠서는 등 '백년부락 조선족민속촌'을 형성하고 있다.

  솔직히 아쉬운 건 그뿐만 아니었다. 천수포의 팔간 기와집은 아직도 민속마을의 주축이 아닌 일개 명소일 따름이며 주인집의 민박 형식으로만 대중에 이용되고 있다. 오랑캐령을 넘어 삼합에 들리고 두만강 기슭의 국경관광에 나섰던 사람들은 오가는 길에 천수포의 팔간 기와집에 들려 사진을 남기고 민가의 안주인이 밥상에 올리는 손두부를 맛보며 살창문으로 흘러드는 햇빛을 보면서 잠깐잠깐 옛 향수를 달랠 뿐이다.

  그럴지라도 양기현은 인터뷰 내내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는 옛날의 부농보다 훨씬 더 잘 살아요. 그때의 천수포 부자들은 꿈도 꾸지 못할 생활을 누리고 있지요."

  2천년 초, 천수포에는 팔간 기와집을 흥정하는 외지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때의 양기현은 돈이 얼마든 절대로 집을 안 판다고 대답했다. 필경 팔간 기와집은 그의 인생의 축소판이었으며 또 무엇으로도 바꿀 없는 생활의 일부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와중에 마당에 있었던 고목은 양기현에게 날이 갈수록 더 큰 유감으로 자라고 있었다.

  "참, 마당의 옛 느릅나무를 그대로 남겼더라면… 그 나무는 우리 집의 살아있는 보물이 되는 건데요."

  예전에 마당 귀퉁이에는 언제부터 자란 나무인지 몰라도 오랜 느릅나무가 마치 팔간 기와집의 지킴이처럼 우뚝 서있었다. 마을에 고시할 일이 있으면 누군가 느릅나무에 올라 메가폰으로 소리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사나이의 허벅다리처럼 실한 나무가닥에는 그네가 걸려 있었다. 느릅나무의 언저리는 마을 처녀들의 그네를 즐기는 놀이터로 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양기현은 도끼를 들고 나가 느릅나무를 썩둑 잘라버렸다. "글쎄 처녀애들이 밭을 날마다 메주 밟듯 해서 아예 장마당을 만드는 겁니다."

  실제 뙈기밭을 아끼느라 찍어버린 건 이 고목뿐만 아닌 듯하다. 또 누군가 도끼로 이 고목을 찍어버리 듯 천수포 마을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문밖에 나서면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은 연이어 나타나고 있었다. 맨 먼저 젊은이들이 도시로, 한국으로 진출하였고 뒤미처 노인들이 자식을 따라 또 나이를 따라 하나 둘 마을에서 사라졌다. 현재로서는 마을에 남아있는 노인은 단 8명뿐이라고 한다. 정말이지 다들 누군가에 쫓기듯 마을을 떠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촌민들의 행사장소로의 구락부가 유명무실해졌고 이어 노인들의 행사장소로의 구락부가 유명무실해졌다.

  참고로 양기현은 천수포에서 30년을 촌민소조 조장으로 있었고 그 후 20년을 마을의 노인협회 회장으로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양기현은 옛 민가의 주인이었고 또 마을의 주인인 셈이다.

  어찌되었거나 그가 주인으로 있는 민가의 민박 역시 마을처럼 유명무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국경의 두만강에 때 아닌 살얼음이 끼면서 군인들의 국경단속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날 두만강 기슭의 팔간 기와집에 발을 들여놓은 외지인은 단 우리 일행 몇몇 뿐이었다.

  우리 일행이 차에 오르자 양기현은 노구의 몸으로 기어이 문밖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마당에 그린 듯 서있는 노인은 흡사 살아있는 한 그루의 고목을 방불케 했다. 하필이면 팔간 기와집을 지키고 있었다는 옛 느릅나무가 눈앞에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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