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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들의 피로 물들인 밀산 '5.26'참안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4.20일 10:29
70년간 베일에 가려졌던 피비린 력사

  (흑룡강신문=하얼빈) 맹고군 피금련특약기자 최성림기자=력사를 거슬러 70년전,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밀산 '5.26'참사안(이하 '참사'로), 그것은 밀산력사의 한페지에 쟁의(争议)로 남아 내려온 한부의 피비린 중국 조선민족의 수난사였다.

  1946년 5월 26일, 곽청전의 비적부대는 동안(현 밀산시)지구에서 조선인을 참혹하게 집단학살하는 피비린 참극을 조작했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력사적인 원인 등으로 '참사'의 진실한 원인과 경과 그리고 전반 사회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해 계통적이고 구체적인 기록과 연구가 없었다.

  민간에서는 외곡된 여러가지 부동한 설법과 해석이 떠돌고 있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참사'의 피해자였던 당사자들도 찾아보기 무척 힘들었다. 지금이라도 '참안'의 경과와 진상을 조사해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 한단락의 밀산조선민족의 비참한 수난사는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고말것이다.



  동북민주련군 제3지대 경위퇀 왕경곤퇀장이 1994년 밀산방문시 옛부하 오하묵(좌, 외팔영웅)에게 제사를 써주고 있다./자료사진.

   '참사'전야의 정치형세

  1945년 8월 12일, 소련홍군의 진출과 더불어 동안지구도 해방을 맞이하게 되였다. 갓 해방을 맞은 동안지구는 정치형세가 매우 복잡했다. 일본 위만때의 잔당세력들은 무정부상태의 정세하에 제각기 당파를 맺고 반동무장대를 조직했으며 유지회, 림시정부 및 보안대대 등 형형색색의 반동조직과 기구를 내왔다. 동안지구에 고금성 (원 위동안성 부성장), 손복신 (러시아번역), 곽청전(국민당포로군관) 을 위수로 한 제일 큰 반동무장력량 - 동안림시성정부보안총대가 건립되였다. 고금성이 총대장, 손복신이 부총대장, 곽청전이 참모장 겸 1대대장을 맡았다. 총대엔 모두 6개 대대가 있었는데 그중 1대대의 800여명 토비들이 밀산(현 지일진)의 북오도강, 흑태 등 지대에서 활동하였다. 이외 밀산공안대대에 예속된 기소무의 200여명 무장인원과 상습 비적무리들이 밀산동쪽의 백포자, 마가강, 양목강, 봉황산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6년 4 월 8 일, 목단강군구 제 3지대 경위퇀은 소련홍군이 철수한후 동안지구를 접수하기 위해 동경성에서 출발해 밀산현 평양진(현 계동현에 속함)에 진주했다. 경위퇀 퇀장은 왕경곤이였고 부퇀장은 김봉국 (조선인), 부정위는 김진호 (조선인) 였다. 그중 제3영 전사들은 전부 조선인으로 구성되였으며 전퇀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영이였다. 김봉규와 장응천이 각각 가 영장과 부영장직을 맡았다.

  당시 동안지구는 계녕(계서), 밀산, 호림, 보청, 료하 다섯개 현을 관할했다. 동안시는 위만때 동안성의 소재지로 북쪽으로 가목사와 완달산을 사이두고 있었고 남쪽으로 소련과 접경하고 있었으며 목단강, 가목사, 동안 이 세지구는 3자 정립의 국면을 이루고 있었다. 이 세곳을 신속히 평정한다면 할빈동부지대는 소련에 의지할수 있는 공고한 전략적후방 근거지로 될수 있는것이였다.

  경위퇀과 호림독립퇀이 밀산에 진주한후 당지 조선족군중들은 옹군, 참군열조를 일으켜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앞다투어 참군했다. 70여호밖에 안되는 서안촌에서는 한번에 39명이 참군했고 동선촌에서도 30명이 참군했다. 많은 조선족촌들에서 삼부자, 형제간이 함께 참군하는 감동적인 장면들이 나타났다.

  비적들은 공산당이 령도하는 인민정권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였다. 1946 년 5월 10일, 국민당동북선견군 제15집단군 사령ㅡ비적두목 사문동이 동안지구 비적두목들을 끌어모아 동안지구 공성련합지휘부를 세웠다. 그런후 총지휘를 맡은 사문동이 계서를, 부지휘를 맡은 곽청전이 동안시를 치기로 결정하고 동안지대보안 총대장 유전창이 흥개로 진입해 동안시를 포위공격 하기로 획책했다.

  1946년 5월15일 새벽, 로준당, 기소무, 조본초, 유전창 등 비적부대는 곽청전의 지휘하에 세개 방향으로부터 포화의 엄호하에 동안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아군은 경위퇀 퇀장 왕경곤을 총지휘로 동안보위전총지휘부를 내왔다. 보위전에 참가한 아군 인원수는 도합 2000여명이였다. 전투는 오후 4시까지 진행, 비적 50여명을 격사하고 80여명을 포로했다. 아군도 3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동안보위전후 아군은 여러차례 출병해 흥개의 유전창비적과 흑태의 곽청전비적부대를 토벌했다. 그중 흑태의 곽청전부대와의 전투는 제일 격렬했다. 그번 전투에서 경위퇀은 비록 백여명 비적을 소멸했으나 아군도 제1영 영장 조계련과 전반 토비숙청전역에서 이름을 떨친 털보련장 박춘근(조선인) 이 선후로 장렬히 희생되는 대가를 치렀다.

  .동안의 비적숙청투쟁은 잠시적인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였다.

