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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민 - 중국조선족음악계의 거장과 그 가족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09.11.30일 11:12

음악예술을 꽃피우는 멜로디가정

저명한 음악인 안국민, 김인숙가정에 대한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중국조선족음악계의 거장으로 존경받고있는 안국민선생은 출중한 악대지휘이자 유능한 작곡가이고 부인 김인숙녀사는 그제날 연변가무단의 빼여난 독창가수였다는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오늘날에 와서 이들 가정은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서 음악편집으로 사업하는 큰딸 안실, 중앙민족대학 음악학부의 바이올린연구생도사로 사업하는 둘째딸 안련실에 중국음악학원 작곡학부를 졸업한 외손녀 경파까지 계주봉을 물려받아 명실공한 음악인가정으로 자랑을 떨치고있다.

제1편 중국조선족음악계의 거장 안국민

뛰여난 음악기질

1931년 7월, 흑룡강성 밀산시의 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여난 안국민은 천부적인 음악기질을 가지고 태여나서인지 아니면 동네 교회당에서 울려퍼지는 교회음악과 취주악소리를 들으며 자라서인지 어려서부터 음악감각이 좋았고 악기도 남이 다루는것을 보고는 절로 다룰수 있었다.

남몰래 교회당문을 떼고들어가 발풍금을 부지런히 련습하여 익숙한 솜씨로 교회풍금수로 되기도 하고 바이올린은 사촌형이 켜는걸 눈박아 보면서 익혔으며 계서중학교 2학년에서 공부할 때는 시골에 가서 개암을 뜯는 일을 하는 며칠동안에도 손풍금에 미쳐있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일을 하지 말고 손풍금을 련습하라는 특혜를 받았다.

덕분에 안국민은 며칠후에 있은 촌민들을 위한 위문공연에서 손풍금으로 노래반주는 물론 무용반주까지 멋지게 다 해제껴 소문을 놓았다. 오죽하면 학교에서도 음악교원으로 남기려고까지 했을가?!

중학시절인1948년 가을에 금방 설립된 계림문공대에 들어간 안국민은 바이올린이며 손풍금을 다루거나 작곡도 하면서 전문음악인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그가 최초에 작곡한 노래는 《농촌의 가을》이였다. 이 노래가 단 한번의 순회공연으로 온 계림향 사람들이 다 부를수 있을만큼 인기를 모으게 되자 음악창작에 신심을 가지게 된 그는 시간만 있으면 작곡을 하는 한편 음악리론을 파고들기 시작, 그 이듬해부터는 음악부의 부책임자로 자리를 굳히고 손풍금반주를 하면서 계림문공대 대가를 망라한 숱한 노래와 기악작품들을 창작하였다.

1950년 11월, 계림문공대가 해산되자 안국민은 음악을 계속할 일념으로 연변문공단을 찾아갔다. 그러나 연변문공단 책임자는 처음 접촉하는 곡도 악보를 초견으로 훌륭하게 연주하는 안국민의 손풍금실력에 만족하면서도 성분이 부농(몇달후에 중농으로 재획분되였지만 긴장한김에 틀리게 말했음)이라는 말에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두달후인 1951년 1월 31일에 박승일(후에 국가교육위원회 민족교육사 사장 담임)과 김명(당시 동북행정사무위원회 민정과 과장)의 소개로 재차 연변문공단에 찾아간 그는 손풍금은 진작 자리가 메워진 상황에서 비올라를 처음 배워야 하는 처지였지만 배우면서 악대합주에 참가할만큼 천부적인 소질이 은을 내주어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당시 연변문공단에서는 민족음악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상급의 해당정신에 따라 가야금을 배울 임무를 그한테 맡겼다. 이렇게 가야금으로 민족선률을 연주하면서 민족정서에 깊이 매료된 그는 정진옥선생의 작품인 《처녀의 노래》와 판소리 《떡메의 증오》의 반주에 참가하는것을 밑거름으로 가야금조곡 《심청》을 창작하여 전국제3차음악작품평의 3등상과 1984년 길림성창작극(종)목평의 1등상을 수상하였다.

