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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족, 사회에 효도하는 기업가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4.02.05일 10:47
인물이름 : 리성일

특별기획- 감동조선족걸출인물 (1)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65)

광주모드모아그룹 리성일회장

리성일(李成日) 프로필:

1956년 길림성 왕청현 하마탕향 출생

1972년 길림성 송원시 전고르로스3중 졸업, 선풍촌에서 농사일, 유전일 등 종사

1975년 길림성 영길현 이도소학교 교사

1977년 길림성 교하탄광학교(현재 장춘공업대학에 편입) 입학

1980년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사

1982년 선후로 길림시사법국 예심과, 장춘시공안국 경찰로 근무

1986년 광동성당위 3국 7처 4과 부과장

1989년 광주세계무역추진회 상무대표

1992년 사직, 광주모드모아 침상용품회사 설립, 광주모드모아그룹 회장

전국정협 제10기 위원, 제11기 전문위원, 중화민족단결진보협회 부회장

1999년, 2005년 국무원 《전국민족단결모범상》 2차 수상

1999년 공화국창건 50주년 수도기념행사 천안문관례대에 오름

동북사범대학, 무한과학기술대학, 장춘공업대학 객원교수

모드모아그룹의 성장륜곽

1996년 모드모아장춘공업무역유한회사 설립

1998년 광주시번우신태양실업유한회사 설립

1999년 광주번우모드모아카펫유한회사 설립, 《납세대호》칭호와 《번우구경제발전선진기업》 영예칭호

2000년 광주번우모드모아기계제조유한회사 설립

2001년 ISO9001국제품질관리체계인증 취득

2002년 번우모드모아공업원 준공(11만평방메터)

2003년 경제발전특별기여상

2005년 광주100강민영기업칭호

2006년 광동성성실신용시범기업칭호

2007년 광서 오주 만수구에 4억여원 투자, 부지 18만평방메터 모드모아생산기지 건립

2008년 오주시모드모아생물과학기술(중미한합작)유한회사 설립(등록자금 1000만원)

2009년 오주향강모드모아생태원 투자건설

2010년 연길시 의란진 춘흥촌에 3억원 투자, 연길모드모아스키장 건설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수상자인 광주 모드모아그릅 리성일회장./김파기자

《파란만장한 인생려정에서 성공의 신화를 엮은 리성일은 꿈과 야망을 지닌 젊은이들한테 귀감이 될만한 인물이다. 리성일은 신고스레 얻은 재부를 기꺼이 사회에 환원해오면서 그 과정을 즐겨왔다. 기업인으로서 사회적책임을 잊지 않는 리성일이 참으로 대견하다.》이는 전임 전국정협 부주석인 조남기상장이 리성일의 성공사를 다룬 《꿈의 마라토너(차순복 저)》에 한 추천사중 한구절이다.

보통 공무원으로부터 파란만장한 인생려정으로 자산총액과 년간생산액이 3억원을 돌파한 그릅을 일떠세우고 3천만원이상을 사회에 기부하며 명실상부한 《기부왕》이라 불리우는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수상자인 광주 모드모아그릅 리성일회장을 만났다.

기자가 수상소감을 묻자 리회장은 《나는 명예를 탐내거나 재부을 탐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다. 상을 받고보니 어깨가 더욱 무거워난다. 앞으로 나라와 민족, 고향과 조선족사회발전을 위해 더욱 잘 봉사하라는 고무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조선족독자들에게 남길 새해 덕담을 주문하자 그는 <<우리 민족 고유의 미풍량속인 어르신을 존경하고 사회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항상 긍적적이고 희망적이고 락관적이고 꾸준히 노력하는 삶으로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한 중국56개 민족중의 우수한 일원으로 거듭나자>>고 희망하면서 《효도와 책임심은 우리 민족의 자랑, 이 자랑을 모두 함께 더욱 빛냅시다》라는 싸인을 남겼다.

