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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호- 판소리 국가비물질문화유산에 진력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09.09.09일 10:16
민족전통예술사업에 몰붓는 심혈

전통음악리론연구원(교수) 김남호선생의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지나온 한생을 돌이켜보노라니 만족스럽게 생각되는 일은 별로 없고 그저 후회만 가득 쌓인듯한 느낌이다. 남이 하는 일은 다 하고싶었고 맡은 일이거나 맡겨진 일도 다 잘해보려고 불철주야 바삐 돌아쳤지만 어느 하나 그렇다 하게 만족스러운 성공을 보지 못한 나머지 오늘에야 비로소 ‘다재가 무재’라는 말이 얼마나 지당한가를 가슴깊이 느낀다.

인생은 짧고도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하나라도 파고들면서 충실하게 일해왔더라면 후세에 더 많은 소중한것들을 남겨놓을수 있었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한것이 가슴아프다. 그래서 후회막급이나마 엉뚱한 생각을 굴려보군 한다. 만약 젊음을 다시 찾을수 있다면 한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파고들면서 사심없이, 거짓없이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정열적으로 보내리라고!”

팔순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우리 민족 전통예술의 발굴과 발전을 위해 석양빛을 눈부시게 수놓아가고있는 김남호선생, 말과 같이 맡은 일이거나 맡겨진 일도 다 잘해보려고 불철주야 바삐 돌아쳐온 그의 한생은 굽이굽이에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반짝반짝 빛을 뿌리고있다.

강릉김씨 39대 후손으로 1934년 6월 7일에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호산동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난 김남호선생에겐 우로 누님 세분과 아래로 누이동생 하나가 있었다. 그의 3명 누님들은 모두 총명하여 마을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며 자랐으나 궁핍한 생활때문에 누구도 공부를 못했다. 그의 큰누님 김천금은 일자무식임에도 해방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의원으로 추대되였다.

김남호가 7살이 되던 해 즉 1940년 섣달에 그의 부모는 이미 출가한 두 딸을 고향에 두고 셋째딸과 김남호 그리고 막내딸을 데리고 도문강을 건너 지금의 룡정시 광신향 유신촌 유신평에 정착, 지주집의 소작농생활을 시작하였다. 웃마을 동가툰에 있는 국립 우급유신학교에 입학한 김남호는 소학교시절부터 붓글씨를 쓰고 그림그리기에 재질이 있어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벼루돌 하나를 갖추어주었다. 다른 애들에게는 별로 없는 소중한것이라 그는 매일 그 무거운것을 책보에 싸가지고 다녔다.

당시 나어린 김남호는 어쩌다 농한기나 명절때면 마을사람들이 황씨성을 가진 야장간집에 모여 퉁소를 불고 해금을 켜며 북장단에 맞추어 즐기는 민속놀이가 그처럼 신기했다. 긴 참대통과 나무통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그리도 듣기 좋고 신기해서 다가가 만져보군 하였다. 마을에서 이런 놀이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소리를 한마디 넘기라고 권고하군 하였다.

어릴적 서당에서 구학을 익혀 학식이 있는 분으로 존경받던 아버지, 마을사람들의 권고에 못이겨 한두마디씩 넘기시던 그 소리 《노래가락》, 《성주풀이》, 《춘향가》 등은 남호의 동심에 민족전통음악감정의 뿌리를 박아주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부친의 소리는 “3.1”운동시기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한것때문에 왜놈들의 추격을 받게 되자 10여년을 로씨야 연해주 등지로 피신해다니던 나날 나라잃은 설음에 한탄의 소리를 부르며 배운것이였다.

