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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드림 , 조선족 삶의 새로운 추형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4.02.26일 11:19
재한 흑룡강성 화천적 조선족 삶의 현장 더듬어

  (흑룡강신문=하얼빈) 세상은 변해도 너무 변했다. 30년 전, 우리는 한국을 암흑한 ‘자본주의 남조선’으로 알고 있었다. 20년 전, 우리 시야에 고국은 ‘선진한국’이었고 금전판이었다. 그 후 우리가 가서 돈 벌며 느낀 한국은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였다. 그러나 한때 ‘하늘의 별 따기’같던 코리안 드림, 울고 웃으며 희비의 모험과 행운으로 반죽된 한국행, 이젠 더 이상 희귀한 일이 아니다. 급물살은 멎었고 사품치던 암류도 가라앉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지난해 ‘화천조선족발전사’ 편집팀은 재한 화천적 동포들을 만나 현지방문취재의 기회를 가졌다. 우리가 더 알고 싶은 것은 새 역정을 맞고 있는 화천적 성화인들의 새로운 변화였다. 많은 사연들은 우리들이 집에 앉아서 듣는 소문과는 달랐다.

  왜 사람들은 한국이 나쁘다고 하면서도 우러러 보는가? ‘다시는 안 나간다’, ‘어서 들어와 살아야지’라고 하면서도 들락날락 한국에 가서 일하며 사는 건 무엇 때문일까?



지난해 추석을 맞아 가졌던 재한 화천현 성화향 중성촌운동회의 한장면./자료사진

  우리의 취재방문은 생각과 달리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은 재한 화천적 동포들이 살고 있는 큰 동네와 같았다. 그러나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해뜨는 날은 보통 전화통화가 끊어지는 때였다. 세계에서 근로시간이 제일 긴 한국에서 동포들의 하루 근로시간은 보통 10-12시간, 출퇴근 하느라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이 또 1-2시간, ‘빨리빨리’ 한국은 참으로 무서운 나라였다. 일하는 자의 천국이었다.

  ‘한국 막벌이’ 이제 더 나갈 사람은 누구?

  현재 재한 화천적 동포는 모두 1,885명, 화천 조선족 인구의 36%를 차지한다. 그 중 노무현장에서 ‘막벌이’하고 있는 연령대는 30-50대인데 4, 50대가 주체를 이루고 60대와 30대는 좀 적었다. 일찍 외톨이로 한국에 나왔던 60대 이상은 대부분 이미 귀국하고 일부는 가족과 같이 한국체류 중이었다. 집계에 따르면 2012년 후부터 취직을 바라고 처음 한국에 입국한 화천적 동포는 거의 없었다. 귀국자 대부분은 재입국자들이고 귀향자도 몇 명 안되었다. 중국 연해와 내지에 진출한 3, 40대들은 모두 자기 직장이 있거나 자기 업체를 경영하고 있어서 선대들처럼 한국 막벌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이래저래 한국 나갈 사람은 다 나갔다는 말이다. 무비자입국이라 해도 돈벌러 나가려는 사람은 더 없다. 지난 2007년이래 ‘고용허가제(방문취업)’가 도입되고 2010년부터 ‘무연고동포방문취업제(시험을 통한 전산추첨제)’를 실시하면서 모두 ‘한국행 소원’을 이루었다. 지금은 입국보다 ‘F4 체류자격변경’이나 ‘영주권’ 따기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정책이 변하니 이젠 좋은 일만 남았다. 그래서 지금은 예전처럼 집 팔고, 이잣돈 꾸고, 사기 당하고, 불법꼬리표 달고 쫓기는 일도 없어졌다. 한때 살판 치던 ‘비자대행’사기꾼도 자취를 감췄다.

  가족들의 만남, 서울이 ‘화천적 성화동네’로

  지난 90년대만 해도 한국 노가다판은 거의 외톨이들의 세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가정은 ‘부부별거’, ‘이산가족’살이를 하면서 돈도 많이 흘려버렸다. 그 난장에 이혼, 가정해체의 아픔이 제일 컸다. 그러나 약 10여년래 한국입국자가 많이 늘어나면서 재한동포사회는 마침내 부부동반가정사회를 이루었다. 지금 재한 화천적 동포 1,800여 명 중 부부동반인구가 1,180여명인데 전체의 65%이상을 차지했다. 그 중 딸, 며느리가 한국에서 애를 낳고 부모까지 모셔다가 함께 지내는 2, 3세대 가구가 적지 않게 나타났다.