2012년 9월 8일, 모교인 장춘공업대학에 100만원 수표를 건네는 리성일회장./유경봉기자

《기부왕》으로 불리게 된 사연

리성일을 처음 접하기는 2012년 9월 8일, 장춘공업대학에서 있은 그의 《인재성장과 창업-나의 〈꿈의 마라토너(峥嵘岁月)〉보고회》에 취재를 가면서였다. 당일, 그는 졸업한지 32년만에 찾은, 설립 60주년을 맞는 모교 장춘공업대학에 《우수교사장려기금》으로 쓰라며 10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하지만 이 100만원은 리성일의 선행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리성일의 두번째 고향인 전고르로스에서는 14년전, 중학교때 모교에 10만원을 기부하면서 시작한 모교에 대한 그의 기부금이 1000만원에 도달하여 그의 선행은 당지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1998년 출장길에 모교인 송원시 전고르로스현3중에 들렸던 그는 학교건물의 초라한 모습에 가슴아픈 나머지 당장에서 10만원을 교장의 손에 쥐여주며 《교원장려기금》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기업은 갓 기틀이 잡히고 확대발전의 관건시기라 10만원은 적은 액수가 아니였다.

이듬해에는 교원절에 자기 회사에서 생산하는 침상용품이며 카텐들을 싣고와 선생님들께 선물로 드리고 150여명의 재직교원들과 그제날 자신을 가르쳤던 퇴직교원들까지 모두 당지의 제일 호화로운 식당에 모셔 교원절경축연회를 베풀어드렸다. 처음으로 이처럼 성대한 교원절을 쇠며 그제날의 학생이 올리는 조선족 큰절을 받으며 선생님들은 감동의 눈물을 머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교수조건을 개선하라며 100만원, 교원장려기금으로 10만원을 더 내놓았다. 이듬해 리성일과 전고르로스현정부가 함께 투자하여 세운 5층짜리 다기능교수청사인 《성일교수청사》가 땅을 차고 일어섰고 리성일은 모교의 도약적인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였다.

2009년 9월, 리성일은 자기의 모교에 찾아가 800만원의 현금과 150대의 노트북컴퓨터를 기증했다. 이번까지 그는 학교에 합계 1000만원을 기부하고있다.

모교에 보낸 천만원에 달하는 경제적인 후원, 이속에 내재된것은 바로 학생이 모교에 대한 보답이고 은사에 대한 보답이며 사회에 대한 한 기업인의 책임이고 교육에 대한 지지와 사랑인것이다.

당시 기증식에서 리성일은 어린 후배학생들에게 《효도, 존경, 책임》이란 세 단어를 정중히 선물했다. 즉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기를 가르쳐준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회에 대한 자기의 책임감을 키워가자》이다. 그는 자신의 실제행동으로 가장 설복력있는 한차례 생동한 인성교육 수업을 전수한것이다.

리성일의 교육사랑은 모교에 대한 후원에만 그친것이 아니다.

2002년 여름, 기업의 확장 이전을 목적으로 리성일씨는 당시 광주시 번우현 금산촌이라는 곳에서 150무의 땅을 사기로 계약을 맺고 계약금 150만원을 지불했다. 그런데 후에 보니 농업용토지여서 건물허가를 받을수 없었다. 금산촌에서는 미안해하며 계약금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리성일회장은 그 돈을 받지 않고 촌의 낡은 교사를 다시 지으라며 되밀어주었다.

이외에도 회사의 한 고급 관리일군의 고향학교에 40만원을 기부해 새 학교를 짓도록 한 일, 중국민족발전기금회에 800만원을 기부한 일, 지금까지 10여년간 가정환경이 어려운 우수한 소수민족 대학생을 대상으로 년간 200명, 인당 2000원씩 장학금을 지불해온 일, 모교인 장춘공업대학의 특곤학생 2명을 후원해 대학공부를 마치게 하고 모드모아에 직장까지 배치해준 일......모드모아는 또 무한방직대학, 장춘경공업대학의 실습기지로 제공되고있다.