1946년에 룡정에 있던 6개 중학교가 합병되여 룡정련합중학교로 되였다. 1947년에 김남호는 룡정련합중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때 그는 음악교원인 리우석, 라혜주 선생이 지도한 학교합창대에도 참가하였고 겨울방학이면 아래웃마을의 중학생들로 조직된 문예대에 들어가 지주, 부농 청산운동과 토지개혁을 반영한 연극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였는데 그의 예술생애의 기초와 흥취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룡정련합중학교를 졸업한후 1951년 1월에 김남호는 길림성농림청 림업문예선전대에 갔다가 그해 4월에 영길현 강밀봉구조선족완전소학교 미술교원으로 들어갔고 그해 7월에는 지금의 길림시 다툰 리가조선족완전소학교에 가서 음악교편을 잡았다. 그때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배워줄수 있는 동요가 매우 적었다. 부를 노래란 구두로 전해지는 항일가요거나 국내해방전쟁시에 창작된 몇가지 대중가요뿐이였다. 아이들에게 무슨 노래를 배워줄것인가?

그때 그가 아는 노래라야 《하루가 기다(봄이 왔다)》, 《유야께 고야께(저녁노을)》와 같은 일본노래와 조선족전래동요뿐이였다. 노래를 지으려면 가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 학교에는 가사를 써본 선생이 없었고 곡도 쓰는 방법을 몰랐다. 그저 이미 알고있는 동요처럼 아이들의 음역에 맞게 단순한 정서로 가사와 곡을 써서 아이들에게 배워주어 행진하며 부르도록 하였다. 동요 《발맞추어 앞으로》는 이렇게 창작되였다.

1954년, 교원의 자질을 제고해야 한다는 교육행정부문의 지시정신에 따라 김남호는 선참으로 자보, 그해 7월에 연변사범학교(당시 사도학교라고 불렀음)에 추천되여 중사반에서 학습하게 되였다. 학습에서 그는 문화과나 수리과에서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우등생이였을뿐만아니라 음악, 미술, 체육 등 예능과에서는 재질이 돌출하여 과임선생님들이 과대표로 그를 쟁탈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그는 허세록선생에게서 기본악리를, 라혜주선생에게서 성악을, 김종화선생에게서 과외로 가요창작의 기초지식을 배워 그후 자신의 예술실천가운에서 자습할수 있으며 창작할수 있는 좋은 기초를 닦았다. 1957년에 연길시에 있는 신문보도기관에서 문자편집일군을 모집했는데 당시 김찬해교장은 문화교원 김례삼선생과 상론하고 김남호를 연변인민방송국에 추천하기로 했다.

연변인민방송국에 가서 그는 선후로 정치교연조와 신문보도조, 지금의 연변라지오TV신문의 전신인 《방송신문》에서 문자편집과 기자사업을 하는 몇년간 시종 과외로 동요창작을 견지하였다. 1958년 1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노래집》(20집)에는 그가 연변사범학교에서 체육을 전공하며 직접 작사, 작곡한 《젊은 운동원행진곡》과 《도랑물》(남춘우 작사), 《꼬마폭포》(윤길수 작사)가 실렸는데 이 노래들은 그때 연변인민방송에서도 방송되였다.

김남호의 초기음악창작은 주로 소년아동가요였다. 1958년에 창작되여 방송이나 출판된 동요들로는 《꼬마저금통》, 《병아리》, 《버섯》 등 수십수에 달했다. 1961년에 연변가무단에 전근되여 행정후근사업을 하는 기간에도 그는 과외창작을 견지하여 동요 《호림방화선전대》, 《나는나는 꼬마화가》, 《새중국의 꽃봉오리》, 대중가요 《민병행진곡》, 《청춘의 자랑》 등을 작곡하였다.

1962년, 김남호는 연변가무단의 파견으로 개산툰팔프공장 공회구락부에 가서 공장의 예술지도사업을 하게 되였는데 자치주창립 10돐기념문예프로를 만드느라 낮에 밤을 이어가며 사업했다. 프로가운데는 그가 창작한 4부대합창 《제지공의 노래》도 있었는데 합창대가 80명, 악대가 40명이나 되였다. 프로가 한창 익어갈 때 연길의 집에서 아버지가 몹시 앓으니 속히 오라는 전화가 왔다. 하지만 그는 떠날수 없었다. 그가 없으면 합창지휘며 무용반주를 제대로 할수 없었다. 바로 그 이튿날인 9월 1일에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 외동아들을 보지 못하고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황천길을 떠난 아버지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후에 모아산자락에 자리잡은 봉긋한 무덤앞에서 두무릎을 꿇고앉은 김남호는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아버지께 량해를 빌고 또 빌었다.

