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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매돌의 이야기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4.07.17일 09:13
지난 세기 40년대 돈화시 액목진은 도막나무로 불 때고 이밥을 먹는 좋은 곳이라 소문이 나서 많은 이민들이 모여왔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도 정든 고향을 등지고 이곳에 정착했었는데 알고보니 개간지였다. 일도 힘들고 일제놈들의 압박과 착취가 심했으며 그곳 토배기들의 업수임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다행히 손재간이 많은 아버지가 정으로 돌을 쪼아 손매돌을 만들었기에 우리는 생계를 유지할수 있었다. 그때로부터 매돌은 우리 집 명줄과 같았다.

식량이 모자랄 때 매돌로 콩을 갈아 산나물과 함께 콩죽을 쑤어 주린 배를 달랬고 옥수수를 가루내여 산나물과 함께 푸대죽을 쑤어 끼니를 때웠다. 그러다 전염병이 무섭게 돌자 이대로 있다가는 자식들을 다 잃을것 같아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시 외지로 떠나지 못한다는 금지령을 어기고 매돌만 지닌채 네자식을 거느리고 200여리 길을 걸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당장 먹을것부터 큰 걱정이였다. 다행히 인심 좋은 고향이라 마을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온 우리에게 보리쌀과 콩을 갖다주어 주린 배를 달랠수 있었다. 그후에 어머니는 두부를 앗았다. 그때는 콩으로 두부를 바꾸는 시기였는데 이웃들이 품값까지 푼푼히 주었기에 두부장사가 잘되였다.

그때로부터 어머니는 10년 동안 손매돌로 두부장사를 했다. 그런데 큰형님으로부터 나까지 모두 매일아침 일찍 일어나 륜번으로 어머니를 도와 매돌과 씨름해야 했다. 나는 나이가 너무 어려 무릎을 꿇고 매돌을 돌려야 했다. 구들에 구름노전을 깔았는데 매돌질을 다하고나면 무릎이 벗겨졌다. 하지만 자식을 위해 매일 20여근이나 되는 콩을 손매돌질하는 어머니앞에서 차마 아프다는 말을 할수 없었다.

지난 50―60년대에 호조조로부터 인민공사로 넘어가면서 집체로 농사를 지은데다 3년 재해까지 들어 생활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7남매인 우리 집 생활형편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당시 한학기에 4원 50전씩 하는 학비를 준비하는것도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힘겨운 일이였다. 우리 형제는 이웃들이 입던 옷을 입고 이웃들이 버린 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해마다 오동지 섣달 강추위도 마다하고 목재부업을 다녔고 어머니는 많지 않은 식량을 매돌에 갈아 죽을 쑤어 생계를 유지했다.

남자 여섯명에 녀자 한명인 우리 형제는 생산대에서 주는 식량으로 근본 배를 불릴수 없었다. 집체식당에서 죽이라도 타오면 철 모르는 동생들은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하여 어머니는 멀건 죽물도 드시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하루는 형님이 기발한 생각을 했다. 쥐굴을 들춰서 식량을 조금이나마 보태자는것이였다. 나는 두손 들어 찬성하고 형님과 함께 삽을 들고 들로 나갔다. 논뚝을 뚜지고 밭이랑을 번지며 신나게 쥐굴을 팠다. 쥐들은 묘하게《창고》를 파고 물어온 곡물이 다 차면 꼭 벼이삭을 가로놓는 습관이 있다. 땀을 흘리며 파고 또 파느라면 하루에 6~8근의 벼이삭과 콩을 수확해낼수 있었다. 쥐굴에서 파낸 곡물을 먹으면 쥐병에 걸린다는것을 후에야 알았지만 그 세월에는 알았더라도 먹었을것이다. 어머니는 쥐콩을 파오면 물에 불궜다가 매돌에 갈아 남새뿌리와 시래기를 넣어 콩죽을 쒀주었다. 우리는 자기의 힘으로 얻은 콩이여서 희열을 느꼈고 어머니의 알뜰한 솜씨와 사랑이 슴배인 콩죽이여서 배를 두드리며 맛있게 먹었다. 마치 생일이라도 쇠는듯했다.

