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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기억하리 이어가리 그대들의 업적과 유지를!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04.07일 15:03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3)

공화국 건립과 보위서 희생된 조선족혁명렬사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화피창혁명렬사릉원에서 장춘시와 길림시 조선족중학교 학생대표들이 렬사기념비에 화환을 올리고있다. / 신승우기자 찍음

촌마다 혁명렬사기념비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

중국의 저명한 시인 하경지가 지난 50년대 연변을 돌아보고 남긴 시구, 이 유명한 시구로 연변은 전국에 더 널리 알려졌었다.

연변에는 도합 523개의 혁명렬사기념비가 있다. 이런 기념비에는 1만 6300여명 혁명렬사들의 충혼이 담겨있다. 지난 50년대 촌마다 마을마다에서는 한눈에 바라보이는 마을의 제일 좋은 곳에 터를 정하고 마을에서 제일 손재간이 있고 복이 있다는 사람들을 청해 길일을 택하여 시공해 렬사기념비를 세웠다. 준공행사 겸 첫 제사를 굉장히 지냈고 그후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렬사비를 찾아 혁명렬사들을 그리군 했다.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이 지난지도 어언 60년이 되건만 올해에도 청명을 계기로 연변, 목단강, 길림 등 시내와 농촌 각지에서는 남녀로소들이 잊지 않고 렬사기념비를 찾아 렬사들을 기념했다.

연변혁명렬사릉원에 따르면 청명절을 계기로 연길시의 당정기관, 기업, 사회구역, 부대와 학교 등 근 50개 단위에서 연변혁명렬사릉원을 찾아 렬사 추모활동을 가졌다. 4월 1일부터 3일까지 2만 5000여명 시민들이 찾아와 렬사 추모활동을 벌였는데 3일 오전에는 유치원어린이들로부터 70여세의 로인들이 대문안에서 줄지어 대기하는 상황이였다.

18세 청춘에 스러진 영령들

청명날인 4월 4일 오전 길림시 창읍구 화피창진에 위치한 혁명렬사릉원. 《길장제전역렬사묘지》라고 밝힌 렬사비 뒤면에는 연변의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화룡현, 왕청현, 안도현, 훈춘현과 화전현에서 참군해 이번 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족렬사들의 명단이 새겨져있었다.

이날 장춘시와 길림시의 조선족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와 조선족로인협회, 조선족부녀협회와 조선족중소학교 학생대표 100여명이 먼길을 달려 이 곳에 와 우리 민족 렬사들을 추모했다. 그들속에는 조국해방전쟁에서 살아남은 잔페군인들과 렬사들의 유가족 10여명도 있었다.

1948년 2월 15일, 대부분 조선족으로 편성된 독립6사 제16퇀은 길림시 고점자에서 국민당 한개 퇀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투에 뛰여들었다가 상상밖으로 자기들보다 몇배가 넘는 적 한개 사의 병력에 부딪쳤고 무려 여섯차에 달하는 적들의 반격을 물리치며 가렬처절한 교전을 벌였다. 정찰정보가 잘못됐던것이다.

이튿날 아침 촌민들이 나와보니 아군측 전투장에는 시체가 쫙 널려있었다.

그번 전투에 연변으로부터 참군한지 2~3개월밖에 안되는 조선족전사 1200여명이 참가했는데 300여명이 희생됐다. 촌민들과 생존한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아군시체들을 말파리에 실어 날라 웅뎅이에 함께 묻었다. 바람에 나붓기는 붉은 댕기쪼각을 보고 당겼더니 흙속에서 어린 나팔수의 시체가 나왔다는 가슴아픈 이야기도 있다.

