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돈도 별로 없는 주제에 나는 사람들한테 돈을 꽤 잘 빌려주는 편이다. 희한한 건 속된 말로 내가 개털이라는 사실을 빤히 아는 사람들도 돈 빌려달라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한다는 거다. 적게는 몇십만원부터 많게는 몇백만원까지 상대방 계좌로 송금하면서 매 번 '다음부터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굳은 다짐을 한다.
친한 사람은 친한 대로, 또 안 친한 사람은 안 친한 대로 '오죽 급박했으면 나한테까지 연락을 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이르면 마음은 이내 물에 젖은 습자지가 되어 버린다.
친한 사람한테 돈을 빌려줄 때는 떼여도 좋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한다. 평소 자주 보던 사람도 돈을 빌려주고 나면 왠지 소원해졌다. 안부전화 한 통하려 해도 혹시 내가 빚 독촉이나 하려고 연락한 듯한 인상을 주지 않을까 싶어 주저하게 된다. 금전적인 손해는 둘째 치더라도 친한 사람한테 돈 빌려주고 괜히 이래저래 마음 졸여야 하는 걸 생각한다면 아예 초장에 거절 하는 게 상책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조금 얄밉고 매몰차 보여도 거절의 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직장생활 5년차 김 대리는 자신과의 대화에 서투른 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김 대리 회사는 매년 해외에서 열리는 굵직한 박람회에 직원들을 참관시키는 제도가 있다. 통상 입사 연차 순으로 보내는 게 관례였다. 김 대리 위로 아직 순서가 안 된 선배가 있어서 이번 시즌 홍콩 박람회는 아예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담당 팀장은 선배 대신 김 대리를 추천 명단에 올리겠다고 넌지시 알려왔다. 김 대리는 내심 기뻤으나 이내 선배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좀 아깝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저 선배가 그렇지 않아도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데 이번 일로 괜히 더 불편한 상황을 만들 필요가 없잖아. 아마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올거야.'
김대리는 고민 끝에 다음을 기약했다. 그러나 다음은 오지 않았다. 김 대리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상황이 호응해주지 않았다. 박람회 현장에서 신규 거래처를 뚫어야 하는 미션을 수행하기에는 김 대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게 회사의 판단이었다. 대신 현지 유학 경험이 있는 1년 후배가 적임자로 발탁되어 뉴욕으로 날아갔다.
자신의 만족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것처럼 허망한 일은 없다.
“아니 세상에 내 마음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자만이다.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정말이지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데’ 아무 관심도 두지 않고 그냥 방치해 둔 상태에서 저절로 자기 마음의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란 불가능하다.
살다 보면 싫어도 좋은 척해야 하고 좋아도 행여 속 보일까 민망해 적당히 싫은 척 내숭을 떨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일부러 마음과는 180도 다른 행동을 해야 할 때도 분명 있다. 그러나 정말로 똑똑하고 자기를 아낀다면 진정 내가 원하고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행동해야 한다.
/김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