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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에 대한 거시적 조감/김관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4일 12:15
김 관 웅 (연변대학 교수)

1. 지식청년 상산하향의 명칭의 유래 및 그 원류(源流)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上山下鄕)은 지난 세기 50년대에 시작되였다. 1956년 1월 중공중앙 정치국에서 제기한 《1956년부터 1967년까지의 전국 농업발전 요강(초안) 》에서는 “도시의 중, 소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은 도시에서 승학하거나 취업한 사람들 이외에는 마땅히 나라의 호소에 적극 향응하여 농촌으로 산골로 내려가서 농업생산에 참가하고 사회주의건설의 위대한 사업에 참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바로 이 문건에서는 이미 도시의 지식청년들이 농업생산에 참가하는 것을 “상산하향(上山下鄕)”이라고 개괄하였는바 그 이후에는 이 명칭이 점차 이어져 내려와 도시 지식청년들이 농업생산에 참가하는 것을 지칭하는 습관 용어로 굳어지게 되었다.

중공중앙에서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산골로 내려가서 농업생산에 참가하라고 호소하게 된 데는 그 사회적인 배경이 있다. 그것은 주로는 당시의 중국의 공업화정도와 도시의 발전 그리고 종합대학, 전문대학 등 고등교육의 발전 속도로는 해마다 량산되는 소학교, 중학, 고중 졸생들은 취직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였다. 모택동은 1955년 9월 이런 실정을 감안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바 있다.

“모든 농촌으로 가서 일할 수 있는 지식인들은 마땅히 즐겁게 그곳에 가야할 것이다. 농촌은 광활한 천지로서 거기에는 할 일이 많다”1)

당시 중공중앙과 모택동의 근본적인 의도와 출발점은 도시의 남아도는 로동력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의 경제, 문화, 발전이 불균등한 상황을 개변시킴으로서 농촌과 변강에서 중국 국정에 부합되는 취업의 길을 모색하려 한 것이다. 당시의 도시지식청년 상산하향의 주요한 범위는 승학이나 취업을 못한 부분적인 도시의 중학생이나 소학생들과 자원적으로 농촌이나 변강에 내려가려한 지식청년들이였다. 그리하여 1955년부터 중국에는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이 시작되였다.

특히는 인재와 천재가 겹쳐 형성된 3년 대기근은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운동을 공식적인 의사일정에 올려놓게 하였다. 상술한 중국의 국정이 여전히 개변되지 않은 것 외에도 경제건설에서 불거져 나온 문제들은 해결하는 한 방편으로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이 권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취업문제의 해결, 대약진 및 인민공사화운동으로 잘 못된 국민경제를 조절하여 도시의 부담을 줄이려는 방편으로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이 권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중국에 나타난 지식청년들의 본보기들이 동가경(董加耕), 형연자(邢燕子), 류창은(劉昌銀) 같은 사람들이였다.

“문화대혁명” 이전의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운동은 당시 중국의 국정과 긴밀히 련결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가장 주요한 원인은 경제적인 원인이였음을 알 수 있다. 취업문제해결의 한 방편으로 도시 지식청년들의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을 호소하였지만 도시에서의 취업문제는 근본적인 해결을 가져오지 못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취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그 당시의 중국의 경제체제하에서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은 아주 중요한 취업문제해결의 방편이였기에 설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은 여전히 계속 추진되였을 것이다.

그런데 마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문화대혁명” 이전의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은 그 정책이 비교적 온당하여 강압적이거나 대규모의 정치운동의 형식을 빈 것이 아니라 자원원칙에 의해 진행되였다는 점이다.