화피창렬사기념비에는 이 부근에서 치러졌던 여러 전투에서 희생된 렬사 654명이 묻혀있다. 대부분 조선족. 그중 렬사비에 새겨져 있는 렬사의 이름은 204명뿐. 후에 일부 명단을 찾긴 했으나 6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대부분 무명으로 묻혀있다.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건만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한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

그번 고점자전투에 참가했던 79세의 황삼송어르신. 이번 청명날 추모행사에 참가하여 전우들에게 술잔을 부어드리고 절을 올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우리들 나이 겨우 18살이였다. 전우들을 생각하면 내가 발을 뻗고 자는게 송구스럽다. 쟤들에 비하면 나는 행복하다. 쟤들은 장가도 못가보고 스러졌는데 나는 전쟁에서 살아돌아와 로친이 죽자 후로친까지 맞아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있다.》

그는 1946년 연변 화룡현 룡수평 한 마을에서 친구 8명과 함께 참군했는데 그중 2명이 이 곳 화피창렬사릉원에 묻혀있다.

해방전쟁시기 그의 가정에서는 선후하여 형제 3명이 참군했었다. 19살에 참군한 형님은 후에 조선전선에서 29살 나이에 전사하고 16살에 참군해 항미원조 전선에 나갔던 녀동생은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으며 15살에 나이를 속여 참군했다가 들통이 나 쫓겨 돌아왔다가 이듬해 다시 참군해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선에 나갔던 그는 파편에 다리를 부상당하고 귀국해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당년 화피창 부근전투에 참가했던 정용환어르신, 청명절날 화피창렬사릉원 추모행사에 왔다가 렬사기념비에서 전우 넷의 이름을 찾고는 평소 못마신다는 소주 두잔을 마시고 전우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렇듯 애통해 했다.

《내 군공훈장 어머님께 전해주오》

1946년 4월에 있었던 제1차 장춘해방전투.

길료군구 제23려 동남종대 75퇀은 전부 조선족으로 조직된 《조선퇀》으로 동남종대의 주공부대였다. 퇀장 박락권이 인솔하는 《조선퇀》은 쓰딸린거리를 따라 북쪽을 향해 진군, 적들의 맹렬한 화력으로 여러 차의 진공과 육박전까지 치르고 100여명의 희생을 낸 후 대륙과학원(지금의 장춘응용과학연구소)과 괴뢰시정부를 점령했다.

거센찬 불길에 휩싸여 범, 곰, 꽃사슴, 고래 등 진귀한 동물표본들이 타버리고있는것을 보면서 《장춘이 해방된 후 꼭 이보다 더 좋은 과학원을 세우자》며 려장에게 《려장동지, 우리 고향에 범과 곰이 많습니다. 그때에 가서 전 꼭 몇마리 잡아서 우리 과학원에 가져올텝니다》라고 다짐했던 퇀장 박락권.

29살 젊은 나이에 결혼한지 몇달밖에 안되는 안해를 집에 두고 부대를 거느리고 이번 전투에 참가했다가 적의 총알에 맞아 희생되면서 그가 위생병에게 남긴 부탁은 《내 군공훈장을 어머님께 전해주오》 그 한마디였다.

괴뢰시정부를 탈취하기 위한 육박전에서 배가 적의 총창에 찔려 부상입고 호송되던 도중 역시 부상을 입고 함께 후송되는 사령원에게 《사령원동지… 전 피를 많이 흘려 틀린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기쁩니다…. 은행청사에… 붉은기가 꽂힌것을 보았으니…》 그 말을 남기고 호흡을 멈추었던 《조선퇀》의 부퇀장 고생호.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적 2500여명을 살상하고 1만 4000여명을 포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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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혁명렬사릉원을 찾은 연변공업학교 학생들이렬사기념비 앞에서 혁명렬사들을 추모하고있다. / 사진 홍옥기자


《강철8련》 이야기

해방전쟁시기 중국인민해방군 47군 149사 416퇀 3영의 《강철8련》.

▶ 피로 땅에 글 써 명령 하달한 꼬마:

1947년 10월 18일에 있은 백룡산전투.

탄우속을 뚫고 달려 1패 부패장원형기에게 상급의 명령을 전달하는 꼬마 련락원 리두섭의 목을 총알이 스치고 지났다. 더는 말을 할수 없게 된 그는 피가 콸콸 쏟아지는 상처를 싸매주려는 원형기에게 피묻은 손가락으로 땅에 《임무는 생명보다 중함》라고 쓰고는 쓰러졌다. 그때 그의 나이 17세.

