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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령기슭에 타오른 항일봉화(하)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7.14일 12:59
증조할머니가 만났던 김일성장군



국제88려시기 항일련군. 앞줄 오른쪽 두번째 사람이 김일성장군이다(1943.10.5).

지난 세기 30년대에 진입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9.18사변》이 발발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만지역에서 제일 먼저 항일무장투쟁이 펼쳐졌다.

1932년초 중공왕청현위는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옹성라즈회의정신을 시달하면서 군사부장 김명균에게 반일유격대를 설립하는 과업을 맡겼다. 김명균은 소왕청에서 군사골간회의를 거행하고 유격대인원확정문제, 간부선발, 무기탈취, 훈련과 자금마련 등을 구체적으로 토의하고 행동에 옮겼다.

《왕청유격대가 창건되였다》는 소식이 라자구에도 전해지자 민족항쟁의 로전통를 갖고있는 이 고장 조선족군중들은 즉시 돈이 있으면 돈을 모으고 쌀이 있으면 쌀을 내고 렵총이 있으면 렵총을 내놓았다. 할아버지 신용운은 이때 이미 항일투사로 성장하였는바 열혈청년들을 조직하여 용약 유격대에 가입시키였다. 당시 부모는 자식을, 갓 결혼한 녀성들도 남편을 무장유격대에 보내는 등 열의가 대단하였다.

태평촌당지부 서기 최호연은 한밤중에 신용운 등 가장 믿을만한 골간들을 모았다. 그들은 그 걸음으로 지주 호가네 집과 상함의 문가네 집을 급습하여 보총 2자루를 탈취하였다. 그외 며칠동안 선동사업을 조직하여 렵총 18자루를 쟁취하였다. 촌당지부는 마을의 꼴꼴한 청년 20여명을 무어 그 보총과 렵총을 메워서 왕청유격대에 보내 주었다.

1934년 6월 주보중이 령도한 항일무장과 김일성장군이 령솔한 동북인민혁명군주력부대가 삼도하자에 도착하였다.

당시 왕청현 동북부지역의 적들의 주요한 《토벌거점》으로 된 라자구에 진격하여 유격구역을 겹겹이 에워싼 놈들의 포위망에 돌파구를 열어놓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장군의 작전구상에 따라 인민혁명군 제2사 4, 5련대는 삼도하자와 사도하자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 즉시로 군민련환모임을 조직하였다. 군민 1500여명이 참가한 이 군민련환모임은 실상 라자구진공전의 승리를 위한 일종의 사상선동전, 사기진작을 위한 동원진군전이였다.

증조할머니(신용운의 어머니)는 처음으로 김일성장군의 름름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다. 김일성장군은 증조할머니와 마을의 어르신들이 인민혁명군을 뜨겁게 맞아준데 대해 연신 감사를 표시하였다. 증조할머니는 후날에도 김일성장군과 인사를 나누던 일, 김일성장군이 산천이 쩡쩡 울릴듯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연설하던 그날의 그 광경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고 그때 말만 나오면 몹시 기뻐하고 흥분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시군 하였다.

가렬처절하였던 라자구공격전

련환모임이 끝나자 삼도하자 리태경로인의 집마당에서 라자구공격전 작전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수녕반일동맹군, 라자구일대의 반일무장 사충항, 공헌영, 시세영, 리산협 등 항일명장들이 출석하였다. 당시 리태경로인은 항일의병, 독립군경력의 소유자로서 회의에 참가하였는데 김일성장군이 펼쳐놓은 라자구시가지략도가 바람에 펄럭인다고 매끈한 차돌을 지질러놓았다.

지금도 조선의 수도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는 그 복돌이 소장되여 수많은 사연을 말해주면서 후대양성의 견증물이 되고있다. 리태경로인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아들에게 이 돌을 넘겨주면서 《이 돌은 김일성장군이 작전지도우에 놓고서 만지던 돌인데 잘 간수하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1959년 이 복돌은 조선에서 온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에 입수되여 조선에 건너갔다.

김일성장군은 회의후 그 즉시로 항일구국군 등 600여명으로 구성된 련합부대를 인솔하여 라자구에 둥지를 튼 위만군을 들이치는 작전을 펼치였다. 련합부대는 적들을 유인하여 성밖에 끌어내다 일거에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당시 위만군의 두목 문영장도 부근의 소속부대 500명을 집결시키고서 참호를 파고 포태를 쌓고 요충지를 장악하고서 결사항전을 시도하였다.

6월 26일, 전투가 시작되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부대는 부락서켠의 평지에 매복하고서 사충항, 시제영 부대는 동쪽에서 우회습격하면서 적들을 유인하여 습격하였다. 놈들은 타격을 입고 라자구 시가지로 후퇴하면서 30여명의 시체와 보총 40여자루를 팽개치였다.

인민혁명군과 련합부대는 밤낮 4일간의 격전을 거쳐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큰소리 치던 서산포태와 박격포진지를 점령하고 시가전을 벌여 위만군의 영부도 점령하였다. 위만군 문영장이 하는수 없이 투항의향을 비치면서 동요하는 시각에 적들의 증원부대가 도착하여 부득불 퇴각하였다. 하지만 라자구진공전은 7주야의 격전을 거쳐 적들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고 수많은 적들을 살상, 포로하였으며 각종 무기와 군수물자도 적지 않게 로획하였다. 라자구진공전은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는데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출귀몰한 용약유격대

나의 할머니(최정애, 당시 14세)는 1930년 12월에 할아버지 신춘남과 결혼하면서 신씨집안의 며느리로 되였다. 그분이 생전에 들려준데 의하면 1930년 전아무개라는분이 라자구에 와서 지하활동을 하면서 라자구지하당조직을 설립하였는데 그 산하에 하동촌과 태평촌에 두개 당지부가 세워졌다고 한다.