  5월 24일, 계녕에 주둔하고 있던 3지대 사령부에서는 359려의 비적숙청에 배합하려고 전략방침을 조절해 경위퇀을 위수로 하는 주력부대를 계서로 잠시 이동시켰다. 동안시에는 상영전 호림독립퇀과 리희재 공안대대가 남아 수비했다.

조선인들의 피로 물든 동안시

  5월 25일 곽청전, 로준당 ,양세범, 기소무 등 비적괴수들은 국민당 밀산현당부서기 회소선의 책동하에 기회를 타 동안시로 쳐들어 왔다. 중과부적의 형세하에 량정상은 중공동안지위서기 오량평의 "지켜낼만하면 지키고 지켜내지 못할것 같으면 퇴각하라"는 지시에 좇아 부대를 이끌고 목릉하를 건너 밀산현성(현 지일진) 으로 전이했다.

  25일 곽청전, 양세범은 동안성을 점령한후 천여명의 비적들을 이끌고 바싹 뒤쫓아왔는데 목릉강 다리에서 접전하게 되였다. 량정상은 호림 상영년독립퇀과 리희재의 공안대대를 지휘해 비적들의 공격을 수차 격퇴시켰다. 하지만 현저한 력량차이로 피동에 처하게 된 공안대대와 호림독립퇀은 밀산현성을 포기하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량정상, 리희재는 일부분 공안대대 전사들을 거느리고 계녕으로 전이했고 일부분은 난민들을 령솔해 당벽진을 거쳐 소련경내로 들어갔으며 상영년은 호림독립퇀을 이끌고 호림으로 퇴각했다.

  공안대대와 호림독립퇀이 후퇴한후 양세범의 비적무리들은 밀산현성을 완전히 점령하기전 현성 북문밖에서 닥치는대로 살인방화와 재물략탈을 진행했다. 특히 무고한 조선인을 마구 무참히 학살하는것으로 공산당이 령도하는 인민무장에 대한 원한을 풀었다. 또한 이는 조선족전사들을 골간으로 하는 비적숙청부대와 조선족군중들이 아군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에 대한 보복이기도 하였다.

  한무리의 비적들이 한 주민뜨락에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조선부녀가 아이를 업고 서성거리는것을 발견했다. 비적들은 승냥이떼처럼 덮쳐들어 총창으로 녀인을 찔렀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피못속에 쓰러진 녀인을 향해 총을 쏘았다. 등에 업힌 어린애가 울음을 터뜨리자 인간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비적들은 "씨알머리도 남기지 말어!"라고 웨치며 아이를 향해 련거퍼 총창질 했다.

  이어 비적들은 현성 북문밖의 주희경 등 다섯호의 집에 불을 질렀다. 충천하는 불길은 밀산현성을 붉게 물들였다. 이것이 바로 피비린 '5.26참안'의 시작이였다.

  5월 26일 아침, 곽청전 비적무리들은 동안시에 돌아온 후 도처에 반동표어를 부쳤으며 부상당한채 체포된 공안대대의 류문성 등 5명의 전사를 공개총살했다. 그리고 살기등등해 "공산당을 소멸하고 팔로군을 소멸하자", "조선인을 죽이고 복수를 하자"고 떠들면서 미쳐날뛰였다.

  5월 26일 점심무렵, 한무리의 비적들이 끄나불의 안내로 동안시 조선의사 홍문섭이 꾸리는 병원으로 들이닥쳤다. 경위퇀과 호림독립퇀이 밀산에 주둔해 있는 기간, 홍의사는 부상병들을 열정적으로 치료해 주었다. 비적들은 "조선인을 "몽땅 죽이고 빼앗고 불사르라!"고 고함지르며 조선인을 보기만 하면 총으로 쏘아 눕혔는데 홍의사와 그의 장남 홍철범, 둘째조카 홍명철, 외조카 천홍춘 등 4명을 잇달아 살해했다. 홍의사의 부인 조문신은 급기야 어린 손자를 안고 밖으로 내뛰였다. 조문신이 뛰는것을 발견한 비적들은 뒤쫓아가서 총창으로 그의 잔등을 찔렀다. 그때 세살난 홍철도는 조문신의 품에서 뿌리워 나갔다. 다행히도 이웃의 한 한족부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홍철도를 안아다 숨겨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원 밀산현 수문참 기술원 김삼룡은 당시 동안시 2도가 북골목에서 살았는데 그해 12살이였다. 그의 맏형 김석봉은 경위퇀 제3영의 전사였다. 5월 26일, 동안시구에서 총소리가 간단없이 들려왔다. 김삼룡의 아버지 등 여섯식구는 모두 집에 숨어 있었다. 비적들이 조선사람을 죽인다는 소문을 들은 이웃 한족들이 김삼룡의 집으로 찾아와 빨리 피신하라고 권고했지만 김상룡의 아버지 김경렬은 경위퇀에 있는 아들근심에 떠날 결정을 하지 않았다.

  오후 4시경, 집서북방향에서 비적기병대의 급촉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99식'보총을 꼬나든 세놈의 비적과 한무리의 망나니들이 김삼룡네 집문앞에 나타났다. 망나니들은 도끼며 몽둥이로 김상룡의 집대문을 두드려 마샀다. 세놈의 비적이 집에 뛰여들어 총창으로 위협하며 김삼룡네 온집식구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김상룡의 아버지가 혼란한 틈을 따 마당 앞 도랑을 넘어섰을 때, 길서쪽에서 비적 한놈이 불쑥 뛰여나오며 "너 조선사람 맞지?"하고 호통쳤다.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는 김삼룡의 부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침묵하자 그자는 다짜고짜로 그이 가슴을 향해 총을 쏘았다. 김삼룡의 아버지는 피못속에 쓰러졌다.