▶ 날창으로 다리가죽 끊은 최성걸:

1948년 10월 하순 천지를 진감한 료심전역. 조선족 8련(당시 9련도 조선족련이였음)은 25일 아침부터 오후 4시반까지 포격과 적기 8대의 기총소사로 하늘땅이 진감하는 속에서 놈들의 돌격을 여섯차례나 물리쳤다.

3반에서 혼자 살아남은 부반장 최성걸. 적들의 포격에 까무라쳤다가 깨여나고보니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고 부서진 아래다리가 무릎살가죽에 붙어있었다. 그는 희생된 전우의 손에 쥐여있는 총창을 빼내들고 무릎에 붙어있는 살갗을 끊어버리고는 둔덕우로 기여올랐다. 자동보총이 불을 뿜자 적의 경기가 벙어리로 되였다.

위생원의 등에 업혀 호송되여 가며 그가 남긴 말은 《지도원동지, 저의 다리를 꼭 이 진지에 묻어주십시오. 이 진지를 지키도록…》 그 절절한 한마디였다.

이날 적들은 2000여구의 시체를 8련 진지앞에 널어놓았다. 8련의 손실도 적잖아 조선족 99명 가운데서 55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후 고쟈위평전투를 거쳐 황쟈위평전투까지 치르고나니 8련에는 20명밖에 남지 않았다.

료심전역과 북평성밖격전

▶ 누룽지 한덩이: 1948년 10월, 사령원 림표가 지휘했던 저명한 료심전역. 금주포위공격전에 참가해 료심전역에서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운 원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44군 131사 393퇀 경위련은 화룡, 돈화, 조양천 등지에서 온 조선족장병 230명으로 구성되였다.

그 가렬처절했던 금주전투에서 적탄에 흉부를 맞아 눈을 감으면서 친한 련락병 최중묵에게 호주머니속의 주먹누룽지를 꺼내주며 《이걸 먹고 힘내서 내 몫까지 싸워줘》 그 한마디를 남겼다는 어린 련락병 박재화의 이야기.

그날 전우들은 그 누룽지를 한쪼박, 한쪼박씩 나누어 눈물과 함께 삼키며 복수의 탄알을 재웠다.

부상당하고도 끝내 또치카화구에 폭파약을 밀어넣어 또치카를 날려보냄으로써 금주전투의 승리서막을 열어놓은 손기섭의 이야기도 있다.

▶ 땅크우에 올라: 1949년 1월 14일에 있었던 유명한 북평성(지금의 북경)밖에서의 격전. 인민해방군 모부 제3영의 조선족 9련의 리윤태와 박현길은 10여대의 땅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보병이 눈앞까지 진군해 오는 위급한 찰나에 앞의 땅크우에 올라 땅크를 폭파시켜 적들 땅크의 진격로를 막음으로써 북평해방에 큰 기여를 했다.

▶ 기자가 만났던 80세의 정용환어르신. 그는 1947년 반석현에서 16살에 참군하여 구전, 화피창, 차로하, 치타무, 중경, 호남, 호북, 이창 해방전투에 참가하고 료심전역, 북평전역 등에도 참가하면서 청춘과 피를 바쳤다.

▶ 80세의 박영준어르신.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손목에 찬 림표사령원과 라영환정위의 조각상이 박힌 군용시계를 내보인다. 1946년 해룡현 농촌에서 16살에 참군했던 그는 그해 겨울,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눈을 헤치고 50근 되는 폭파약으로 통화시 두도강다리를 폭파함으로써 적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는 료심전역을 포함해 크고작은 전투 27차 참가했고 1947년 9월 국민당군대 포격에 왼쪽다리가 끊어져 룡정영예군인학교를 걸쳐 1949년에 전업했다.

그 군용시계는 1998년 료심전역 결속 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해 받은 기념품이란다.