  중성촌 백수길 씨(60년생, 한국체류 18년)의 경우 일가 6남매 3대가 한국체류 중이다. 동생 백수경 씨는 ‘온 가족이 다 한국에 있으니 예전처럼 왔다갔다하며 헛돈을 쓸 일도 없고 완전히 도시민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화천현식량관리소간부 서송봉 씨(65년생, 한국체류 12년)는 ‘부부가정이 많아지면서 서울생활이 이젠 동네마을살이처럼 돌아간다’고 했다. 지난날 촌 마을에서 치뤄지던 환갑, 결혼, 돌잔치, 생신초대연 모두 서울에서 치뤄지는데 하객이 보통 100명, 많을 때는 2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서울에서 휴가 때면 친척, 친구, 동창, 동갑 파티도 부절하게 이어져가고 있었다. 해마다 맞이하는 한가위는 재한 화천적 동포들이 한국 각지에서 서울에 올라와 함께 보내는 명절이었다. 고향이 그리워졌고 고향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성화향 중성촌 촌민 운동회는 2011년부터 이미 2회나 고국 땅에서 펼쳐져 재한 동포사회에 특기할 만한 선례가 되었다. 그 밖에도 ‘성화버스공장주인공’ 허창준 노인의 팔순 잔치, 화천현 의료 위생계의 명의 이성원 전임 원장의 팔순 축수연은 화천적 동포들의 큰 경사로 치뤄졌다.

  가족이란 따뜻한 품이 있기에 동포사회의 테두리도 넓어졌고 모두 활기찬 양상이었다. 그래서 떠도는 우스갯 소리가 ‘지금은 부부동반 남정네들이 두 어깨에 힘주고 다니고 외톨이들은 기가 꺾인 상’이라고 한다. 한때 무성하던 ‘애인보기’, ‘임시부부’현상도 요즘은 적어졌고 이혼 대신 재결합부부가 많아졌다.

‘사람이 태어난 게 돈만 벌라고 태어난 거 아니잖아요? 애들도 이젠 다 출세하여 잘 나가고 있는데 우리도 이젠 고향을 생각하며 당당하게 살아야죠.’ 서울에서 화천적 성화동네의 꿈을 펼쳐낸 주인공 중성촌 정영기(55년생, 재한 화천적 성화향우회 회장) 전임 촌장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고향이란 떠날 수는 있어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진실로 느꼈다.

  희망 20대, 호기로운 도전

  지금 한국체류 중인 20대들은 부모들의 뒤를 따라 한국에 나온 제2세대의 ‘출국족’들이다. 대부분 중국에서 고교, 대학을 다녔고 한국 나와 유학이나 기술연수를 마쳤다. 재한 체류시간이 보통 3, 4년씩 되었다. 그들은 아직 사회경험이 짧지만 정보력과 적응력이 강했으며 상당한 학력을 가진 데다가 나이도 어리기에 눈높이가 부모세대와 달랐다. 지금 대부분 여러 직종에서 국가기술자격증을 따고 취직에 첫발을 들여놓는 상황이었다.

  그 중에는 한국 고려대, 연세대, 경희대, 숭실대를 졸업하고 무역, 금융, 전자 등 중, 고급 기술직을 소망하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마케팅, 디자인, 학원 강사, 가이드, 미용, 인테리어, 요리 등 전문기술직 취직을 준비하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어른들 속에 끼어 막벌이 현장에서 일하는 젊은이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에서 체류자격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고 부모들처럼 영주권이나 국적 따기에 급급해 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다 풍부한 자기 실력을 키워 한국 주류사회에서 자기가 원하는 전문기술직에 취직할 것을 소망하고 있었다. 부모세대들에게는 그런 지식이나 능력이 더 없다. ‘어디서 배운 일본어지?’ 한국에서 조선족 20대들이 영어를 알아듣고 일본어 실력이 초보 이상인 것을 알고 한국 선생님들도 놀라더라고 한다. ‘낙후한 중국 조선족’이 한국에서 최하위 막장 품팔이삶을 개변할 수 있는 비전이 바로 20대들의 출현이 아닐까? 꿈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그들의 성장이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귀향보다 한국체류를

  90년대 한국 진출기에 사람들은 모두 ‘돈 벌고 돌아오리라’면서 한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20년 후인 지금까지 전 현내에 귀향자는 불과 몇 명밖에 안된다. 추정조사에 따르면 대부분 재한교포들은 한국체류를 우선으로 꼽고 있었다. 귀향은 고려하지 않거나 뒤로 미루자는 반응이었다. ‘일단은 한국에 체류하고 보겠다는 것이지요. 지금으로서는 일하며 살아보고 앞으로 가서 귀향을 고려하게 되지요.’ 화천현 조선족 병원 노인천(68세) 전임 원장의 말씀은 대표성을 띄었다. 총적으로 귀향보다 한국체류를 선택하는 추세였다.