교육사랑은 또 민족사랑, 문화사랑, 사회사랑과 책임으로 번져간다. 다년간 민족 문화, 교육, 출판 등 부문에 기부한 자금만도 무려 1000여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수상소감을 발표하고있는 리성일회장./김성걸기자

2만딸러로 시작해 아세아의 카펫왕 되다

1956년에 왕청현 하마탕향에서 태여나 두살때 송원시 전고르로스몽골족자치현 선풍조선족촌으로 이사해 성장한 리성일은 고중을 마치고 농사일, 유전일, 시골학교의 교원 등을 하다가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7년에 대학입시를 맞아 길림성 교하석탄학교에 입학, 졸업후 10여년간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사, 길림시사법국과 장춘시공안국 경찰, 중공광동성위의 부과장직 공무원, 광주세계무역추진회 상무대표 등 직을 전전하면서 끊임없이 하나하나의 새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쟁취하기를 반복하면서 열심히 뛰여왔다.

일찍 광주세계무역추진회 상무대표로 있을때 몸으로 경제를 익히면서 창업을 시도해보았었다. 허나 다 실패였다. 부산주점의 실패, 자전거경음기생산 실패, 3만무땅 깨잎재배 실패. 3년간에 3차의 실패, 그것마저 하나하나 더 혹독한, 그를 죽음까지 생각케 한 실패였다. 그러나 그는 그 실패를 동력으로 밟고 일어섰다.

1992년 공직을 사직하는것으로 뒤길까지 끊고 자금 2만딸라를 밑천으로 광주모드모아침상용품회사를 설립하는것으로 백프로 창업에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리성일의 몸에서 《실패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정신, 실패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 책임감, 거짓없는 솔직함과 대단한 배짱》의 귀중함을 보아낸 한국 마론핸즈 모드모아의 조웅기회장은 단 세번째의 만남에서 《꼭 갚는다는 장담은 못하겠다》는 리성일로부터 뜬금없는 창업자금지원을 청구받고 선뜻 2만딸라를 내놓았다.

리성일은 이 2만딸라로 광주시 교외에 광주모드모아침상용품공장을 앉히고 《핑크하트》표 침상용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알뜰한 공장경영으로 제품은 인차 전국방직제품박람회에서 1등의 월계관을 따냈고 잇달아 전국 침상용품 시장에서도 한자리를 찾게 되였다.

모드모아는 이미 국내는 물론 국제방직업계에서 알아주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기업의 주요제품인 카펫은 국제시장에서 유명한 브랜드제품으로 되였고 모드모아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카펫왕, 아세아의 카펫왕으로 되었다.

상승장군의 비결은 한발 앞선 판단과 철같은 신용

기업경영에서 리성일의 앞서가는 예리한 안광과 정확한 판단은 호황에서 불황을 내다보고 기회를 포착하고 대담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선택을 하는것으로 나타난다.

침상용품시장이 포화상태에 접근했음을 보아내고 판매호황에서 스톱, 미끄럼방지매트와 카펫 생산으로 이전하고 로동밀집형산업이 광동성에서 밀려나갈것임을 예리하게 판단하고 정부의 결정이 나오기 2년전에 벌서 광서 오주시에로 공장을 이전하기로 결정한것 등은 생동한 실례이다.

이외에도 발빠른 움직임으로 반년만 불어친 스쿠터(滑板)열 시장에서 유일하게 1400만원을 벌어 새 공장부지 자금을 마련했고 밑지는 장사로 새 기술 숙련공을 키웠다가 새 제품시장에서 또 한몫 톡톡히 챙기는 등등 그의 예견성 있는 결단은 회사의 성장에 급시우였다.

리성일은 《조사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진정으로 신용을 지키는 사람은 30만명중 1명꼴이라고 하지만 그 어떤 일을 하든 성공하려면 신용을 지켜야 한다》며 신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8년의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인해 모드모아의 첫 국외고객이며 오랜 거래처인 한 일본인 사장이 자금위기에 처하자 리성일은 선뜻 3개 컨테이너의 양탄자를 먼저 내주었다. 그 일본인 사장은 몇달후 16명의 사장팀을 무어 광주에 찾아와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리성일에게 머리숙여 인사하며 새로운 거래처들을 주선해주었다.