  비적들은 남쪽으로 계속 수색해 나가며 조선인들을 보는족족 쏴죽였는데 네명의 조선인 청년이 또 피못속에 쓰러졌다.

  원 밀산현 재정국 회계 리길인(당시 25세) 4형제는 당시 동안시 2도가 김삼룡의 집 남쪽골목에서 살고 있었다. 비리길인의 집에 들이닥친 비적들은 리길인이 보이지 않자 동생들을 심문하면서 리길인이 간곳을 대라고 호통쳤다. 그들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자 비적들은 20세를 금방 넘긴 리길선, 리동주 두 형제를 경위퇀의 앞잡이라고 하면서 총으로 쏴 죽였다. 당시 리길인은 부근에 있는 이웃집에 가 있었기에 참변을 면하게 되였다.

  서안촌 중년사나이 서씨는 5월 25일, 비적들이 동안시에 쳐들어올 때 서쪽 철도어구에서 비적들의 류탄에 맞아 숨졌다. 27일, 비적들은 마을에 쳐들어와 남편의 령구를 지키고 있는 서씨의 안해를 붙잡고 죽은 남편이 경위퇀의 앞잡이였다고 억설하면서 총창으로 그녀를 처참히 찔러죽였다.

  5월 27일, 무고한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은 극에 달했다. 비적들은 혈안이 되여 도처에서 경위퇀과 호림독립퇀의 군인가족, 그리고 인민무장부대를 도와주고 지원한적 있었던 조선인들을 사출해 기차역 앞의 이층집에 가둬넣고 심문했는데 심문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지금의 밀산중의원 부근에서 12명의 조선인들에게 경위퇀의 앞잡이라는 죄명을 씌워 살해한후 또 기차역광장에서 10여명의 조선인들을 살해했다. 그날 저녁, 갇혀있던 30여명의 조선부녀들도 비적들의 폭행을 당했다.

  비적들은 또 조선인 주요집거구역인 동선, 동명, 서안, 삼갑 등 조선마을에 덮쳐들어 살인방화와 략탈을 감행했다. 5월 27일 아침, 30여명의 비적들이 동선촌으로 덮쳐들었다. 놈들은 대부분의 촌민들이 피신한것을 보자 분풀이로 네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고도 성차지 않아 수색중 미처 피신하지 못한 4명의 로인들을 총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쏴 잔인하게 살해했다.

  한분길(1930년)은 1942년도에 부모를 따라 동선촌에 와 살았다. 집식구로는 량부모와 남동생 하나, 녀동생 둘 도합 여섯이였다. 5월 26일, 오후 비적들이 동안시에서 조선인을 죽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사람들이 다투어 피난갈 차비를 했다. 그러나 한분길은 아버지가 목릉강 보뚝막이에 나가 집에 없었기에 움직일수 없었다. 뜬눈으로 온 밤을 지새운 한분길의 어머니는 날이 밝자 소수레에 좀 값진 물건과 두마대 입쌀을 싣고 마을남쪽의 한족집에 가져다 소수레채 맡겼다. 한분길의 어머니가 금방 집에 들어서자 말탄 비적놈들이 마을에 들이닥쳤고 그뒤엔 도끼, 칼, 몽둥이를 든 망나니들이 뒤따랐다.

  놈들은 촌에 들어서자 촌 서쪽어구에 사는 안신일초가에 불을 지른 후 끄나불의 안내하에 작은 아들을 호림독립퇀에 보낸 방씨네 집에 들이닥쳤다. 다른 식구들은 전날저녁 촌민들을 따라 피신했고 집엔 방로인만 남아있었다. 비적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닥치는대로 가장집물들을 두드려 부신후 방로인에게 아들의 행방을 캐물었다. 방로인은 두눈을 감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화가난 비적두목은 방로인을 향해 총을 쐈다. 이밖에도 다른 한무리의 비적들이 마을동쪽에서 윤씨로인을 살해하고 시신을 되는대로 나무가리에 던져버렸다.

  한분길일가 여섯식구는 그 난리속에서 요행 빠져나와 점심무렵 목릉강을 건너 복흥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복흥촌의 대부분 촌민들도 이미 피난간 뒤라 그곳에도 정착할수가 없어 도로 나오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난민대오를 따라 소련으로 넘어갔다. 소련에서 한분길은 아버지를 만났을뿐만 아니라 얼마후 삼촌도 만나게 되였다. 일년후 한분길일가는 조선을 거쳐 동선촌으로 돌아왔다.

26일 오전, 동명촌에서는 서북방향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총소리에 모두들 불안에 잠기였다. 오후 세시가 넘어 동안시쪽에서 천방지축 도망해 온 한 중년사나이가 자기는 동안시내 변소에 숨어있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하면서 동안시에서 목격한 참사들을 촌민들에게 알렸다.

  불안한 마을촌민들은 분분히 촌장 김원갑의 집에 모여들었다.김원갑은 부녀, 아이와 청년들을 동원해 피신시키기로 결정했다. 동명촌은 70여호에 380여명의 인구를 가진 촌으로 그날 저녁 어둠을 타 180여명의 촌민들이 피신떠났다. 김원갑촌장은 남아 위험을 무릅쓰고 촌을 지켰다.

  27일 아침을 먹고난 김원갑은 소식을 탐문하려고 촌남쪽 길목에 있는 류신네 가게로 갔다. 그때 촌어구에 보총을 멘 40여명의 비적들이 나타났다. 놈들은 가게방에 사람이 있는것을 보더니 총을 받쳐들고 쏘려고 했다. 가게주인 류씨와 김원갑은 흰수건을 흔들면서 마중나갔다.