유능한 악대지휘

안국민선생이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은것은 서장참관단이 연길에 왔을 때인 1953년 12월이였다. 그때 자신심 하나만 믿고 덤벼들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한 선생은 1956년 중앙악단이 성립되면서 동부독일에서 청해온 그스린지휘를 스승으로 모시고 지휘를 체계적으로 배웠다. 거기에서도 5, 60명 학생가운데서 번마다 지명을 받고 시범을 보일 정도로 천부적인 기질을 자랑한 선생은 1957년 6월에 연길로 돌아오자마자 악대대장으로 되여 지휘봉을 잡고 전문지휘가의 화려한 인생을 펼쳐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리직휴양할 때까지 안국민선생은 무려 3000여차의 가무공연에서 지휘봉을 잡았고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한 공연, 캄보쟈 시하누크친왕, 뉴질랜드 마얼덴총리 등 외국수뇌자들을 위한 공연과 출국공연 등으로 지휘생애를 장식해나갔는데 그의 지휘에 탄복한 시하누크친왕은 특별히 선물까지 주는 은총을 베풀었다.

1956년, 베토벤서거 129돐을 기념하면서 마련된 행사에서 선생은 베토벤의 제7교향곡 제2악장을 성공적으로 지휘, 연변 최초의 교향악연주를 지휘한것을 발단으로 40여부의 교향악연주를 지휘함으로써 연변교향악사업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이밖에도 선생은 《콩쥐팥쥐》, 《아리랑》 등 가극과 《백모녀》 등 무극 그리고 영화음악, 텔레비죤음악, 연극음악 등을 지휘하여 여러가지 지휘상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출중한 작곡가

지금까지 100여수의 가곡, 20여부의 무용곡에 10여부의 기악곡, 3부의 가극(합작) 을 창작한 안국민선생은 중국음악계의 최고상인 《금종상》을 세개씩이나 수상하면서 출중한 작곡가로도 이름을 날리고있다.

안국민선생이 연변가무단에 와서 처음 작곡한 작품은 무용곡 《물동이춤》이였다. 반세기가 넘도록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물동이춤》은 창작 당시 레코드에 취입될만큼 명곡으로 인정받았고 세기를 뛰여넘은 지금도 가끔씩 공연되면서 사랑을 받고있다.

1958년에 민가수집을 위해 훈춘시 경신향에 내려갔다가 한 농민이 소수레를 몰고가면서 부는 휘파람선률이 하두나 좋아 기보해놓았다가 국경 10돐헌례작품을 창작하고저 룡정시 동성용진에 내려갔을 때 생활체험으로 방목을 하면서 완성한 《연변목가》는 장춘문예콩클에서 처음으로 불리워진 뒤를 이어 중앙레코드사에서 레코드에 취입, 전국각지에 발행되였으며 1959년 10월, 북경에서 열린 국경10돐 헌례공연에서는 부인 김인숙가수의 열창으로 대번에 인기몰이를 하였다.

그리고 1981년에 작곡한 《어머니》는 당시 류수용가수가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1984년 호요방총서기를 위해 마련한 공연프로합평회에서는 북경의 송일가수가 불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래웠다.

1989년에 완성된 가곡 《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는 2001년에 있은 제1차중국음악《금종상》평의에서 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965년, 공연차로 내두산, 이도백하, 소사하일대에 갔을 때 일망무제한 밀림속을 걸으면서 느낀 진한 감수가 곡상으로 떠올라 창작했다는 이 작품은 음악계의 전문가들로부터 정서기복이 크고 격조가 청신하며 청중들에게 드넓은 흉금을 안겨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은 공화국창건 50돐음악작품응모추천활동에서 우수작품상을 탄 뒤를 이어 금종상평의에서도 우수음악작품 동상을 수상한 작품, 중국교향악단의 연주로 2001년 중국공산당창건 80돐기념공연의 무대에 올랐고 한국 서울예술축제와 제10회교향악축제에서 연주됨과 동시에 까자흐스딴의 작곡가협회대표대회로부터 연주제의를 받을만큼 유명해졌다.

이밖에 2003년 《금종상》평의에서 우수가곡상을 수상한 《진달래》는 200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50돐 대형기념행사에서 인기를 누리였고 지금은 중국조선족음악무대에서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고있다.

실생활속의 모습

생활속의 안국민선생은 책임성이 강하고 모든 일에서 세심하고 까근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오선보줄은 언제나 에누리없이 똑같은 간격이고 음악창작을 하면서 수도 없이 지우고 다시 수정하지만 오선보는 늘 깨끗하고 정연하며 아무리 다망한 기간이라도 책상우의 물건은 언제나 질서정연하다.