2.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정치에 의해 왜곡된 사회운동

도시청년들의 취업문제 타결의 하나의 방편이였던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은 “문화대혁명”의 특수한 력사적 조건하에서 전례 없는 정치운동의 하나의 조성부분으로 되었다. 말하자면 중국의 국정과 경제체제 면에서의 문제가 계속 존재하는 이외에도 “문화대혁명”이 중국 전반 사회에 조성해 놓은 엄중한 혼란은 도시 지식청년상산하향을 10년 동안이나 지속된 거의 강압적인 전민적인 정치운동으로 외곡시켰던 것이다.

1)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은 중국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고 도시청년들의 취업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하나의 응급조치였다.

주지하다 시피 1966, 1967, 1968년 이 3년 동안은 10년 “문화대혁명”중에서 가장 혼란하던 시기였다. 이 대혼란시기에서 가장 파괴를 심하게 당한 것은 중학교와 대학들이였다. 그것은 중학교와 대학의 학생들은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는 모택동의 “최고지시”에 따라 전례 없는 홍위병운동을 벌려 중국의 기존질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홍위병을 리용하여 기대했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 모택동은 이제는 이런 혼란을 종말지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1967년 10월 11일에 중공중앙에서 《대학교, 중학교, 소학교에서 학업을 회복하면서 혁명을 할 데 대한 통지》를 발부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1968년에 들어서서도 중국의 모든 학교들은 여전히 동란 속에서 엉망이 된 그대로였다. 특히 “학업을 회복”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로 나선 것은 대학입시제도를 취소한 것이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중학교들에는 1966,1967,1968년 초중, 고중 졸업생들이 쌓여서 대학에 보낼래야 보낼 수 없고, 취직을 시킬래야 시킬 수 없었다. 초중, 고중에 눌러앉아 있는, 반란에 인이 박힌 수천만의 홍위병 - 졸업생들은 학교와 사회의 지극히 불안정한 요소였다.

중국에는 “토끼를 다 잡으니 사냥개를 삶는다(狡兎盡而走狗烹)”는 고사가 있다. 철없는 홍위병들을 풀어서 중국을 대란(大亂)시키는 목적에 도달했으니 더는 홍위병이 필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천만의 홍위병들은 오히려 자칫하다가는 자기까지 물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되었던 것이다. 토끼를 다 잡았으니 이번에는 사냥개들을 삶을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1968년 년 말 모택동은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것은 아주 필요하다”고 전국에 “최고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의 고조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전국 나가서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홍위병 운동”은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으로 삽시에 탈바꿈을 했던 것이다. 1968년 년말은 모택동의 림기응변의 용병술(用兵術)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이미 변형된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을 통해 우리는 “문화대혁명”이 전국에 조성한 대동란 중에서 국민경제가 급속하게 악화되고 세 기의 졸업생들이 학교에 쌓이고 쌓여서 “혁명”의 소동을 벌리다 보니 이네들은 자연히 도시에서 공밥을 먹는 잉여로동력으로 전화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1968년 년 말에 이르러서는 수천만의 중학교 졸업생들을 당금 취업을 시켜 사람마다 하나씩 밥그릇을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준엄한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극히 비정상적인 사회현상과 “문화대혁명”의 동란의 국면은 한데 뒤엉켜서 그 성질은 이미 단순한 로동취업이라는 범주를 멀리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중국 사회의 합병증”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사회적 동란을 더 한층 엄중하게 만들어 갔고, 그 국면을 돌려세우기 더 한층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초중, 고중에 지체하여 있는 수천만의 여러 기에 걸치는 졸업생들을 치우는 것은 이런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그것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정상적인 도경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골칫거리 문제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은 당시 성행했던 정치 “운동”의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직접적 원인이며, 따라서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운동이 이왕의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과 근본적으로 다른 구별점이다.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전환시켜 놓으려면 반드시 그에 걸맞는 리론으로 포장하여야만 하였다. 그래야만 전국인민들과 수천만의 홍위병-졸업생들을 설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무산계급독재하에서의 계속혁명”의 리론의 지도하에서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운동을 청년들을 개조하고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정치운동으로 탈바꿈시켜놓았으며, 수천만의 홍위병들은 문화혁명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자 주체로부터 일조일석에 “피개조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그러나 중국 로크음악의 왕자 최건(崔健)의〈한 쪼각의 붉은 천(一塊紅布)〉에 두 눈이 가려진 수천만의 홍위병들은 마치도 눈먼 당나귀가 차몰이군이 채찍질 하는 대로 달구지를 끌고 고분고분 걸어가듯이 처음에는 모두 행복하게 농촌으로 달려 나갔다.