그런데 하루는 생산대장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쥐굴을 파면서 논뚝을 허물어놓을수 있으니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그도 그럴것이 논뚝을 허물어놓으면 이듬해 다시 논뚝을 감아야 했기에 식량 고생으로 신체가 허약한 농민들에게는 큰 고역이였다.

《쥐굴이라도 들춰야 죽이라도 먹지요.》

우리의 대답에 생산대장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후부터 우리는 도적처럼 가만가만 쥐굴을 들춰 굶주림을 달랬다. 비록 하루 세끼 멀건 죽을 먹었지만 우리 형제는 그래도 튼튼하게 자랐다. 매돌은 이렇게 우리 온 집식구와 함께 대식품세월을 용케 지내왔다.

그후 식량난 고비는 넘겼지만 두부를 할 때면 그래도 매돌을 돌렸다. 1969년 내가 결혼하여 세간나게 되자 어머니는 몇십년 동안 손때 묻은 매돌을 주었다. 어머니가 매돌을 돌려 자식들의 주린 배를 달래주었다면 안해는 매돌을 돌려 나의 사업과 자식들의 공부뒤바라지를 해주었다.

남의 외양간을 빌어 세간난 우리 전부의 가장집물은 매돌 하나, 가마 두짝, 물독 하나, 사발 몆개였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굳은 신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1979년 나는 조직의 수요로 시골학교에 전근되였다. 그러자 제일 큰 곤난이 중학교를 다니는 두 자식의 공부 뒤바라지였다. 그땐 중학생은 반드시 숙사에 들어야 했다. 게다가 기숙생은 달마다 입쌀 36근, 현금 12원을 내야 했다. 헌데 우리 집 네 식구의 한달 식량은 고작 입쌀 8근, 밀가루 2근외에 나머지는 옥수수쌀과 옥수수가루였다. 그때 나의 로임이 48원이였지만 내가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통신학습까지 하다나니 정말 푼돈도 쪼개 써야 했다.

안해는 암퇘지 2마리와 닭 40여마리를 길렀으며 콩을 먼저 선대하여 두부장사를 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매돌은 5년 동안 하루도 안해의 손을 떠나본적이 없었다. 안해는 정말 황소처럼 일했다. 허리 펼 새도 없이 일한 안해의 손은 소나무껍질처럼 터실터실했고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 하지만 안해는 남편과 애들이 잘해주니 힘든줄 모르겠다고 그저 웃어만 주었다. 그사이 나는 교장으로 승급했고 두 자식도 공부를 잘해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중등전문학교와 대학에 입학했다.

경제상에서 좀 여유가 생기자 안해는 700원을 주고 콩 가는 기계를 샀다. 그러다보니 매돌도 한구석을 지키게 되였다. 2년후 안해는 두부장사를 그만두었는데 오히려 한구석에서 외면 당했던 매돌이 용처가 있게 되였다. 반가운 손님이 오거나 생일때면 안해는 무조건 매돌을 돌려 두부를 앗았다. 내 생일이면 형제, 조카들이 모이는데 누구나 조금씩 매돌을 돌려보며 옛추억을 되새기며 이미 세상을 뜨신 아버지, 어머니를 그렸다…

시골학교여서 도시와는 달리 식당으로 갈수 없기에 나는 반가운 손님이 올 때마다 꼭 매돌을 돌려 초두부나 두부를 앗았다. 손님들이 두부맛이 별맛이라며 칭찬할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매돌에 깃든 어머니와 안해의 정성을 이야기했다.

우리 집 매돌도 이제 50여년의 경력을 가지고있다. 그사이 어머니와 안해의 손끝에서 닳고닳아 25근좌우 되던 매돌이 20여근으로 작아졌다. 5섯근이나 줄어든 매돌의 무게에는 어머니와 안해가 엮은 많고많은 이야기가 슴배여있다. 지금 우리는 생활이 펴이여 새집을 덩실하게 지어놓고 가정용전기기구도 구전히 갖춰놓았으며 세상에 부러움 없이 살고있다. 과거의 쪼들렸던 생활은 이미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매돌이 엮어놓은 아름다운 이야기만은 영원히 기억속에 남아있을것이다.

/장형순

편집/기자: [ 리영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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