1963년 5월에 연길현문화관(지금의 룡정시문화관)에 전근되여 농촌하향이 잦아진 그는 어느날 늘 하향길에서 함께 사업하는 문학보도원 한원국선생에게 풍년을 제재로 가사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때 농촌에는 차가 다니지 않았으므로 몇십리쯤은 당날에 걸어다녔다. 걷다가 배고프면 마을의 공소사에 들려 한개에 10전씩 하는 명태에 월병 둬개를 먹고 또 걸었다. 결국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걸어가는 길가의 산언덕에서 《해란강반에 풍년이 들었소》의 가사와 곡이 창작되였다.

1965년에 김남호는 연길현문공단에 전근되여 극단의 연출을 책임지고 악대지휘도 맡아하였다. 그는 극단을 민족전통예술에 뿌리를 깊이 박은 예술단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질제고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태양향에 있는 민간예인 조종주를 찾아가 그 집에 묵으면서 서도소리 《수심가》, 《장단타령》 등 민족풍격이 짙은 민요들을 학습하였으며 극단의 민족악대와 민족성악을 춰세우기에 힘을 기울이면서 민족성이 짙은 음악작품을 창작하기에 공력을 들였다.

바로 그가 드높은 열정으로 사업에 몰두하고있을 때 “낡은것을 타파하고 새것을 수립한다”는 회오리바람과 함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였다. 그는 민족풍격이 짙은 많은 “독초”를 썼다는 리유로 소위 “자산계급학술권위”, “복고주의”, “잡귀신”이라는 모자를 쓰고 대자보에까지 오르며 비판도 받았다. 그때 그는 극좌적로선의 영향하에 어록가요들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는데 그중 남녀2인창 《모주석은 우리 마음속의 붉은 태양》은 상해 레코트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였으며 연변방송에서도 자주 나왔다.

문화대혁명의 중기에 이르러 문화예술부문이 해체되면서 많은 간부와 지식인, 예술인들이 농촌과 공장에 밀려가 소위 “신형의 농민”이 될 때 연변인쇄공장 로동인사일군이 그를 찾아와 자기네 공장으로 오라는것이였다. 이리하여 그는 1969년에 연변인쇄공장에 전근되여 교인차간에서 그림분색촬영, 도안설계, 붓글씨쓰기를 하면서 공장의 모택동사상선전대를 조직, 지도하며 작품도 썼다. 그때 그가 창작한 노래들로는 《각국인민 붉은 태양 따르네》, 《찬란한 빛발 변강을 비추네》 등 모주석의 혁명로선을 가송하는 작품들이였다.

1973년에 김남호는 연변군중예술관이 회복되자 초청에 의해 그곳에 전근되였다. 연변군중예술관에서 사업하는 기간 그는 선후로 《공농병문예》, 《군중예술》, 《해란강》 등 공연자료의 음악편집을 하는 한편 간행물의 사보, 미술설계, 삽도를 거의 혼자 도맡아하였으며 예술보도주임으로 있으면서 주내 8개 현, 시 문화관의 실무지도 등으로 해마다 200여일씩 기층에 내려가 점을 잡고 문화예술창작활동을 조직, 지도하느라 휴가일이 따로 없이 뛰여다녔다.

70년대 중기에 이르러 그는 문화국과 연변군중예술관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구연예술에 조예가 깊은 최수봉선생을 모시고 안계린 등 음악일군들과 함께 중국조선족구연예술의 새 극종인 《창담》을 창설하였으며 당시 연변군중예술관의 관장이였던 김덕균의 지지하에 주내에서 처음으로 손익을 자체로 책임지는 예술단체 해란강구연단을 창설하여 단장책임을 맡고 연변을 비롯한 동북3성의 조선족이 집중된 도시와 향촌을 누비며 조선족구연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땀동이를 쏟는 한편 많은 악사와 가수, 구연배우를 양성해냈다.