바로 이런 사회정치적인 콘텍스트 속에서 1968년 년말부터 1970년 년초까지의 2년 남짓한 동안에 중국에서는 아무런 반발도 받지 않고 400만 명의 도시의 “로싼제(老三屆)”, 즉 중국홍위병들의 원조들인 1966,1967,1968년 초중, 고중 졸업생들이 농촌으로 변강으로 내려갔는데, 그 규모가 크고 인수가 많은 면에서는 력사상에서 전무후무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은 1968년부터 1979까지 10년 동안 지속되였고 그 총 인수는 8, 000만명을 초월하였다.

3.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이 중국 력사에 끼친 심원한 영향 및 그 불행한 후과

처참하게 실패한 정치운동으로서의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 중국 력사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고 수천만의 지식청년들에게 불행한 운명을 운명을 안겨주었다. “로싼제(老三屆)”를 비롯한 10년에 걸친 중국의 지식청년세대들은 “문화대혁명”과 그 연장선에서 생겨난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의 비참한 희생양들이다.

1)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은 중국력사에서 “인재의 단층”을 형성하였다.

유관부문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문화대혁명”중에서 중국에서는 100만 이상의 대학졸업생과 200만 이상의 중등전업졸업생들을 적게 양성함으로써 인재의 결핍을 초래했다. 그리고 수천만의 소학, 중학, 고중, 대학 재학생들의 학업을 전페시킴으로써 전반 한 세대의 교육을 망쳐놓았다.

1968년부터 1978년까지 10년 동안, 중국의 상산하향지식청년 도합 1,623만 명에 달했다. 몇 해 지난 후에 일부 지식청년들은 각급 학교에 진학하는 기회를 잡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그런 기회와는 인연이 닿지 않아서 초중이나 초중정도도 못되는 문화정도밖에는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인재의 싹들이 돋아나보지도 못하고 땅속에 묻혀서 썩어버리고 말았다.

2)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은 농촌경제를 비롯한 전반 국가경제의 발전을 엄중하게 저애했다.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이 벌어졌던 10년 동안 중국에서는 100억 원에 달하는 돈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재정지출은 아무런 경제적 효과도 없이 무위(無爲)로 끝났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2천만에 달하는 지식청년들과 그 부모들은 수많은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되였다. 특히 1979년 760만 명 이상의 지식청년들이 한꺼번에 도시에 밀려들면서 건국 후 가장 어려운 취업 고봉기를 만들어냈고 따라서 파탄이 되였던 국민경제의 회복과 재생에 수많은 애로사항을 만들어냈다. 다른 사람들의 실례는 그만두고서라도 필자의 8남매 중 5명은 이 10년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의 참여자들이며 동시에 피해자들이다. 부친의 70원의 월급으로 10명의 가정생활을 유지하던 우리 가정에서 한꺼번에 3명의 자식을 농촌에 보내고 이어서 또 2명의 자식을 농촌에 내보내면서 이 다섯 자식의 모든 옷과 왕복교통비를 부담하면서 우리 부모님들의 부담은 전보다 훨씬 가중해졌다.