통계에 따르면 개혁개방이래 중국에서 창업한후 10년이상을 버텨낸 민영기업은 30만분의 1밖에 안되고 20년이상을 버텨낸 민영기업은 100만분의 1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만큼 민영기업의 생존과 발전이 어렵다는 얘기다.

22년간 리성일의 모드모아그룹은 승승장구로 달려와 현재는 2000여명의 종업원에 카펫, 매트 시리즈의 8가지 제품에 천여가지 디자인을 자랑하면서 세계 근 40개 나라와 지역에 수출하고 국내외에 1300여개 판매대리점을 가진 판매망을 형성하였으며 카펫생산을 위주로 호텔, 리조트, 호텔식아빠트, 체육공원 등 다종기능을 가진 생태형 국제성관광체육리조트인 모드모아생태원, 모드모아생물과학기술유한회사의 설립 및 또 하나의 브랜드제품인 《치타》의 탄생 등등 새로운것으로 부단히 기업을 확대하고 발전, 장대시켰으며 리성일은 《아시아의 카펫왕》으로 불리운다.

조선족기업인들이 타민족 기업인들에게서 배워야 할점에 대해 리성일회장은 자신이 중국내지에서 생활하고 창업과정에서 실제 겪은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한족기업인들은 성실과 신용이 무척 강하다. 사업에서는 더 말할나위가 없고 술상에서 취중에 한 약속도 어김없이 지켜나간다. 기업인들에게 있어서 성실과 신용은 생명처럼 소중하다. 한 사업가가 창업중 성실과 신용을 잃었다면 그 순간부터 사업은 파산에 이른거나 다름이 없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원인은 조선족기업인들이 타민족기업인들에게 뒤지지 않는 더 탁월한 기업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바램에서 출발한것이다》고 언급한다.

리회장은 한 작은 회사로부터 그룹기업으로까지 부상한 결정적인 비결이 바로 인재를 중히 여기고 성실과 신용을 중히 여겨 실행해온 결과라고 말하면서 조선족기업인들이 《말 한마디가 태산보다 무겁다》는 마음가짐으로 창업에 나서기를 부탁하였다.

이와 함께 리회장은 조선족기업인들이 국가에서 민영경제를 대폭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우월한 정책를 적극 활용하고 앞선 안목과 판단으로 기회를 포착하고 대담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며 어떤 환경에서든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노력과 성실, 신용을 바탕으로 창업성공을 거두기를 바랐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아나운서의 인터뷰를 받고있는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수상자인 리성일회장.

《고향 연변에 대한 투자 아끼지 않겠다》

고향 연변에 자주 온다며 날따라 새록새록 변화하는 고향의 모습에 자부감을 느낀다며 또한 매번 올때마다 열정적으로 반기는 고향사람들의 모습에 항상 마음이 찡해나고 정에 푹 배인다는 리회장이다.

얼마전에 새롭게 개업한 연변최대의 스키장을 비롯, 지금까지 리성일회장이 연변에 투자한 금액은 인민페로 근 5억여원에 달하고 있다. 금후 5년동안 스키장과 설상락원, 수상락원, 골프련습장, 5성급호텔, 300여채의 별장식호텔 등을 일체화한 30억원 규모의 대형휴가촌을 여기에 건설할 계획이다.

몇 년전부터 고향 연변에 대한 투자를 본격 시작했다. 2억여원을 투자하여 연길시 의란진 춘흥촌에 400메터 초급코스 1개, 1300메터짜리 고급코스 2개 및 스노우보드(滑雪板), 빙상모터찌클, 눈조각을 갖춘 설상오락원 등 오락시설을 갖춘 연길모드모아스키장을 지난 12월에 개업했다.

