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identity)은 복수(複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야 하는 주체의 귀속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정체성의 분열은 커다란 심리적 고통을 동반하며 집단적인 폭력이나 성격의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들의 난동이나 재일조선인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의 경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정체성은 복잡한 개념이며 여러 가지 국면과 상황을 내포한다. 민족적, 국가적, 사회적, 가정적 정체성의 문제가 모두 야기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민족적 정체성은 가장 본질적이며 21세기 “문명의 충돌” 시대에서 약소민족이나 그 개체가 가장 심각히 고민하는 문제이다.
조선족공동체의 민족정체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론적 차원에서 언급한 분은 정판룡(1931-2001) 교수이다. 그는 조선족문화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고 하면서 조선족은 중국이라는 대가족에 시집을 온 며느리와 같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에 시집을 온 며느리이기에 친정집에서 익힌 문화도 갖고 있고 그와 동시에 시집에 와서 배운 문화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런즉 조선족은 위선 시집살이를 잘 해야 한다. 오로지 시집살이를 잘 해야 시부모나 남편의 신뢰를 얻어 친정집을 도울 수 있다. 만약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늘 친정집 생각만 한다면 시집의 의심을 받고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정판룡,「조선족문화의 성격문제」,『정판룡문집』(2), 연변인민출판사, 1997, 1-15쪽)
정판룡 교수의 “이중성격론”과 “며느리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융합론”을 내놓은 학자는 연변대학교 정치학부의 김강일 교수이다. 그는「변연문화의 문화적 기능과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적 우세」라는 논문에서 중국조선족문화는 “문화의 변연성(邊緣性)”을 갖고 있다는 관점을 내놓았다. 물론 이는 문화인류학에서 구미의 학자들이 이미 제기한 이론인데 김강일 교수가 그것을 중국조선족문화의 연구에 활용했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흩어 뿌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바빌론 포로”(기원전 597-538년 이스라엘의 유대 왕국 사람들이 세 차례에 걸쳐 신(新)바빌로니아인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간 사건. “바빌론 포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대 시련이었으나 약 반세기 동안에 포로들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바빌로니아의 문화에 접하여 구약성서의 근간이 되었던 헤브라이의 여러 문서의 집성을 보게 되었고 팔레스티나에서의 유대인 공동체 회복에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제13집, 동아출판사, 1983년, 166쪽 참조.)를 계기로 고국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 말은 민족적인 이산(離散)을 뜻하는 말로서 지난 20세기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경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용되었다. 디아스포라는 근대의 여러 가지 힘, 이를테면 정치권력, 경제력이나 군사력, 전쟁, 혁명 등이 낳은 “경계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국민국가라는 틀에서 쫓겨난 존재로서 경계(혹은 변두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 또는 민족들의 공동체이다.
중국의 조선족 역시 세계상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디아스포라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김관웅 교수는 이를 변연문화형태라고 표현했다. (김관웅,『사과배와 중국조선족―중국조선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管見』, 모이자 사이트: moyiza.net)
그의 론리에 따르면 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을 뜻한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며 중국공민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조선족은 과경(跨境) 민족, 또는 이민(移民) 민족으로서 혈통과 문화전통 면에서는 한반도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고 한반도의 민족과 동일한 민족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민족공동체로서 150년 남짓한 세월 속에서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적극 참여하면서 점차 중국문화를 몸에 익히게 되고 점차 중국의 소구민족의 하나로 되었다. 총체적으로 보아서 조선족은 정치, 경제생활의 측면에서는 기본상 중국화되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는 모국문화의 유전인자(遺傳因子)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조선족공동체는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사이에 있는 변연문화형태에 속한다.
이러한 변연문화형태는 아래와 같은 특성을 가진다.
첫째, 변연문화란 부동한 문화의 변두리에서 일정한 요소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계통은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으며 그로서의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는 유대인 공동체, 스위스의 독일인공동체, 캐나다 퀘벡의 프랑스인 후예들의 공동체 등에는 이런 문화계통이 존재한다. 변연문화구역은 자기의 특수한 문화적인 특질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과의 쌍개방(雙開放)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둘째,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多重文化構造)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 수 있기에 단일문화구조(單一文化構造)를 가진 문화계통에서는 갖출 수 없는 기능을 갖고 있다. 시스템론(系統論)의 시각에서 보면 변연문화란 새로운 문화계통을 의미하며 그것은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적 기능을 나타낼 수 있다.
셋째, 변연문화의 성격은 인류 문화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이다. 미래의 세계는 다양한 문화계통간의 부단한 교류로 인해 복합적인 성격을 보다 강하게 나타내게 된 다. 따라서 그 어느 문화계통이든지 모두 자기가 고유했던 전통적인 문화만을 고수할 수 없을 것이며 복합적인 문화계통으로 새로운 문화기능을 창출해야만 그 발전에 필수적인 문화적인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변연문화계통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그 존재의 합리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문화란 부단히 변해 가는 생활환경에 대한 인간들의 필연적인 반응이고 적응방식이기 때문이다.
변연문화체계로서의 조선족문화는 많은 자신의 장점(長點)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의 많은 단점(短點)도 갖고 있다. 양쪽에 문화에 발을 붙이고 있기에 늘 자신의 문화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며 방황을 하게 된다. 즉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문화는 도대체 어떤 문화여야 하는가? 어느 쪽 문화에 기울어져야 하는가? 이리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이러한 변연성은 아주 많은 가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왕좌왕한다.
1960년대에 일었던 “조선바람”에 조선족들은 근 10만 이상이나 조선으로 도망쳤다. 작년 연말에 발생했던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일부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국적포기청원은 모국문화로의 일변도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조선족민족교육 취소론자들은 중국문화로의 일변도의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중국은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의 유일한 삶의 터전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점은 한반도가 통일되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중국에 사는 이상 완전히 자기의 민족문화를 포기하여야 하는가? 역시 아니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우리 민족문화를 견지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계속 변연문화지역을 지켜야 하고 우리의 변연문화의 속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에도 유리하다.
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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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학교 교수.
Email: jhx53@hanmail.net
1953년 생.
저서:《재만조선인문학연구》
《문학비평방법론》
《문학과 인생의 진실을 찾아》
논문:《중국 조선족문학의 산맥―김학철》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