  근년래 한국입국, 취직, 체류여건은 모두 좋아졌으나 대신 ‘환율하락’이 그들에게는 직격타였다. 소비가 늘고 물가도 오름세이지만 급여는 얼마 오르지 않았다. ‘한국 돈벌이 이젠 헛벌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지만 ‘당장 귀국하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 한국에서 일하며 살아보겠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한국인 상담이나 속셈을 들어보니 수긍할 만한 이유가 적지 않았다.

  -- 제일 마음에 드는 게 ‘일자리’였다. 아무 때건 나가면 일당도 할 수 있고 자기 적성에 맞게 일을 선택할 수 있고 어디 가나 말이 통하여 일하기 편하다고 했다. 중성촌 여경애(57세) 씨는 한국 나와 20년 줄곧 ‘부산세원양행’(실험용기제조)에서 근무해 왔는데 ‘이젠 한국사람 다 되었다’고 한다. 일도 힘들지 않고 인맥관계도 좋아져서 한국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낸다고 했다. 성광촌의 김송산(63세, 한국체류 8년) 씨는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닭갈비’집을 경영하고 있는데 ‘중국처럼 인정관계에 시달리지 않아서 영업하기 좋다’고 했다. 그는 ‘돈 벌며 살기 좋은 나라는 한국’이라고 했다.

  -- ‘나 한국 나와 배운 게 일인데 중국 들어가서 그저 먹고 놀라면 못 살겠소.’

  ‘아직은 일할 만한 신체인데 양로하러 중국 들어가겠소?’

  생업에 한창인 그들이 이미 ‘노인화’된 향촌마을로 돌아간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 전에 사람들은 ‘돈은 한국에서 벌고 쓰는 것은 중국 와서 쓰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되었다. 환율은 떨어졌는데 중국의 집값, 교육비, 의료비, 인건비는 도리어 몇 배나 올랐다. 시장물가도 이젠 한국과 맞먹어 가는데 ‘누가 중국 들어가서 돈줄을 풀겠는가?’ 중성촌의 정순길(57세, 한국체류 22년) 씨는 ‘환율이 떨어져도 아직 돈벌이를 그만둘 상황은 아니다’고 했다. 그는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떼돈을 벌었지요. 그러나 그때에는 헛되게 날린 돈이 너무 많았죠. 지금은 모두 정신 차리고 계산하여 쓰니 적은 돈도 많아 보이고 값져요. 가족들까지 모두 맞들고 버니 괜찮아요.’라고 했다.

  -- ‘돈 있으면 살기 좋은 나라는 한국’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았다. ‘가짜나 불량식품이 적고 어디 가나 음식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중국처럼 위생불결이나 서비스차질문제가 부담으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 ‘한국 나와 보니 삶의 차원이 중국과 달라요. 가는 곳마다 친환경적인 문화명소가 돋보이고 국민적인 도덕성과 문화소질, 공공서비스수준이 일반 수준이 아니죠.’ 성화학교 차해동(65세, 한국체류 13년) 전임 교장선생님의 한국인상담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은 ‘한국 나오는 바람에 아는 것도 많아졌고 생활작태가 확 바뀌었다’고 했다. 노인천 전임 원장이 직업소개소에 있을 때 동포들로부터 많이 듣는 소리가 ‘우린 한국 아니면 진짜 바보처럼 살았을 거요. 집에 처박혀 농사질만 했더라면 언제 월급 받는 도시생활을 해보겠소?’ 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중성촌의 김용화(61세) 씨는 건설현장에서 형틀팀장경력만 해도 이젠 9년째다. 옆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현장제일주의’ 한국에서 시멘트가루 날리며 30층 벽위를 뛰어다녀도 ‘십장만은 조련찮다’고 했다. 그는 돈도 벌어 두 아들도 다 출세시켰다. 작은 아들 창덕이는 일본 와세다대학 금융전업을 마치고 지금 한국에서 취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화 씨는 ‘내 돈벌이는 이제부터 시작이요. 월급쟁이도 아닌 내가 뒤에 남기고 쓸돈까지 벌자니 아직 멀었소.’라고 했다. 그의 말과 같이 재한 동포들의 속셈은 거의 다 ‘돈도 더 벌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 노무는 여전히 노다지판이었다. 이래저래 이젠 한국생활에 적응되었고 모두 가정적인 자기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 대한 친숙함이 생겼고 선진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진 것이 분명했다.