  김원갑의 촌장신분을 알게 된 비적들은 김원갑을 보고 촌민들을 몽땅 집중시키라고 했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200여명의 촌민들이 김원갑네 뜨락에 모이자 비적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재물을 략탈하기 시작했다. 비적들이 촌민 허종백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보따리를 메고 피신하러 나선 허종백과 마주쳤다. 비적들은 다짜고짜 허종백을 향해 총을 쐈는데 총알이 빗나갔다. 깜짝 놀란 허종백이 집안으로 뛰여들가자 문에 대로 총을 람발했다. 남편이 피못에 쓰러지는것을 본 허종백의 마누라가 달려나와 손으로 총구멍을 막았다. 그러자 이번엔 총알이 그녀의 손바닥을 꿰뚫고 나갔다.

  곽청전 토비일당은 또 기차역 부근에 있는 제1영 영장 조계련과 조선족 털보련장 박춘근의 모를 파헤치고 시체를 꺼낸후 각을 뜯고 머리를 잘라 군중들에게 효시하기까지 했다.

  이와 동시에 또 한무리의 비적들이 마을동쪽에서 윤씨로인을 살해 하고 로인의 시신을 나무가리에 던졌다.

  한분길일가 여섯식구는 그 란리판에 그래도 요행 빠져나와 점심무렵 목릉강을 건너 복흥촌으로 들어갔다. 마을에 들어서 보니 복흥촌의 대부분 촌민들도 이미 떠나간 뒤라 그곳에 정착할수가 없었다. 한분길일가는 할수없이 공로에 올라 우연히 만난 난민대오를 따라 소련으로 넘어갔다. 소련에서 한분길은 아버지를 만났을뿐만 아니라 얼마후 삼촌도 만나게 되였다. 일년후 한분길일가는 조선을 거쳐 동선촌으로 돌아왔다.

  동명촌은 동안시 동쪽 10리가량 상거한 곳에 있으며 동안시에서 밀산현성으로 통하는 도로와 접근해 있다.

  26일 오전, 동명촌은 서북방향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총소리에 모두들 불안에 잠기였다. 오후 세시가 넘어 동안시쪽에서 천방지축 도망해 온 한 중년사나이가 자기는 동안시내 변소에 숨어있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하면서 동안시에서 목격한 참사들을 촌민들에게 알렸다.

  촌장 김원갑은 먼저 부녀, 아이와 청년들을 동원해 피신시키기로 했다. 위급한 시각이라 김원갑은 집집마다 다니며 피신할것을 권했다. 경황실색한 많은 촌민들은 난민의 대렬에 끼여들었다. 동명촌은 70여 호에 380여명의 인구를 가진 촌으로 그날 저녁 어둠을 타 180여명의 촌민들이 피신했다. 김원갑은 촌장의 직책을 지켜 위험을 무릅쓰고 피신하지 않고 촌을 지켰다. 그의 아들 김창호는 그때 10살이였는데 시종 아버지를 따라 다녔기에 참안의 전반 발생과정을 직접 목격할수 있었다.

  27일 아침, 김원갑은 아침을 먹고 소식을 들으려 가게방으로 갔다. 그때 촌어구에 보총을 메고 람루한 옷을 입은 40여명의 무장비적이 나타났다. 놈들은 가게방에 사람이 있는것을 보더니 총을 받쳐들고 쏘려고 했다. 가게방 주인 류씨와 김원갑은 흰 수건을 흔들면서 마중나갔다. 비적들은 신속히 몰려들어 총창을 휘두르며 김원갑을 찔러죽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류씨는 다급히 김원갑을 막아 나서면서 비적들에게 반복적인 해석을 했다.

  김원갑의 촌장신분을 알게 된 비적들은 김원갑을 보고 촌민들을 몽땅 집중시키라고 했다. 반시간후, 미처 피신하지 못한 200여명의 촌민들이 김원갑의 뜨락에 모였다. 비적놈들은 촌민들을 에워싸고 하늘에 총을 몇방 쏘고는 집집마다 다니며 재물을 략탈하기 시작했다.

  비적들이 촌민 허종백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보따리를 메고 피신하러 나선 허종백과 마주쳤다. 비적들은 다짜고짜 허종백을 향해 총을 쐈다. 총에 맞지 않은 허종백은 황급히 집안으로 뛰여들어 갔다. 비적들이 그를 그저 놓아둘리 만무했다. 비적들은 문을 향해 련거퍼 총질했다. 허종백은 총에 맞아 정신을 잃고 구들에 쓰러졌다. 이를 본 허종백의 마누라가 달려나와 손으로 총구멍을 막았다. 흉악한 비적놈은 또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허종백 마누라의 손바닥을 꿰뚫고 나갔다.

  농가를 수색하던 다른 한무리 비적들은 촌민 최창국의 집에서 김원갑네 집 마당에 집결하지 않은 세 로인을 발견하자 총을 쏘았다. 다행히 총알은 한 로인의 귀뿌리를 스치고 지나갔을뿐 사망자는 없었다.

  촌민 조성규의 누님은 그때 20세였다. 비적 두목은 조성규의 누님을 촌민들속에서 끌어내고는 남편이 간곳을 대라고 호통쳤다. 일이 잘못될가봐 김원갑은 급히 나서서 "이 녀인의 남편은 촌 목수인데 지금 보뚝막이에 갔다"고 해석했다. 조성규의 누님은 재빨리 버선목에 감춰두었던 루불뭉치를 비적두목에게 주고서야 무사히 풀려날수 있었다.

