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마디 국제부 기자
얼마 전 중국 베이징(北京)의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지인과 통화하다가 "회사에서 온종일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달 26일 처음 방영된 KBS 개그콘서트의 새 코너 '황해' 때문이다. '황해'는 보이스피싱(전화 금융 사기)을 시도하는 조선족을 개그 소재로 삼았다. 이 코너는 무작위로 전화를 돌려 은행원과 병원 직원을 사칭해보지만 특유의 말투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는 조선족의 모습을 희화화(戱畫化)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이 프로를 보는 사람이 꽤 많은 모양이다. 지인은 "방송 다음 날이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조선족 직원들이 격분해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 된다"고 했다. 해당 코너가 마치 조선족 전체를 싸잡아 욕하는 것 같아 다들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황해'가 방송 2주 만에 코너별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한국인들에게 웃음을 주고 인기몰이를 하는 동안 중국의 조선족은 모욕감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조선족과 어울려 사는 한국의 일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조선족이 함께 일하는 회사에서 '개그콘서트'와 '황해'는 금기어가 됐고, 집에 가사 도우미가 있을 땐 텔레비전을 켜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다. 조선족 인터넷 커뮤니티 '모이자'에선 집단으로 항의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중국에 등록된 조선족 인구는 183만명이다. 우리 정부가 중국 교포에게 취업 문을 계속 늘리면서 한국에는 작년 연말 기준으로 47만명이 산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조선족과 어울려 사는 셈이다. 그런데도 조선족이 어떤 사건을 저지르면 조선족 전체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다. 예컨대 지난해 4월 경기도 수원에서 20대 여성을 납치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오원춘 사건'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까지 더해져 우리가 조선족에 보내는 시선은 싸늘하다 못해 이들을 우스개로 만드는 데까지 가버렸다.
이들이라고 애환이 없을까. '코리안 드림'을 좇아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가사 노동을 하고, 건설 현장에 나가거나 한국의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농촌의 논밭을 일구면서 느끼는 설움 말이다. 서울 구로구와 경기도 수원 인근의 밀집한 셋방에서 너덧 명이 같이 살면서 악착같이 번 돈을 연변에 있는 자녀에게 부치다 보면 눈물 나는 날도 많았을 것이다. 한국에 있건 중국에 있건 이들도 쉬는 날이면 한국의 드라마와 코미디 프로그램을 본다. 지난달 26일 '황해'를 시청한 한 조선족은 "니 한국말만 똑바로 하면 떼돈 벌 수 있다'는 대사를 듣고 그동안의 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고 했다.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조선족은 을(乙)이다. 중국에서는 한족(漢族)에게 치이고, 한국에 오면 '한족(韓族)'에게 부대낀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국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부 조선족이 저지른 사건 사고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불특정 다수를 노린 보이스피싱은 당연히 뿌리 뽑아야 할 범죄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족 전체를 폄훼할 일은 아니다. '코미디는 코미디일 뿐'이라는 변명 말고 다른 수준의 답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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