그의 헌신적인 사업열정과 취득한 성과는 연변군중예술관 지도부의 한결같은 긍정을 받았는바 1987년도에 연변군중예술관은 당지부와 행정사업계획에 “10여년을 하루와 같이 부지런히 사업해온 김남호동지의 황소정신을 따라배우자”는 조목까지 써넣었다.

1951년에 음악교원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김남호선생은 《춤의 고향 노래의 고향》, 《꽃상점아가씨》 등 700여수의 작품을 창작하였을뿐만아니라 중국조선족민요, 판소리, 창극, 력사가요 등 200여수를 수집, 정리하였고 《길림조선족민간음악략술》, 《중국조선족민요의 민속성 고찰》, 《중국에서의 창극의 연변》 등 100여편의 론문을 국제, 국내 학술회의 및 간행물에 발표하였다.

또한 작곡집으로 《김남호작곡집》, 《우리 마을 보배산》, 론문집으로 《중국조선족민간음악연구》, 《중국민간가곡집성ㅡ길림권》(한문, 공저), 《중국희곡음악집성ㅡ길림권》(한문, 공저), 《중국구연음악집성ㅡ길림권》(한문, 공저), 《중국연구지ㅡ길림권》(심사위원, 한문, 공저), 《20세기중국조선족음악문화》(공저) 등 다수를 출판하였다. 이밖에 군중문화사업에 종사해온 30여년간 그는 해마다 단위의 선진사업일군으로 당선되였으며 1987년에는 길림성문화청과 연변주문화국으로부터 선진사업일군, 전 주 문화계통우수공산당원 칭호를 수여받았고 주문화국의 당대표대회의 대표로 당선되기도 했다.

1995년에 정년퇴직한후에도 김남호선생은 우리 민족 전통예술사업을 위해 로심초사해왔는바 팔순에 가까운 현재에도 그는 연변로교수협회 전통음악연구소 소장, 연변문련 민간문예가협회 고문, 시조창연구소 총고문, 국가비물질문화유산 연변전문가소조 성원 등 직을 맡고 황혼기의 노을을 찬란하게 불태우고있다.

특히 로년에 들어서면서 경추병으로 고생이 막심한 김남호선생은 경추견인기를 목에 두르고 공기를 압축해넣어 지끈지끈 몰려오는 동통을 달래면서도 남들의 초청으로 맡은 사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99년 7월의 장춘은 연길보다 무더웠다. 당시 《중국연구지ㅡ길림권》의 심열회의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김남호선생은 가슴이 침침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슬그머니 자기 침실에 들어가 누웠다. 갑자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연변에서 온 김남호선생이 까무라쳤다!” 누군가 복도에서 소리쳤다. 그러자 북경에서 온 《중국연구지》 총부의 지도자들과 길림성집성판공실 지도자들이 그의 침실로 달려왔다. 그와 함께 회의에 간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의 전병칠주임은 낯이 새까매서 달려왔다. 마침 대회에 배치된 승용차가 대기중에 있어 김남호선생은 곧바로 병원에 호송되였다.

CT결과 엄중한 경추병으로 인한 대뇌산소공급부족이였다. 주사를 맞고 잠시 휴식을 취한 김남호선생은 다시 회의장소에 나타났다. 먼저 연길로 돌아가는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그는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마지막날까지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를 마치고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그는 전병칠주임을 보며 “나두 죽는줄 알았소. 그런데 염라대왕이 나를 보더니 ‘남호야, 너는 아직 하던 일을 채 못했으니 그 일들을 다 마무리하구 오너라’고 하더구만”라고 유모아적으로 말하며 소탈하게 웃었다.