연변 최대의 스키장으로 자리매김한 모드모아스키장은 현재까지 당지 로동자 150여명의 일자리를 해결해주었다. 스키장은 래년까지 스키코스 두개와 현대적시설을 더 만들어 연변뿐만아니라 국내에서도 시설과 봉사가 일류인 관광과 스포츠를 겸한 일류스키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모드모아그룹은 금후 5년동안 스키장과 설상락원, 수상락원, 골프련습장, 5성급호텔, 300여채의 별장식호텔 등을 일체화한 30억원 규모의 대형휴가촌을 건설할 계획이다.

기자가 연변에 투자하는 목적을 묻자 리성일회장은 《나는 돈을 벌려고 연변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 대한 사랑으로, 고향의 면모를 일신하는데 한몫하고 싶고 고향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것이다. 앞으로도 고향 연변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표시했다.

연변의 산업우세에 대해 리회장은 《연변은 물류운송의 불편 등 요소로 제조업을 발전시키기에는 제한적이다. 환경오염이 없는 조선족민속관광과 친환경산업으로 승부해야 한다. 연변의 우세인 푸르른 삼림과 맑은 물, 맑은 공기는 친환경산업을 발전시킬수있는 충족한 토대로 된다.얼마전에 중국도시경쟁력연구회와 향항리공대학 공공정책연구소에서 공동으로 평가한 “2013년 중국10대 맑은 공기질도시”평가에서 연변이 해남성 삼야시 다음으로 제2위를 기록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리회장은 연변은 해내외에 관련우세를 적극 알려 친환경산업투자유치사업을 경제생활의 의사일정에 올려놓고 틀어쥐여 연변경제의 도약식발전을 이뤄나가는것이 바람직한 선택이라며 친환경산업은 오락,레이저,관광,식료품,의학,부동산산업을 포함한 파급면이 큰 항목이라며 현재 국내 대도시에서 환경오염 등으로 수시로 발생하는 스모그현상은 연변의 친환경산업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2012년 3월 6일, 전국정협 길림성대표단의 저명한 녀중음가수 더더마(德德玛)위원과 리성일위원이 정부사업보고 내용을 론의하고있다.

전국 정협위원의 책임을 다하여

리성일은 경제분야에서 이룩한 성과가 인정받아 1998년 광동성정협 제8기 위원으로 선거되였고 2003년부터는 전국정협 제10기 위원으로, 2008년부터는 전국정협 제11기 전문위원으로 되였다.

기업경영으로 그렇게 드바쁜 와중에도 정협위원의 사명감을 안고 기층에 심입하여 경제분야에 존재하고있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해결경로를 모색하였으며 광동성과 나라의 생산력발전에 유리한 의안들을 제출하여 해당 부문의 중시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일찍 시장독점을 타파할데 관한 문제를 다룬 의안 《민영경제발전과 민간투자를 추진할데 대한 근본적인 방법에 대하여》를 제기하여 민영기업에 대한 사회적인 기시 등 일부 전형성을 띠는 문제를 천명했으며 우리 나라 교육체제개혁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내놓았다. 특히 2006년 전국정협 제10기 제4차 회의에서 그가 제기한 중국의 도로표시판을 규범화할데 대한 의안은 극히 민생적인데서 국가교통부에서 접수, 현재 실행단계에 있다고 한다. 2009년 3월 《두가지 회의》기간에도 리성일씨는 법률에 관한 제안―소학교부터 형사법, 치안법을 비롯한 법률과목을 설치해 어릴 때부터 관련 법률지식을 장악할수 있도록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하여 조남기로부터 《리성일은 경제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으면서도 전국 정협위원의 신분으로 늘 민영경제 발전과 나라의 국책을 둘러싸고 훌륭한 제안들을 제출하여 해당 부문의 결책에 도움을 주고있는데 이런것들은 우리 나라 새 일대 젊은 기업가들의 높은 자질을 보여주고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길림신문 유경봉 강동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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