  고향 품고 살아야지

  서운한 말이지만 이제 우리는 한국과 중국에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모두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성공은 이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살아왔던 ‘조선족 공동체’시대는 이미 끝났다. 정론된 말로 ‘정체성 위기’라고 하지만 농촌사람들은 ‘한국바람에 조선족은 망했다’고 한다. 하도 잃은 것이 많으니 하는 소리다. 한국을 꿰차고 넘어간 우리의 세계화, 도시화는 결국 ‘이동하는 고향’이 되었고 ‘흩어진 조선족’으로 탈바꿈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각은 여전히 원초적인 은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빨리 돌아와 같이 살았으면…’ 심지어 ‘그들이 귀향하면 우리 마을이 예전처럼 되지 않을까…?’라는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낙엽귀근’의 소식은 없는데 우리는 그냥 ‘해외노무송출’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세상에 ‘고향을 사랑한다고 꼭 고향 와서 살아야 한다’는 정설은 없는 이상 고향 농촌을 떠나간 그들을 서러워하지도 말고 나쁘게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 민족이 잘 살고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반갑게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 성화집단농장 개척자이신 이재근 노인님은 위기에 처한 농촌의 앞날을 우려하시며 ‘근거지 같은 내 집, 내 땅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근거지 건설’을 제안했던 노인님의 해석은 원견성이 있는 주장이었다. 이 노인의 말씀과 같이 농촌은 우리의 귀중한 재산이고 보금자리이다. 여기는 내가 가장 존엄 있게 살 수 있는 곳이고 내 토지가 있으며 내가 어느 때든 드나들 수 있는 안식처이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 살든 나를 낳은 중국, 마음의 고향ㅡ조선족이라는 이름은 떼어버리지 못한다. 더구나 두고온 고향 농촌만은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재한 동포들 중 한국 나와 돈 좀 벌었다고 집 팔고, 땅 팔고 국적 딴다고 훌훌 떠나더니 지금 와서 후회막급이 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하니 잘못되었다. 서울 대림동 재한동포행정사 담당자 장만동(55세, 홍광촌 출신, 재한동포 총 연합회 부회장) 주임의 말에 따르면 근년래 행정사를 찾는 분들 중 신원불명, 체류자격변경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벌어진 재산권이나 토지분규 같은 사안을 들고 나오는 분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경제손실은 물론 민원처리에서도 몹시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 그는 ‘우리 성화에서는 얼마나 잘 했습니까? 지금까지 각 촌 마을에는 집을 사고 들어온 타민족이 한 명도 없다지요? 촌마다 농전을 다시 측량해서 토지를 집중관리한 덕에 얼마나 큰 혼란을 막아주었는지 모릅니다. 재한 동포들도 이젠 현주소에 관심을 돌리고 중국고향과 상호간의 네트웍을 이뤄야 서로 믿음이 가고 힘이 되고 희망사항도 더 많아질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과 같이 고향마을 어른들도 이제는 그들을 ‘돈벌이 떠난 사람들’로만 볼 때가 아니다. 교류와 합작의 결속력을 만들어 고향건설에 바른 힘이 되게 하고 그 맥락으로 삶의 갱신을 추구해야 한다.

  재한 화천적 교포들의 ‘성화마을현상’은 고향 품고 살아가는 성화인들의 활기찬 삶의 모습이었다. 생업으로 치열한 한국땅에서 그들은 서로 흩어져 살아도 비둘기 모이듯 향음 찾아 서로 모였다는 것이 경이로운 일이다. 고향에서 해낼 수 없는 일을 그들은 해냈다. ‘누가 우리를 생각하오? 고향사람밖에 없소.’ ‘고향 없는 삶은 외롭소.’ ‘우리가 모이니 고향마을이 되었구만…’ 성화사람들이 뼛속까지 배인 집단성, 응집력, 정적인 삶의 소치가 한국땅에서 빛을 발했다는 것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고향 품고 살아야지.’ 그래서 그들의 만남은 눈물 겨웠고 흘러간 세월을 느끼며 서로 부둥켜 안았다.

  ‘길거리에 나가 보니 애들은 볼 수 없더구만. 사람은 점점 더 적어지는데 이제 몇 년을 더 버티겠소?’ 상실의 비애에 그들도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고향마을에서 길 닦고 아파트를 세운다고 하니 그들도 술렁거렸다. ‘진짜 잘해 놓으면 왜 고향 가서 살지 않겠소?’ 귀향에 모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였다. “우리 성화에서는 그래도 ‘민속풍정원’건설에 수를 걸어야 하오. 한국 같으면 관광문화체험명소로 떴을 텐데…” 그들도 고향 농촌의 희망사항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다름 아닌 새 중국에 수많은 최초를 만든 ‘중국 제1촌’의 신화가 이 좋은 시대에 새로운 아이디어로 창출되어 향토문화의 영구한 유산이 되고 새 농촌건설의 명지로 떠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고향 품고 살아가자’ 고향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심이지만 사심을 초월하는 민족심이었다. 그런 삶이 또 우리 민족이 강하게 살아남고 융성부활의 꿈을 실현하는데 희망이 되지 않을까?/박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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