  곽청전 토비무리들은 산사람만 학살한것이 아니다. 놈들은 기차역 부근의 공동묘지에 쓸어들어 제1영 영장 조계련과 조선족 털보련장 박춘근의 모를 파헤치고 시체를 꺼낸 후 각을 뜯고 머리를 잘라 군중들에게 효시했다.

살길찾아 떠난 피난의 길

  비적들의 폭행을 피하고저 수많은 무고한 조선인들이 비발치는 총탄의 세례와 생사리별의 고험을 감내하며 피난의 길에 올라섰다.

  1908년 출생인 김병홍은 당시 동안병원 부근에서 살았다. 5월 26일 오후 두시경, 동안시 서북쪽방향에서 콩복듯한 총소리와 함께 토비들이 조선사람을 죽인다는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안가 김병홍집 앞거리에 40 여명의 남녀로소로 무어진 조선인 난민대오가 나타났다. 뜻밖에 들이닥친 재난에 황급해난 김병홍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곱달되는 작은 딸애를 업고 다섯살짜리 큰 딸애를 안고 마누라를 재촉해 난민대오를 따라나섰다.

  얼마 못가 거리를 순라하는 토비들과 마주치게 되자 난민대오는 급히 방향을 돌려 부근의 동안시 병원례당으로 들어갔다. 텅빈 례당안에는 은페할 곳이라곤 없었다. 모두가 급해 맴돌아치던중 누군가 강단밑에 숨자고 소리쳤다 난민들은 지체할세라 다투어 강단밑에 들어가 숨었다. 어둡고 습하고 숨이 콱콱 막히는 강단밑에서 난민들은 서로 숨을 죽여가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김병홍의 작은 딸애가 울음을 터뜨렸다. 김병홍이 여러가지 방법을 다해 달래 보았지만 딸애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급해난 김병홍은 손으로 딸애의 입을 막았다. 얼마후 울음소리는 그치였다. 하지만 어린딸은 김병홍의 품속에서 숨지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 김병홍은 다른 두 사나이와 함께 병원례당에서 나와 동선촌방향으로 피신갔다. 공교롭게도 길가에서 그들은 토비들의 추격을 받았으며 그중 박씨성의 한 사나이가 불행히 적탄에 맞아 당장에서 숨졌다. 김병홍은 요행히 비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나 호림으로 갔으며 호림 독립퇀에 가입해 그후의 토비숙청 투쟁에 떨쳐나섰다.

  해방후, 김병홍은 피난시 딸애의 죽음으로 인한 지나친 자극으로 엄중한 정신분렬증에 걸렸으며 빈곤과 병마속에서 비참한 여생을 보냈다.

  조선족문단의 저명한 시인이며 '연변문예'잡지 주필로 있었던 리상각선생도 동선촌에서 '참안'을 겪었다.

  5월 26일 저녁 6시경, 온집 식구들이 모여앉아 저녁식사를 할때 집 밖에서 "비적들이 조선인을 죽이러 오니 빨리 피하시오."라고 웨치는 중년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대낮에 마을서쪽 동안시구쪽에서 자지러지진 총소리가 들려와 촌민들은 저마다 불안해하던 참이였다.

  중년사나이의 웨침소리가 끝나기 바쁘게 마을은 발칵 뒤집혀 졌다. 어둠의 장막을 뚫고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녀인들의 웨침소리가 멀리 울려퍼졌다. 수많은 촌민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피난의 대렬에 끼여 들었다. 백여명의 피난민은 긴 대렬을 지어 촌남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10살난 리상각은 부모의 뒤를 따라 피난행렬에 들어섰다. 어둠속에서 얼마나 걸었는지 앞에 목릉하가 나타났다. 5월의 목릉하는 물살이 세지 않고 깊지도 않아 옅은 곳은 한미터 깊이도 안되였다. 어른 아이 할것없이 모두 무사히 강을 건널수 있었다. 대오는 계속 남으로 나아갔다. 날밝을무렵 그들은 목릉하 남쪽의 한족과 조선인들이 잡거하고 있는 한 마을에 도착했다. 후에 리상각은 이 마을이 삼갑촌이란것을 알게 되였다.

  삼갑촌에서 리상각은 다른 마을에서 온 많은 피난민들을 보았다. 기진 맥진한 리상각은 부모를 따라 한 농가에 들어갔다. 놀란 마음을 진정 시키지도 못한채 농가에서 대충 아침을 먹고 있는데 촌 북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얼마 안되여 말탄 비적들이 나타났다. 비적들은 난민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았으나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비적 한 놈은 개가 요란하게 짖는다고 수뢰를 꺼내 개한테 던져 폭사시켰다. 비적들은 남녀로소 불문하고 몸수색을 했다. 총망히 피난의 길에 들어선 난민들이라 값가는 물건이 있을리 만무했지만 토비들은 한명의 난민도 빠뜨리지 않고 샅샅히 수색했다.

  비적들의 재차 략탈에 겁먹은 난민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삼갑촌을 떠났다. 그중 일부는 당벽진을 거쳐 소련경내로 들어갔고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해 다른 조선족촌들에 피신했으며 일부는 목릉하기슭으로 되돌아가 갈대숲에 몸을 숨겼다.

  리상각도 부모를 따라 갈대숲속에서 평생 잊을수 없는 3주야를 보냈다.

  촌에 돌아오니 마을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집 네채가 불에 탔고 4명의 로인이 피살되였으며 대부분 촌민들의 재물은 모두 비적과 망나니들에 의해 말끔히 털리운 뒤였다.