기억력은 어찌나 비상한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이 있었다는것을 오늘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또 이야기를 재미있게 한다. 또 미운 사람이 없고 맛없는 음식이 없어서 부인이 만든 모든 음식을 맛있게 들고 행복해한다. 자식들에게도 무슨 일을 하든지 뭘 바라고 하지 말고 이 사회를 위해서 기여할수 있는 의의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것으로 만족하라고 당부한다.

안국민선생의 과외애호는 독서, 한가할 때면 이미 읽어본 책도 다시 읽을 정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또 다른 애호는 낚시질, 아직 수준급이 되지 못해서 고기를 몇마리 낚지는 못하지만 짬이 생기는대로 낚시터에 찾아가 머리를 쉬우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심신의 피로를 해소한다.

출생지는 흑룡강성이지만 열혈청년시기에 연변에 와서 예술적재능을 키우고 또 연변에서 음악을 위한 사업에 혼신의 빛과 열을 다 바치면서 많은 성과를 이룩한 안국민선생은 연변을 고향으로 간주하고있다. 하기에 선생은 《연변목가》, 《아, 연변이여》, 《어데 가나 그리워라 나의 장백산》, 《해저문 두만강가》 등 제목에 “연변”이라는 단어가 들어갔거나 내용면에서 연변을 노래한 가요를 많이 창작한데 만족하지 않고 여생의 빛과 열을 연변의 음악사업에 바쳐가고있다.

제2편 지난세기 50, 60년대의 인기가수 김인숙

꼬마전사

1936년 11월, 룡정시 태양향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흑룡강성 오상현의 어느 시골에서 소학교에 다닌 김인숙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꾀꼴새로 소문났고 12살 어린 나이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에 입대하면서 노래인생을 시작하였다.

당시 소학교 5학년에서 공부한 김인숙은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의 공연이 끝난후에 마련된 지방군중들과의 련환모임에서 소학생대표로 독창을 하였다. 그런데 선전대의 배우들이 노래를 참 잘 부른다고 칭찬해주면서 선전대에 참가하라고 할줄이야?! 흥분을 가라앉힐수 없게 된 김인숙은 며칠후 아버지를 졸라 할빈에 자리잡고있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를 찾아가고야말았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에서 김인숙은 백고산선생한테서 음악리론을 배우고 조득현선생의 안무를 보고 무용을 익혔으며 왕향선생한테서 성악을 배우면서 음악수양을 닦았다. 이렇게 예술수양을 제고하는 한편 부대를 따라 목단강, 밀산, 계서, 상지, 길림 등지에 가서 공연하고 장춘해방전투에도 참가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전쟁년대라 낮에는 적군의 폭격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밤이면 야전부대를 따라 행군했는데 하루에 보통 25∼30킬로메터, 많으면 50여킬로메터를 강행군할 때도 있어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상황이였지만 나어린 김인숙은 용케도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혁명전사로 성장하였다.

인기가수로 환영받던 시절

1948년, 조선의용군 제3지대의 꼬마선전대원들과 더불어 할빈민족사무처문공단에 들어간 김인숙선생은 1949년 할빈민족사무처문공단이 연변문공단(연변가무단)과 합병하면서 연변가무단 배우가 되였다. 이때로부터 연변가무단 독창가수로 활약하게 된 선생은 선녀같이 아름다운 용모, 감칠맛나는 노래, 춤을 동반한 황홀한 표현으로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다.

1953년 심양에서 펼쳐진 제1차동북3성문예콩클에서 김인숙선생은 최정연 작사, 정진옥 작곡으로 된 《처녀의 노래》를 불렀는데 재청을 요구하는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아 수차례 답례끝에 그 노래를 다시 부르고서야 다음 종목으로 넘어갈수 있었다고 한다.

그번 콩클에서 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김인숙선생은 1959년에 동북3성 복건전선위문단의 성원으로 3개월동안 위문공연에 참가, 독창, 2인창에 중창까지 번마다 10여수의 노래를 불러 부대장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고 선진사업일군으로 평의되였다. 그해 북경에서 진행된 국경 10돐헌례공연에서도 김인숙선생은 수도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배우대표로 국경초대연에 참가하는 영광도 누리였다.

