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 상경계열을 높은 학점으로 졸업한 오모(27)씨에게 인생 최대 고비는 취업 준비를 하면서 찾아왔다. 남부럽지 않은 외국어 성적, 인턴, 대외활동까지 뛰어난 ‘스펙’을 가진 그였지만 지난해부터 번번이 ‘서류전형’에서부터 고배를 마셨다. 이유는 하나, 글쓰기였다.
회사 한 곳에 지원할 때마다 자기소개서를 비롯해 수천 자에 달하는 ‘글’을 써야 했다. 노트북 화면 위의 빈 항목들을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밤 새워 완성한 자기소개서를 글 깨나 쓴다는 친구들을 쫓아다니면서 수정하고, 대학 경력개발센터의 멘토링도 받아봤지만 좀처럼 합격 소식은 날아들지 않았다. 결국 오씨는 지난 9월 하반기 대기업 공채를 앞두고 온라인 대필 업체에 자기소개서를 의뢰했다. A4용지 2장 분량의 소개서 한 부에 7만원을 줬다.
김모(31)씨는 지난 5월 500일 기념일을 맞아 여자친구에게 연애편지를 건넸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500일간의 애정이 담긴 편지를 받아든 여자친구는 울음을 터뜨렸다. 편지는 김씨가 온라인 ‘재능마켓’에서 1만원에 주문한 편지였다. 김씨는 필요한 추억을 정리해 보냈고 이는 타인의 손을 거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문장으로 탄생했다. 김씨는 온라인으로 받은 본문을 손으로 옮겨 적어 편지를 완성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정모(31)씨는 올해 초 2년 가까이 언어영역 과외를 했던 학생의 대입 자기소개서를 대신 썼다. 기본적인 내용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아 3∼4개 문항 전체를 재창작했다. 명문대에 합격한 학생 부모님은 두세 달 과외비에 버금가는 금일봉을 정씨에게 건넸다.
1897년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벨주락’에선 사랑하는 여인 록산느에게 고백할 용기가 없는 검객 시라노가 등장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또 다른 청년 귀족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연애편지를 쓰며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과거의 ‘대필’은 대부분 연애편지에서나 등장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 ‘대필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자서전, 논문, 편지를 넘어 학업계획서, 사업계획서, 탄원서, 투자제안서, 이혼진술서 등 대필의 대상은 무한 확장 중이다. 전문 대필 작가와 ‘업체’까지 등장했다.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류철균 교수는 17일 “글쓰기 교육을 꾸준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스토리텔링이 강조되는 시대가 됐다”며 “대필이 각광받는 것은 사람들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생긴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