  원 밀산시 종자공사 경리이며 고급농예사였던 박하묵은 1946년에 원동신촌 (지금의 이인반향 안강촌) 에서 살고 있었다. 1946년 3월, 박하묵은 동안시에 살고있는 삼촌 김규문의 집으로 놀러갔다. 5월 25일, 총포소리가 울리자 김규문은 조카의 안전이 걱정되여 그를 동선촌 셋째삼촌의 집에 보냈다. 5월 25일 오후, 박하묵은 도보로 동선촌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밥술을 놓자 동안시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점심무렵 동선서쪽 다리부근에 30여명의 망나니들이 도끼, 칼, 몽둥이를 들고 공개적으로 로략질하러 왔다. 일찍 동선촌은 자연지세를 리용하여 마을의 동남서 세둘레에 토담을 쌓았었다.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촌서쪽 문 다리목을 지켜 나서서 망나니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오후 세시경 마을 서북방향에서 날아온 류탄에 두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저녁 여섯시가 되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박하묵이 셋째 삼촌식구들과 저녁식사를 금방 마쳤는데 밖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웨침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혼잡하게 들려왔다. 부녀들과 아이들의 고함소리 ,울음소리가 뒤섞인 피난대렬이 촌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셋째 삼촌은 박하묵의 손목을 이끌고 집식구들을 재촉해 준비도 없이 집을 뛰쳐나와 난민행렬에 끼여 들었다. 어둠속에서 박하묵은 두미터 높이의 토담을 톺아오르다 그만 셋째 삼촌의 손목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자기 키를 넘어가는 풀밭속에서 그는 목이 터지도록 삼촌을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11살 박하묵은 할수없이 난민들을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던지 눈앞에 고요히 흐르는 목릉하가 나타났다. 목릉하 남안의 원동신촌에 살고 있은 박하묵은 목릉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흥분되여 사람들속에서 뛰쳐나와 목릉하에 첨벙 뛰여들어 가슴치는 물결을 헤치고 단숨에 목릉하를 건넜다. 그는 재빨리 원동신촌으로 통하는 신작로에 올랐고 점심때가 될 무렵 집에 도착했다.

동명촌에 살고있던 김창락은 1946년 5월 26일, 오후 네시경에 아버지, 어머니, 큰형님 부부, 조카, 둘째형님 부부, 누님 그리고 사돈집로인 등 10명과 함께 난민대오를 따라 촌 동쪽 10여리가량 떨어진 동흥촌으로 갔다. 동흥촌으로 가보니 그곳 촌민들도 피난길에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되돌아 섰다. 어둠속에서 간신히 새밭을 헤치며 목릉하를 건너 이튿날 새벽녘에 밀산현성에 들어섰다. 그들은 호림독립퇀 전사들의 안내로 한 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 학교에는 이미 동안시와 여러촌에서 피신해 온 난민들이 약 800여명이 있었다. 동명촌에서 온 난민들만 해도 100여명 되였다. 30여명의 호림독립퇀과 공안대대의 전사들이 학교에서 난민들을 위해 경비를 서고 밥을 공급해 주었다. 아침을 먹은후 난민들은 공안대대의 지휘하에 밀산현성을 떠나 서남방향으로 이동했다. 난민대오가 밀산현성 서쪽대문을 나선지 얼마 안되여 비적들의 총소리가 나며 양세범이 이끈 한무리 토비들이 남산을 점령하고 밀산거리로 쳐들어 왔다. 난민들은 등뒤에서 콩볶듯 들려오는 비적들의 총소리에 정신없이 서남방향을 향해 줄달음쳤다. 날이 어두울 무렵, 비적들의 추격이 뜸해지자 휴식하라는 통지를 받고 모두들 걸음을 멈추었다.

  김창락은 현지지형을 잘 아는 어른들의 소개를 통해 난민대오가 당벽진 방향으로 움직인다는것을 알았다. 그들은 어둠속에서 걸음을 다그쳐 이튿날 해뜰무렵 당벽진에 도착했다.

  28일 아침 여덟시경,, 800여명의 난민들은 여러패로 나누어 소련으로 건너갔다. 김창락일가는 피난의 길에서 다행히도 시종 갈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소련에서 약 두달가량 머물러 있다가 조선정부의 안배로 평안남도 남양시에 가서 생활하다가 늦가을에 동명촌으로 돌아왔다...

  지금 밀산진에서 생활하고있는 박순옥로인은 1946년 3월에 훈춘으로부터 부모를 따라 서안촌에 와 살았다. 얼마 안되여 박순옥의 둘째오빠 박태운 (25세)과 동생 박해운 (15세)이 호림독립퇀에 가입했다. 5월 27일 아침, 한무리의 비적들이 서안촌으로 들이닥쳤다.

  뜻밖의 재난앞에서 그의 일가는 급급히 피난대렬에 가담했다. 이튿날 아침 해뜰무렵에 그들은 당벽진을 거쳐 소련에 넘어가 한달가량 있다가 다시 조선평양 부근의 개천이라는 곳으로 이동해 살다가 호림독립퇀에 보낸 두 아들이 걱정되여 9월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생사관두에 보여준 민족의 정

  '참안'에서 정의감을 가진 수많은 한족군중들은 조선족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안전을 위해 선뜻이 떨쳐나섰다.

  동안시 주민 최승연은 당시 목릉가 42호에서 작은 하숙집을 경영했다. 경위퇀이 동안진주시 일부 관병들이 이 하숙집에 투숙한적 있었다. 5월 26일 점심, 특무 최재화의 밀고로 한무리의 비적들이 최승연의 하숙집에 들이닥쳤다. 하숙집 문앞에서 비적들은 문을 여는 최승연을 경위퇀의 앞잡이라고 하며 다짜고짜 련거퍼 날창질해 찔러죽였다. (1960년 5월10일, 최승연을 혁명렬사로 추인했다). 이어 비적들은 최승연의 맏아들 최원도를 묶어 김씨성을 가진 운전수와 함께 목릉가 길남쪽 광장에 압송해 살해하려 했다. 위급한 시각에 이웃 주민들속에서 한족로인이 불쑥 뛰여나와 최원도를 끌어않고 자기 아들이라고 잡아 떼면서 사정했다. 이웃 주민들도 최원도가 령감의 아들이 옳다고 하면서 토비들을 보고 놓아달라고 사정했다. 최원도는 여러 사림들이 사정하는 틈을 타 슬며시 부근 소학교의 보일러실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몸을 빼지 못한 김씨 운전수는 당장에서 비적들에게 살해되였다.