지난세기 50, 60년대에 김인숙선생은 여러차나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받고 주정부의 공화국창립10년우수연기상을 비롯한 많은 영예를 따내였으며 선생이 부른 《처녀의 노래》, 《연변목가》, 《깜둥이처녀》는 레코드로 출판되여 전국에 보급되였다. 이밖에 선생은 또 《콩쥐팥쥐》, 《백모녀》, 《배나무골》 등 가극에서 주역을 맡고 뛰여난 연기력을 과시하기도 했으며 1960년대말부터는 연변가무단의 무용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에서 선창을 맡아 각광을 받았다.

현모량처

김인숙선생이 독창을 할 때면 손품금반주를 맡은 안국민선생은 반주에만 그치지 않고 세심하게 지도해주면서 예술기량을 제고할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에 김인숙선생은 안국민선생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였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사랑이 싹터서 1954년에 결혼을 하고 딸 셋을 낳아키우며 지금까지 화목하게 살아가고있다.

그러나 안해로서, 엄마로서의 김인숙선생은 나름대로 희생도 많이 했다고 한다. 큰딸인 안실씨가 제일 미안해하는 일은 동북3성콩클이후 어머니가 많은 중요한 공연과 제6차모스크바세계청년축전(1957년)을 비롯한 큰 행사에 참가하지 못한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자식을 낳아서 키우는 일이 세계축전에서 수상하는 일에 못지 않게 성스럽고 위대한 일이라고 하면서 후회하지 않았다.

당년에 안국민선생이 지휘를 하는 한편 창작을 하느라고 팽이처럼 돌아치는통에 쌀이며 석탄을 사들이는것은 물론 온돌을 뜯어고치는 등 궂은 일까지 김인숙선생의 어깨에 떨어졌다. 여름이면 선생은 지붕우에 올라가 기와를 얹고 겨울이 오기전에 천정우에 톱밥을 올려야 했다. 그럼에도 공연을 떠난후면 자식들이 고생한다면서 집에 있는 동안만은 장판을 닦는 등 자질구레한 일들마저 딸애들에게 시키지 않았다.

그 시기 선생네 가정은 부부의 로임이 꽤나 높았다. 하지만 선생은 검소하게 생활하고 멋을 부리지 않았으며 자식들에게도 우량한 전통을 물려주기에 최선을 다했다. 먹을것은 한밤중에라도 일어나 만들어주면서도 옷은 언제나 헐렁한걸로 사주었기에 자식들은 새옷을 입어도 이쁘게 입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몸에 꼭 맞다싶으면 이미 해지거나 낡아서 색이 바랜 뒤였으니 말이다.

부모님들에게 있어서 선생은 효성이 지극한 딸이였다. 김인숙선생의 친정부모님들은 생전에 몸이 퍼그나 허약했는데 선생은 달마다 꼭꼭 생활비를 보내는외 1년에 한번씩 연길에 모셔와서 건강검진을 받도록 하였고 몸에 좋다는 음식을 대접하면서 효도를 다하였다.

가족애가 특별한 선생은 성악사업을 생명처럼 사랑하면서도 창작에 정력을 쏟고있는 남편을 위해 리직후에는 예술활동을 접고있다. 안국민선생이 만년에 보다 훌륭한 작품을 많이 창작할수 있도록 뒤받침해주는것이 가정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보람찬 일이라는것이다.

“산 뢰봉”

1961년에 중국음악학원 성악학부에서 1년동안 연수를 하고 연변가무단 합창대 부대장으로 활약한 김인숙선생은 중국음악가협회 회원,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 리사,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으로 당선되면서 유명해졌지만 틀이 없고 남을 도와주기를 즐겼다.

당년에 김인숙선생은 명배우이다보니 어디를 가나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상점에 가면 판매원들과 고객들, 병원에 가면 의료일군들과 환자들…그들은 김인숙선생을 만나기만 하면 노래를 불러달라고 간곡하게 청을 들군 했는데 그때마다 선생은 그들이 듣고싶어하는 노래를 불러주면서 기꺼이 요구를 만족시켜주군 하였다.

주위사람들로부터 “산 뢰봉”이라고 불리운 선생은 남새를 사도 무더기로 사서 로인들만 사는 집, 병환으로 고생하는 집들에 나누어주었으며 김장철이면 동네집을 도와 배추를 다듬어주기도 하면서 좋은 일을 찾아하였다.

