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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우리 민족 영욕의 영원한 동반자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11.03일 08:33
작성자 : 장경률

  (흑룡강신문=하얼빈) 지구는 둥글다, 축구공도 둥글다, 그래서 축구공은 비록 작지만 온 세상을 품었다. 우리 민족은 축구공을 안고 이 세상에 군림하였다. 지금도 앞으로도 축구공 굴리면서 미래에로 미래에로 정진할것이다!

  우리 민족의 축구사는 우리 민족의 개척사와 동반

  축구, 모종의 의미에서 말하면 우리 민족은 축구공을 안고 이 땅에 강림하였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축구사는 실상 우리 민족의 개척사와 동반된다. 돌아 보면 지난 19세기 중엽 우리 민족은 조선반도의 특대기근에 쫓겨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동북대지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민족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화전농사를 지으면서도 자녀교육을 으뜸가는 대사로 간주하고 일단 동네를 이루어 정착하면 동시에 서당을 꾸리였다.

  20세기에 진입하면서 이런 서당은 근대신식학교로 발전, 1906년에 설립된 서전서숙 그 뒤를 이어 1908년부터 우후죽순마냥 우리 민족의 거의 모든 집거지에서 학교가 설립되였다. 명동학교, 정동학교, 창동학교, 광성학교 등 당시 명성이 큰 이런 학교들에서는 어문, 산수, 력사, 지리 등 일반과목을 가르치는 동시에 체육과 음악과도 설치하였는데 체육은 축구운동이 주요과목이였다.

  명동학교에서는 김약연교장의 지도하에 조선에서 온 축구교원들이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다. 연길 와룡동 창동학교에서는 로씨야 울리디보스또크에서 온 박문호교원이 축구를 가르쳤다. 화룡현 장동학교에서도 울리디보스또크에서 온 로상렬선생이 축구를 가르쳤다. 그때부터 명동학교와 장동학교는 해마다 두번씩 친선축구경기를 거행하였는데 연변 지역에서 축구운동의 신속한 보급을 추동하였다.

  우리 민족은 특수한 성격의 민족인바 당시 전 세계적인 특수성으로 하여 축구운동도 그 보급과 발전과정에 시종 강렬한 민족독립, 반일구국, 애족애향의 정신이 용해되고 반죽되였다.

  이제 그 실례를 보기로 하자. 전광하, 박용일의 합작으로 된 <<세월속의 용정>>에 기재된데 따르면 1912년 봄 룡정촌에서 약 5리되는 대교동에서 제1차간도학생운동회>>가 펼쳐지였다. 이번 학생운동회의 주요 종목이 축구경기였는데 명동학교 수백명학생들은 경기내내 시종 <<애국가>>를 합창하고 북치고 나팔을 불면서 응원하였다. 이에 대회에 참가한 여러 학교의 학생들과 관정들도 호흥흐여 <<애국가>>를 열창하였는데 그 분위기가 심히 장관이라 장렬하면서도 격정적이였다고 한다. 1913년 단오절을 경축하면서 명동학교 김약연교장은 국자가 창동사립학교를 비릇한 50여개 학교를 초청하여 체육운동회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런 운동회의 주요종목은 축구경기였다. 당시 명동촌은 조선족반일해방운동의 중심지이고 민족독립운동의 원지인 동시에 축구운동의 보급과 발전의 기지이고 중심지였다.

  축구대회, 반일 민족독립투쟁의 응집력 키워

  1917년 로시야 10월혁명의 포성과 조선 3.1운동의 영향이 연변 지역에도 강렬하게 파급되였다. 연변지역에서 반일투쟁의 사상적토대 조직적기초를 마련함에 있어서 농민협회, 반제동맹, 학우회, 국자가청년회, 동진청년회, 기양청년회, 약수동청년회 등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출범하였고 그들의 뉴대와 응집력결속의 주요형식이 축구운동의 보급과 조직, 지도였다. 1925년 간도체육회, 연길체육회가 결성되었다. 동흥중학, 은진중학 명동중학 등 학교들은 룡정에서 경상적으로 축구운동회를 거행하면서 민중의 반일사상을 불러일으켰다. 1925년 5월 간도제1차축구대회가 연길에서 거행되고 1926년 룡정동흥중학교축구팀은 조선제2차평양축구대회에 참가, 이는 사상처음으로 되는 출국방문축구경기였다.

  지난 세기초 가장 유명한 축구행사는 <<제동마을 축구대회>> 다시말하면 <<병인년 제동축구대회(丙寅年第洞足球大会)>>라 할수 있다. 당시의 력사기재(김재현 구술 송정현 정리)에 따르면 1926년 오늘날 룡정시 개산툰진 제동촌에서 성대한 축구대회가 펼쳐졌다.