3)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은 사상, 문화, 개인생활 등 여러 면에서 지식청년들에게 많은 불행을 안겨주었다.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은 수천만의 청년학생들의 정규적 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하여 그들을 문화나 학식 면에서 부족한 절름발이 세대로 만들어 놓았다. 철 같은 문화교육과 문화소양의 제고를 떠나서 고립적으로 세계관 개조를 론하고 “빈하중농의 재교육 받게 하는”것은 청년들의 전면적이고 건강한 성장에 불리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더욱이 고학기술이 일사천리로 발전하고 지식과 정보과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이 지식경제시대에 “빈하중농의 재교육 받게 하는”것은 인간을 퇴화시키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지식청년들을 농촌을 떠나서 도시에 되돌아온 후에는 흔히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로 변했다. 모든 것을 모두 새롭게 배우고 새롭게 시작해야 했지만 이미 나이가 들어서 일사천리로 발전하는 시대의 조류를 따를 수가 없어서 시대의 락오자가 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는 적지 않은 도시로 돌아온 “지식청년”들로 하여금 너무 일찍 삶의 열정을 잃게 하였고 사회적인 책임감을 잃게 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이런 지식청년들 중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공산당의 령도와 사회주의에 길에 대해 불신임하게 되였으며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이 만연되여 중국 사회에는 “신앙위기”가 발생하게 되였던 것이다. 중국 사회에 의해 여러 번 사기를 당한 광범한 지식청년들의 보편적인 사회심리를 대변한 것이 바로 이런 “신앙위기”였는데 이는 “문화대혁명”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의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과 밀접한 련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문화대혁명”중의 10년 동안 지속된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은 그 내용이나 형식을 막론하고 모두 짙은 오유적인 정치운동의 특점을 갖고 있으며 철저히 실패한 운동이였다.

4.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이 광범한 지식청년들에게 가져다준 긍정적인 영향



변증법은 우리들에게 모든 사물은 정반대의 두 가지 량극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은 언제나 동전의 두 면처럼 공존하는 법이다. 철저하게 실패한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도 마찬가지다. 비록 부정적인 점들은 이루다 언급할 수 없기는 하지만 긍정적 요소도 개재해있음을 간과해서는 절대 안 된다.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이 광범한 지식청년들에게 가져다준 긍정적인 영향을 아래와 같은 몇 가지로 귀납할 수 있다.

1) 중국 도시의 광범한 청년들이 일찍 철들게 했다.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은 수천만의 청년학생들로 하여금 앞당겨 사회생활에 뛰여들게 하여 수많은 도시청년들로 하여금 인생의 달고 쓴 맛을 일찍 맛보게 했고 간고한 농사일을 하면서 심신을 단련할 수 있게 했고 농사일을 배울 수 있게 했다. 그들은 학교가 아니라 환골탈태의 “재교육”을 받는 광활한 전야에서 적지 않은 사회지식을 배웠으며 강인한 의지와 성격을 단련하였고 스스로 살아가는 자립정신과 삶의 요령을 배웠다.

2) 중국 도시의 광범한 청년들이 농민들을 알게 했다.

중국의 국정을 료해하는 데 있어서 중국의 농촌과 인구가 제일 많은 하나의 사회계급 - 농민을 알 수 있게 한 것은 아주 중요한 수확이였다. 농촌과 인 변강의 전원과 대자연속에서 점차 농민들의 근로하고 순박하고 전통적인 미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광범한 도시 청년들은 부동한 인간과 공존하는 삶의 지혜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의지력 같은 것을 함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사회의 맨 밑바닥인 농촌과 변강에서 생활해본 경력이 있기에 중국의 국정에 대해서도 아주 깊은 체험을 갖고 있다.

3) 간거한 시련은 책임감과 리상이 있는 청년으로 성장하게 했다.

비록 지식청년들 중의 일부 사람들이 간거한 로동의 시련과 열악한 농촌과 변강의 환경 속에서 타락하고 기로에 빠져들기도 하였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극좌로선의 피해자들이라고 하여 당과 국가에 대해 원망을 하지 않았으며 어린사절에 동경했던 원대한 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독특한 사유방식, 행위방식, 정감방식은 “로싼제”를 비롯한 광범한 지식청년들의 성격특징이다.