만년에 와서 선생은 홀로 사는 전우, 양로원에 들어간 선배들을 종종 위문하는것을 잊지 않고있다. 운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양로원의 선배를 찾아가면 얼굴도 닦아주고 옷도 빨아주면서 양로원일군들의 일손을 도와주기도 하고 《불효자는 웁니다》, 《사랑아 어찌 늙으랴》, 《홍도야 울지 말라》 등 노래를 부르면서 로인들과 함께 울고 웃기도 한다.

제3편 음악의 계주봉을 전해가며

어릴 때부터 연변가무단울안에서 살면서 음악을 너무 많이 접촉해서일가 아니면 부모들의 기질을 물려받아서일가 안국민선생네 딸 셋은 모두 음악을 좋아하고 또 일정한 음악천부를 갖고있는데 그중 딸 둘이 음악과 관련된 사업을 하면서 계주봉을 물려받고있다.

당년에 부모님들이 외지로 공연하러 떠나면 소녀가장이 되여 두 동생을 거느리고 살림을 맡아하던 큰딸 안실은 1975년에 연변예술학교 관현악부에서 첼로를 전공한후 룡정시문공단,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 등 전문예술단체에서 수석첼로연주가로 근무하다 1985년에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 전근, 음악편집을 맡고 《예술인탐방》, 《예술무대》, 《명곡감상》, 《음악산책》 등 프로들을 열심히 만들어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현재 역심(译审)으로 평의받고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리사로 활약하고있는 그녀는 우수한 방송음악프로를 많이 내놓아 여러 급별의 상을 따내였고 지난 8월 8일 연길에서 펼쳐진 새중국 창건60돐기념공연 《영원한 기념비》에서는 총감독의 중임을 떠메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공부잘하고 음악감이 좋고 모방력이 뛰여나 동네방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둘째딸 련실이는 소학교 1학년때에 연변가무단의 가극 《백모녀》를 통달해 연길시소학교문예콩클에서 일인다역으로 장끼를 자랑했다. 경극이든 벨칸토창법으로 된 아리아든 류행가요든 발성, 창법 모방을 잘하는 그는 지어 주변사람들의 말투, 걸음걸이, 동작까지 심통하게 모방해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고있다.

현재 중앙민족대학 음학학부 바이올린연구생도사인 련실이는 연주와 교수에서 여러 급별의 상을 따내였고 정소영지휘의 녀성애악악단에서 부수석 겸 바이올린협주곡 “량산백과 축영대” 독주를 맡았었다.

최근년간 그는 장계강이 연출한 력사경극 《적벽》에서 부수석, 경극교향시 《매란방》에서 부수석, 대형민족가극 《나무조각의 전설》에서 수석, 거액이 투자된 삼보의 대형뮤직컬《접》(蝶)에서 수석을 담당하였고 지난 8월중순에는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실내악 5중주단의 제1바이올린으로 한국방문공연에 참가하였다.

언니들의 퇴물림만 물려받으면서 새옷 한벌 변변히 입어보지 못하고 자라난 막내딸 성실이도 문화음악오락을 즐기지만 독서, 관광, 미식 등 흥취가 다방면이고 자아향수를 추구하다보니 자기멋대로 일할수 있는 증권교역을 선택하였다. 다행이라면 머리가 좋아서 형세파악을 잘하고 기술분석을 잘하기때문에 크게 밑지는 일이 없이 수입을 잘 올리는것이다.

안국민선생과 김인숙선생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것은 그래도 외손녀 경파이다. 총명하고 착하고 접수력이 빠른 경파는 중국음악학원 작곡학부를 졸업한후 미국 나스닥완미시공유한회사 음악부에 취직했는데 외할아버지의 유전을 이어받았는지 작곡에 무척 애착을 가지고있어 더구나 사랑을 받는다. 이미 결혼한 경파는 회사에 들어간지 1년만에 종업원기준병이 되였고 지금은 중요한 항목을 맡아하면서 성과를 올리고있다.

3대가 음악을 위한 사업에 투신하고있는 안국민, 김인숙가정은 대를 이어 계주봉을 넘겨주고 이어받으며 중국조선족음악사업에 보다 큰 기여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있다.

/연변라지오TV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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