  병인년 한식날 100여호가량 모여 사는 당시 화룡현 사광사 산간벽지 제동에서 축구대회를 거행하였는데 반제평화사상과 계몽운동을 주도한 <<동승회>>가 발기하고 주최하였다. 당시의 화룡현 삼개사, 사광사, 덕신사 등 여러 곳의 단체가 출전, 8개 팀이 3일간 진행하였는데 남녀로소 500여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모든 운동원은 대회접대부에서 안내하여 전촌에 류숙분배하였는데 하루 세때를 면비로 하였다. 제동에서는 돼지 두마리를 잡아 무대가로 공급하였고 외지구경군들에게도 무료로 식사를 푸짐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대회는 사광사의 우승으로 마무리되고 모든 대회비용은 제동에서 전부 책임졌다. 그때는 량식도 넉넉하여 <<쌀독에서 인심이 나온다>>는 속담이 그른데 없다고 깊은 인상을 남겼는바 우리 민족 축구사에 자랑할만한 한페지를 기록하였다.

  가렬처절한 항일전쟁시 그처럼 간고한 환경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항일투사, 항일민중들은 동북지역의 항일유격구, 쏘베트구에서도 학교를 세우고 정상적인 지식전수를 하는 동시에 항일교양과 더불어 체육과도 견지하면서 축구운동을 펼치였다. 연변지구 화룡의 어랑촌항일근거지, 평강항일유격구, 처창즈항일근거지, 의란구항일근거지, 소왕청항일근거지, 왕우구항일근거지 등 거의 모든 항일근거지에서 축구운동을 보급하고 축구경기를 통하여 항일의지를 불태우고 전투력을 키우고 전우애를 돈독히 하였다는 력사기재가 기록되여 있다.

  1931년 <<9.18>>사변후 일제의 식민통치로 축구운동이 크게 약화되였다. 하지만 일제통치 15년간에 일제점령구에서도 선후로 간도성축구대회 13차 조직하였는데 주요 참가자들은 우리 민족이였다. 만주국도시축구대회 10여차 조직하였는데 조선족들로 구성된 간도성축구팀이 9차나 우승하였다.

  이제 지난 세기 30년대--40년대 축구의 고향, <<뽈개지들의 천국>>이라고 이름 떨친 연길현 덕신구출신의 축구명장들을 되돌아 보기로 하자. 2010년 12월8일 <<길림신문>> 박금룡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박익환은 룡정시 덕신향 남양촌에서 태여났다. 뽈로 유명해진 후 부모뵈러 오게 되면서 마을사람들이 그의 뽈재주를 보자고 졸라 남양학교 운동장 주위에 있는 수십대의 나무를 겨냥하고 뽈을 찼는데 정말로 백발백중이였다는 전설을 비롯한《박익환전설》이 아직 남양촌일대에서 류전되고있다. 박익환형제는 당시 간도성팀의 선수였는데 박익환은 하프선에서《명중포》란 별호를 가졌다고 한다. 박주환은 광복이 나던 해 쏘련홍군과 별동대의 축구경기중 불명하게 잡혀간후 종무소식이 되였다고 한다.

  박익환은 체대가 크고 남달리 건장하며 중학시절에 벌써 위만주국일대와 일본에서 명성을 날렸다. 박익환의 발에 뽈이 걸리기만 하면 100% 정확하게 공격수들에게로 넘겨주었다고 한다. 1937년 전 만주국 도시 대항 겸 동양축구대회에 출전하여 간도성팀이 우승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때 이미 박익환은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출중한 선수였다. 1938년 박익환은 프로축구선수의 꿈을 안고 조선으로 갔다.

  한국 《월간스포츠》에서 박익환에 대해 수차 소개한 몇구절 옮겨본다.

  1978년 9월 23일 2446호에는 《간도성팀과 전 일본에 이름 떨친 박익환은 고려대학에서 공부도 하면서 학교팀의 선수로 1940년 전 일본축구대회에서 강팀인 일본 관서학원팀을 전승하는데 위훈을 떨쳤다》고 기재하고있다.

  1979년 5월 12일 2542호에는 당대 하프선에서 가장 뛰여난 선수로 민병대 버금으로 박익환을 꼽은 기사가 실렸다. 동아세아에 명성을 떨친 박익환이기에 연전(연전대학의 략칭, 광복후 서울 연세대학으로 개칭)에서 그를 스카우트하고 바로 하프의 중요한 자리를 맡겼다는 내용도 널리 알려졌다.

  박익환의 죽음 또한 뽈을 너무 잘 차니깐 모해당했다는 말까지 나왔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일간스포츠 1979년 5월 12일 2543호 스포츠일화에는《뜻밖의 물사고로 죽음, 연세대학과 한국의 큰 손실》이라고 밝혀졌다.

  박익환의 《태줄》을 물고 나왔는지 당시 만주국팀에서 주력으로 있은 김용식, 국가 명선수로 이름 날린 최태환과 최증석 두 형제(《국가건장》칭호)도 다 덕신향 남양촌 출신이였다. 간도성팀과 만주국팀에서 활약했던 최죽송, 박장송, 김용식, 길림성팀과 국가팀에서 활약했던 국가축구건장 손중천도 다 덕신향 사람이였다. 덕신향은 중국조선족축구선수들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싶다. 조선에서 출판한《조선의 어제와 오늘의 축구》란 책에서는 길림성 연길현에서 출생한 허죽산을 세계축구왕 벨리와 못지 않게 뽈을 잘 차 그의 다리는 《기계다리》와 같고《곡예단 배우처럼 공을 잘 다룬다》고 높이 평가했다. 허죽산 역시 덕신향 출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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