가족사진. 앞줄 왼쪽으로부터 세번째 사람이 최정애.

당시 할머니(최정애)의 시어머니인 증조할머니는 전아무개 등 7명과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증조할머니도 태평촌당지부의 일원였다고 한다.

할머니 최정애는 남편 신춘남의 뒤바라지를 열심히 하였다. 당시 신춘남은 이 지방의 농민협회 지방사업(農民協會농회장)을 하면서 끌끌한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청년단을 조직하여 함께 농사를 짓는 한편 군사리론을 학습하고 총, 검술, 권투 등 군사훈련도 하고 민족교양도 하였다.

할아버지 신춘남은 그외에도 자기의 실전경험에서 얻은 묘기들을 전우들에게 가르쳐주어 로련한 전투원으로 양성하면서 혁명선렬들의 얼이 담긴 이 땅에서 혁명전통을 이어갔다. 추수운동시에는 청년단을 이끌고 지주에게 바치던 7할 세금을 4-5할로 낮추는데 앞장서 지방군중들을 지지를 받았다. 그는 무장조직을 건립할 모든 준비을 마무리하고 상급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라자구 지하당구위에서 유격대의 설립을 선포하자 신춘남은 그 즉시에 유격대에 가입하였다. 당시 유격대의 이름을 용약유격대라고 하였다.

그처럼 어려운 나날에 신춘남과 대원들은 남다른 큰일을 한다는 긍지로 하여 항상 고달픈 환경에서도 가슴이 뿌듯하였다. 신춘남은 유격대원들과 함께 지내하면서 태평구 마을뒤 나루터에서 물놀이도 하고 산마루에 치달아 오르면서 체력도 올리고 지형지물을 리용한 근거리전투훈련도 하였다. 그들은 또 가까운 자기 집에 유격대원들을 데려와 류숙시키기도 하였다. 이럴 때면 할머니(최정애)는 남편과 유격대원들의 수자에 맞추어 목침을 만들어 휴식을 취하게 하고 물레방아옆, 마름돌(곡식을 널어 말리는 두개의 넙죽한 돌]에 방아를 찧어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고 한다.

지금도 태평골에는 이 돌이 있는데 큰 돌은 너비 4.5뼘이 되고 길이는 4뼘이 된다. 작은 돌은 그보다 좀 작은 제형모양이다. 이들은 산천어를 나무배때리(대야)에 한가득 잡아다 천렵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항일투쟁의 수요에 따라 유격대원들은 모두 자기의 이름을 바꾸었다. 할아버지의 이름도 신춘남으로부터 신룡운으로 개명되였다. 할머니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그냥 《룡운》이라고 불리거나 때론 《김룡운》으로 불리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태평령에 용약유격대가 나타났다!》

《용약유격대가 지난 밤 하동촌에서 자고 갔단다!》

신출귀몰하는 용약유격대는 라자구일대에 널리 소문을 내면서 백성들의 인심을 고무하였다.



할머니의 환갑잔치의 한 장면(술병을 든 사람이 저자 신명수).

당시 라자구시내 동산기슭에서 하동촌을 지나 태평구 동산기슭에 와 닿는 동쪽길이 있었는데 라자구지역 하동촌지하조직과 태평구조직을의 련결하는 길이였다. 서쪽(산)길은 태평구 마을뒤 나루터에서 물레방아골 뒤산 밭길을 따라 신풍촌에 이르고 거기서 서북방향으로 태평령에 이르는 소로였다. 그외에도 신풍촌의 뒤산을 넘어 서함촌과 금성촌에 이르는 오솔길이 있었고 거기서 계속해 고개 넘어 서쪽으로 서하촌으로 가는 소로와 비행장을 지나 라자구시내와 삼도하자에 이르는 소로가 있었다. 그때 항일유격전사들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 이런 산골짜기나 강기슭에 난 산간의 오솔길을 리용해 통신임무를 완성하고 유격임무와 전략적이동을 하였다.

이 고장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이런 골짜기를 《공산당골(지하공작인원들이 전문 다니는 골짜기)》이라 부르고 령마루는 《유격대령》이라고 즐겨 부른다.

이처럼 라자구지역의 산과 골짜기와 벌에는 우리 민족의 가렬처절했던 항쟁의 순간순간들이 고즈넉이 깃들어져 있으며 그러한 사연들을 가슴에 묻은 태평령은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있다.

(나의 할아버지 신룡운은 증조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학교를 3년밖에 다니지 못했으며 12살부터 어머니를 도와 12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항일활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 12월에 할머니를 만나 결혼하였지만 신혼생활 2개월만에 항일활동에 참가했다는 죄목으로 군벌에 체포되여 연길감옥에 가서 3년반동안 갇혀있어야 했다.

연길감옥에서 반제동맹조직에 참가한 할아버지는 1934년 7월에 석방되여 반일청년회에 참가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반일활동에 뛰여들었다. 1936년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부득불 반일회가 해산되였지만 일제에 귀순하지 않았다.

1942년부터 툰에서 보장일을 하였지만 로임은 받지 않았다. 1945년 툰의 서기사업과 민주동맹지부장사업을 맡았다. 1946년에는 향장, 농회장사업을 하다가 구의 토개공작대에 참가하여 2년간 농촌을 전전했다. 1948년 상함촌 촌주임사업을 하다가 연변당정간부학교에 가서 학습하고 라자구정부 민정조리원으로 사업하였다.

1949년 3월 24일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1월 15일에 상함촌에서 촌당지부서기사업을 하다가 감옥에서 얻은 심장병이 재발하여 1950년 9월 14일에 사망하였다.) -끝


글/사진 신명수 제공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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