  당시 34세인 조선의사 권창호는 동안시 성영로에서 병원을 꾸리고 있었다. 서울 의과대학을 졸업한 아버지 권기관의 전수하에 권창호는 고명한 의술과 고상한 의덕을 갖추고 있어 주위 사람 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다. 그의 병원규모는 동안시에서도 손가락을 꼽았다.

  경위퇀이 동안시에 주둔하고 있은 기간 권창호는 여러차례 의료대를 조직해 부상병을 위문하고 치료해 주었다. 하여 그의 병원은 곽청전 비적들의 첫번째 폭행의 목표로 되였다.

  26일 아침, 권창호는 그를 관심하는 여러 한족이웃들의 권고에 총망히 병원을 떠나 피신했다. 그가 9살난 큰 아들의 손목을 잡고 첫 길목을 갓 지났을 때 한 낯선 한족중년이 그를 부르며 달려왔다. 그 한족중년은 "지금 란리판에 어디로 가든 안전하지 않다."고 하면서 다짜고짜로 권창호의 손을 끌고 한 모퉁이에 있는 민가로 들어갔다. 후에 알고보니 그는 권창호가 치료해준적이 있은 환자였다.

  복새판에 미처 남편을 따라나서지 못한 권부인은 7살난 둘째아들의 손목을 잡고 바로 병원문을 나설 때 비적들과 마주쳤다. 비적들은 권부인을 붙잡고 권창호의 행방을 대라고 호통치는 동시에 한쪽으로는 망나니들을 동원해 병원의 의료기재와 약품들을 략탈했다. 권창호의 부인은 비적들이 물건수탈에 눈이 아홉이 된 기회를 타 아들을 데리고 비적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웃들의 방조와 엄호하에 권부인은 아이와 함께 한족집 채소움에 숨어 삼일동안을 지냈다. 이렇게 그들 부부는 지척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행방을 몰라 애간장 태우는 사흘밤낮을 보냈다.

동안시 2도가의 리한수 다섯식구는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위급한 시각에 리한수는 머리를 막깎아 버리고 헌 한족옷을 입고 이웃 한족집의 두부방에 피신갔다. 비적들이 조사를 오자 두부방 주인은 한쪽에서 일하는척 하는 리한수를 자기의 사위라고 했다. 거리가 좀 뜬지라 비적들은 리한수가 조선인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큰아들 리성남은 비적들에게 발각되였다. 이를 본 두부방주인 그리고 이웃 한족주민들은 모여들어 보증서고 사정해서 끝내 비적들의 손에서 리성남을 구해냈다. 리성남의 어머니 김순희 , 큰녀동생 리금자는 한족인 이웃 송다록의 집에 피신해 병자로 가장해 구들에 누워있었고 둘째 녀동생 리계월은 송다록 딸의 옷으로 한족녀자애 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모두들 비적들의 수색에 걸려들지 않았다.

  원 화평향 위생원 원장 최학철은 당시 외출한 아들을 기다리다 미처 피신 못하고 비적들에게 붙잡혀 한 하숙집에 감금되였다. 비적들은 최학철의 몸에서 회중시계와 적지 않은 돈을 수색해내자 최학철의 신분을 의심하면서 혁띠를 풀어쥐고 최학철이를 내리치며 진짜신분을 대라고 호통쳤다. 성격이 비교적 강한 최학철은 죄진일 없었기에 비적들의 심문에 굽어들지 않았다. 악에 받친 비적두목은 최학철이를 하숙집 밖으로 끌어내다 죽이라고 호령했다. 이 위급한 관두에 줄곧 기회를 보아오던 하숙집 주인은 선뜻 나서며 최학철의 진실한 신분을 밝히고 토비들의 폭행을 제지시켰다.

  부금현에서 한족 양아버지를 믿고 갓 동안시로 이주해 온 안씨는 참안이 일어나기 전날 안해 를 삼갑촌에 소금 팔러 보내고 혼자 집에 남았다가 봉변을 당했다. 비적들이 동안시에 몰려들자 안씨는 미처 밖으로 피신 못하고 집 천정다락에 올라가 숨었다. 날이 새자 그는 한족 양아버지를 찾아나섰다. 그런데 길거리에 나서자마자 순라하는 비적들과 마주쳤다. 비적들은 안씨의 가슴에 총창을 들이대며 신분을 대라고 호통쳤다. 마침 맞은켠에서 안씨의 양아버지가 10여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달려 오면서 "쏘지마오, 내 아들이요" 소리쳤다. 양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이 비적들에게 돈을 찔러주며 사정해서야 비적들이 물러갔다.

  양아버지는 안씨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한족 옷을 꺼내 입혀주고 강냉이떡을 싸주면서 "우리 집은 위태롭다. 어서 어디든 가서 숨어있어라."라고 하면서 등을 떠 밀었다. 안씨는 별수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천정에 올라가 숨었다. 이윽하여 비적들이 또다시 들어닥쳐 빈집을 왈칵 뒤집었다. 비적들이 마구 찍어대는 날창에 발이 찔렸지만 안씨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천정을 아무리 찔러도 동정이 없으니 비적들은 물러갔다.