김남호선생의 사업열정이 황소정신이라고 한다면 그의 고집 또한 누구도 꺾을수 없는 황소고집이였다. 1999년의 일이였다. 《중국구연음악집성》 총부는 《중국구연음악집성ㅡ길림권》을 심사하면서 조선반도지명이 들어간 조선족판소리의 10여개 단락들을 빼버리기로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 참가한 김남호선생이 여러번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주견을 세웠으나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연변에 돌아온 그는 주문화국 지도부에 청시하고 곧 연변음악전문가들로 좌담회를 조직하여 주문화국과 연변음악가협회,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의 이름으로 월경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문화배경을 밝히면서 실사구시원칙으로 중국조선족의 전통음악을 대해야 한다는 “의견”을 《중국구연음악집성》 총부에 바침으로써 총부로 하여금 “의견”을 받아들여 빼버리기로 했던 판소리단락들을 다시 보충해넣게 했다.

물론 김남호선생이 이룩한 모든 성과는 가정일을 전적으로 부담한 부인 윤금숙녀사의 공로와 갈라놓을수 없다. 당시 연길시조선족비단공장 로동자였던 윤금숙녀사와 지인의 소개로 만나 1959년 12월 26일에 결혼식을 올린 김남호선생은 사업차로 늘 밖에 나가 돌다보니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안해 윤금숙녀사의 몫으로 떨어졌다.

남편의 사업을 적극 지지하며 묵묵히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해온 윤금숙녀사는 거의 혼자힘으로 슬하의 네 자녀(딸 셋, 아들 하나)를 어엿하게 키워왔다. 아버지의 예술기량을 물려받아서일가, 네 자녀중 맏딸 김춘녀는 음악교원사업을 하다가 현재 자신의 사업을 벌려나가고있고 “콩새”로 널리 알려진 셋째딸 김홍옥은 연변구연계에서 관중들의 사랑을 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특히 첫돌이 되기전부터 말을 하여 “콩새”라고 불리운 김홍옥은 김남호선생이 해란강예술단 단장으로 사업하던 당시 늘 가만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배우들이 련습하는것을 보고 흉내내군 하였는데 어느날 한성후연출과 강동춘부연출이 그의 재주를 발견하고 추천하여 예술무대에 나서게 된것이였다. 연변에서 “콩새”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던 김홍옥이 자기사업을 벌리며 예술과 차츰 멀어지게 되자 김남호선생은 “자기 출로는 스스로 결정하라고 본인에게 결정권을 맡겼지만 아직도 홍옥이가 계속 예술을 했으면 좋겠다”고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다.

팔순에 가까운 고령에도 우리 민족 전통예술의 발굴과 발전을 위해 심지에 정을 부어 황혼불꽃을 태우고있는 김남호선생은 “우리 민족의 예술은 정상적인 발전을 가져오고있으나 전통음악은 홀시되고있다”며 “타민족의 음악이 전통을 계승하고있는 반면 조선족전통음악은 발굴은 했지만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전통예술을 끌고나가는 대오가 있어야 하는바 그것도 전업대오여야지 과외대오로는 안된다”며 “1962년도에 연길시신창극실험극단이 해체된 뒤로 판소리, 창극 등 전통예술이 사라졌다. 다른 지구에는 연구소가 다 있어 저들의 지방극을 살리고있지만 연변에는 그런 연구소도 없어 전통예술이 말살될 위기에 직면했다. 또 전통예술을 창작해도 공연할 장소가 없는것이 문제다. 텔레비죤 음력설야회에서나 가끔 볼수 있을것이 아니라 전문방송프로가 있어야 한다”고 견해를 피력했다.

연변가무단의 초빙으로 우리 민족의 판소리를 국가비물질문화유산에 올리고저 자료를 작성하여 현재 길림성의 비준을 얻고 국가급의 비준을 기다리는 등 우리 민족의 전통음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있는 김남호선생이 최근에 집필한 100만자에 달하는 《20세기 중국조선민족전통음악 대중음악론》은 이미 4차 교정을 완성, 올해안으로 한국민속원에 의해 출판될 예정이다.

우리 민족 전통음악의 발전을 위해 코기러기로 뛰고있는 김남호선생의 정성을 헤아려 앞으로 많은 지인들이 동참함으로써 판소리, 창극 등 조선족전통음악이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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