인간의 심리구조에서 지력지수-IQ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이 정감지수 - EQ이다. “문화대혁명”중의 10년 동안 지속된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에서 수천만의 중국 도시청년들은 지력지수-IQ는 크게 성장하지 못했지만 정감지수 - EQ는 크게 성장했다.

농촌이나 변강으로 간 “로싼제”를 비롯한 지식청년들 속에는 뉴톤이나 큐리부인 의 숭배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창 배울 나이에 수학, 물리, 화학을 배우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자신의 지식준비정도와 시기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문학, 정치학, 관리학 등 학과 령역에로 진군하였다. 하여 “로싼제”를 비롯한 지식청년들 속에서 중국에서는 수많은 문학가, 정치가, 기업가들이 나타났는데, 특히 문학 면에서 성취가 돌출하다. 그 단적인 사례로 복단대학 문학전업 77년급 71명의 학생들 중에서 43명이나 “로싼제”였으며 이들 중 32명이 문학작품을 발표한적 있었다. 이중에서 로신화의 단편소설 《상흔(傷痕)》은 중국 새시기 문학에서의 처음으로 등장한 “상흔문학”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었으며 “상흔문학” 이라는 이 문학사조의 이름도 로신화의 단편소설 《상흔(傷痕)》에서 따온 것이다. 어디 로신화뿐인가. 량효성(梁曉聲), 장승지(張承志), 왕안억(王安億), 장항항(張抗抗), 진건공(陳健功), 한소공(韓少功)…… 이러한 지식청년출신의 중국 작가들에 의해 “지식청년문학”이라는 하나의 제재령역이 생겨났고 끝내 장려한 문학의 꽃이 활짝 피여 났다. 그들은 세속의 편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피가 흐르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지식청년시절의 간거한 생활과 그 속에서의 희노애락을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량효성의 소설을 각색한 《오늘 밤에 폭설이 내린다》와 같은 텔레비죤 드라마는 사회 각계의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 마무리는 말



중국 고대의 철인(哲人) 로자는 “복속에 화가 숨어있고 화속에 복이 숨어 있다”고 설파한 적 있다. 이런 인생의 변증법을 우화로 표현한 것이 중국 고대의《새옹지마(塞翁之馬)》이다. 그 영향을 받아서 조선민족의 속담 중에도 “세상만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생겨났다.

로씨야의 민주주의자이며 저명한 문학비평가 벨린스키는 “비극은 하나의 가장 훌륭한 대학”이라고 지적했었고, 같은 맥락에서 로씨야의 무산계급 작가 고리끼도 자기가 사회생활 속에서 갖은 수모와 고생을 다 겪으면서 살아온 드넓은 로씨야 사회를 “나의 대학”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우리 광범한 당년의 지식청년들은 “문화대혁명”중의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을 담론하면서 그 비극적 성질을 긍정하는 전제하에서 그것은 청년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귀중한 인생단련이라고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초년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을 승인한다고 하여 결코 그 비극적 성질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중구조를 갖고 있는 인간의 회고(回顧) 심리를 로씨야의 대시인 뿌쉬낀은 다음과 같이 읊조린 바 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서러워 말아, 노여워 말아.

울적한 날은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돌아오리니

마음은 항상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니-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일은 그리운 법.



중국의 수천만의 지식청년들은 농촌이라는 이 광활한 대학에서 인생을 배우고 의지를 련마하면서 살아왔다. 바로 이런 까닭에 수많은 당년의 지식청년들은 40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오늘날에도 그 지나간 지식청년시절을 그리운 마음으로 절절하게 회억하고 있는 것이다.

《산 너머에 묻은 우리의 청춘》- 이 책에 수록된 많은 글들은 부동한 시점과 각도에서 바로 이러한 절절한 회억을 담아낸 글들인 것이다.

2008년 8월 2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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