  물론 모두에게 이런 행운이 차례진건 아니였다. 많은 조선인들이 '참안'에서 무참히 피살되였다. 사흘간 곽경전비적이 동안시구, 밀산현성과 동선, 동명, 서안등 조선족촌에서 도살한 무고한 조선인은 무려 60여명에 달했다.

  5월 28일 오후, 곽청전 비적부대는 359려와 경위퇀의 공격이 무서워 황급히 동안시에서 철거해 흑태소굴로 줄행랑을 놓았다.

  6월 21일, 경위퇀과 359려의 두개퇀 병력은 동안시 남북 두개 방향에서 동시에 출격해 동안시를 해방했고 토비들을 숙청해 우환을 제거했다.

  비적두목 곽청전은 1949년 천진에서 공안기관에 체포되였다. 1950년 9월 1일, 천추에 용납못할 죄를 지은 이 살인악마는 밀산현성에서 회술레 된 다음 밀산동쪽의 고려촌에 압송되여 총살당하는 징벌을 받았다.

  '참안'이 가져다준 사색

  '참안'의 전반 과정을 돌이켜보면 여러 방면의 원인이 있지만 필자는 주요하게 아래와 같은 네가지로 귀납해 보았다.

  첫째: 력사적으로 형성된 첨예한 계급모순과 조선족혁명자들이 밀산혁명투쟁중에서 일으킨 선봉작용이 바로 곽청전비적이 '참안'을 조작하게 된 필연성을 결정했다. 특히 곽청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비적인것이 아니라 국민당과 내통해 국민당의 인계접수를 기다리는 정치비적이라는 점에서 '참안'의 조작은 명확한 정치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민족이 밀산에 뿌리 박은지는 어언간 백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민족은 근로하고 용감하며 드높운 애국열정으로 이름난 민족이다. 특히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민족독립과 해방을 쟁취하는 투쟁에서 형제민족과 어깨겯고 불멸의 위훈을 쌓았다.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밀산조선인은 밀산의 첫 당지부, 제1기 현위의 건립, 첫번째 밀산항일총회와 밀산항일유격대의 창건 등 중요한 력사적활동에 참가했으며 14년 항전중에서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밀산조선인들은 토비숙청투쟁에 용약 참가했다. 아군이 도착하는 곳마다 수많은 청년들이 주동적으로 참군했고 군량과 탄약을 날랐으며 정보탐지와 부상병 호리에 참가했다. 특히 비적들과의 수차 접전에서 왕경곤경위퇀의 조선인 제3영, 호림독립퇀의 조선인전사련, 동안공안대대 조선인전사반은 부대의 절대적인 주력으로서 영용무쌍하기로 이름났고 휘황한 전공을 세웠었다.

  곽청전비적들은 이에 앙심을 품고 잔인무도한 보복을 진행한것이였다. 하여 그들은 인민무장부대의 조선인전사 가족과 인민무장부대를 관심하고 지지하는 조선군중들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고 집을 불사르며 무고한 조선인들을 도살하는 천인이 공노할 피비린 참안을 빚어낸 것이였다.

  둘째: 동안지구의 비적숙청 지휘상의 실책이 비적들에게 무고한 평민을 학살하고 혁명군중들에 보복할 기회를 주었다.

  5월15일, 경위탄은 혈전을 거쳐 동안성을 지켜냈을 뿐만아니라 진일보로 동안시의 포위망을 해제시켰고 동쪽의 포위진지인 흥개를 수복했으며 흥개호연안의 몇갈래 잔여비적들을 숙청해 비적들의 기염을 여지없이 꺽어놓았다. 특히 아군은 군사력이 우세인 정황하에서 련속작전하여 비적들을 깡그리 섬멸할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군지휘층에서 형세를 잘못 분석하고 소위 전략부서 조절책을 내와 경위퇀의 병력을 계서로 이동시켰다. 이는 동안성을 비적들에게 공손히 바친거나 다름없었으며 곽청전비적들에게 '참안'을 조작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셋째: 신구정권의 교체시기, 낡은세력의 잔여가 철저히 숙청되지 않았고 새로운 정권과 사회질서가 확립되지 않은 특수한 력사단계에 군중들의 정상적인 생산생활질서와 생명재산은 안전보장을 받지 못했다.

  '참안'중 사회관리체제가 마비된 무정부상태에서 사회의 찌꺼기들이 범람하여 참안을 조작했다. 바로 동선, 동명, 서안, 삼갑 등 조선족 주변마을의 지방망나니들이 토비들과 결탁해 손에 흉기를 들고 공공연히 쳐들어와 조선인들의 수많은 재산을 략탈해 갔으며 광대한 조선인들에게 막대한 경제손실을 주었던것이다.

  넷째: 력사적으로 조성된 민족격리와 대립은 참안을 가중화시켰다. '참안'은 비록 직접적인 민족과 민족모순으로 유발된것은 아니였지만 일제의 통치시대에 실행한 민족압박, 민족분렬정책 등과 갈라놓을수 없는것이였다.

  당년에 일본제국주의는 중국에서 민족압박과 민족분렬정책을 실행하면서 극력 민족간의 력사분쟁을 선양하고 민족모순을 조작하여 중국인민의 반일련합전선을 파괴하였으며 복잡한 민족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일제가 실시한 민족등급제도와 민족 기시정책의 잔여가 철저히 숙청되지 않은 특정된 력사조건하에서 조화롭지 못한 민족감정은 '참안'의 발생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천고의 한으로 력사의 베일에 가리워졌던 밀산 조선민족의 수난사를 밀산인민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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