장강도하작전의 서막

1949년 5월 7일, 장강이북에 도착한 43군의 156사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장강도하에서 중요한 도하점인 단풍진에 돌격하여 적들을 섬멸하고 부두를 점령, 선박들을 탈취했다. 이번 전투에서 조선족장병 9명이 희생됐다.

단풍로선 장강도하의 선봉사인 156사의 선두에 선 466퇀은 도하에 성공한 후 또 장강남안의 적들에게서 300여척의 선박을 로획하여 제4야전군 후속부대들의 도하를 보장했다.

호북성 황강현 퇀봉진에는 지금도 도강작전에 참가했다가 희생된 156사의 조선족렬사 43명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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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의 제일대 해군》

1949년 12월, 대륙이 해방되자 장개석은 해남도에 19개 보병사, 해군 제3함대 50여척의 군함(미국제), 공군 4개 대대에 30여대의 전투기까지 배치하여 10여만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제40군에는 조선족포병영이 있었다. 300여명 조선족으로 구성된 이 영은 료심전역, 평진전역으로부터 조국의 서남 계림과 남녕에 이르기까지 수십차의 전투를 걸치면서 해남도에까지 이른다.

조선족포병영은 보병들을 호위하여 안전하게 도해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연변 산골에서 살던 조선족전사들은 헤염칠줄도 몰랐다. 3개월간의 간고한 훈련을 거쳐 끝내 《해상군사》로 육성된 조선족전사들은 《우리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제일대 해군》이라고 자랑차게 말했다.

조선족 항해호위영의 전사들은 참대를 베여다가 배를 뭇고 돛을 달고 포를 설치했다.

1950년 4월 16일 밤, 500여척의 대나무배에 올라탄 우리 군 한개 사의 병력은 좌우 량켠으로 우리 조선족 《항해호위영》의 배 12척의 호위를 받으며 바다를 건느기 시작했다.

약 30리를 항행했을 때 하늘에 국민당 전투기가 나타나 폭격을 해댔고 앞에는 적 군함이 함포사격을 하며 달려왔다. 조선족포병영 전사들은 적함의 배후로 에돌아가 적함에 불벼락을 안겼다. 적 군함은 배머리를 돌려 뿔뿔이 도망쳤다.

아군을 발견하고 함포사격을 퍼붓던 해남도 해안경비군함도 조선족 《항해호위영》의 포사격에 벙어리로 되였다.

배가 해안에 닿자 500여척에 실렸던 아군 보병들은 순조롭게 해안에 등륙, 파죽지세로 적을 무찌르며 돌진해 나갔다.

승리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항해호위영》은 새로운 임무를 위해 배머리를 돌려 대륙으로 향했다. 헌데 도중 량켠으로 갈라져 포위해 오는 적 군함 4척을 발견, 위급한 사태에 전체 지휘원과 전투원들은 최후의 희생을 각오하고 적 군함을 맞받아 돌진했고 400메터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포를 쏘아 적함들을 명중했다.

하지만 적함에 명중탄을 안긴 포사수 조찬수와 부사수 김모는 적탄에 복부를 맞고 장렬히 희생됐다.

후에 40군 군부에서는 조찬수를 군의 전투영웅으로 추인하고 그가 생전에 탔던 배를 《조찬수호》로 명명했다.

남창에서 공화국 탄생 맞아

1949년 10월 1일, 156사의 조선족용사들은 중국인민해방군이 창건된 남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맞는다.

확성기에서 《동방홍》 노래소리에 이어 새 중국 국가로 된 《의용군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렸다. 음악이 끝나자 모택동주석이 우렁찬 목소리로 《중국인민은 일떠섰다!》고 전 세계에 향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장엄하게 선언했다.

순간, 남창의 거리거리에서 경비를 서고있던 조선족전사들도, 남창봉기광장에서 경축대회에 참가한 조선족전사들도 격정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우수한 민족으로 자리매김

우리 당이 령도하는 제156사, 164사, 166사는 완전히 조선족으로 무어진 대오였고 제28사, 29사, 30사의 대부분 성원들도 조선족이였으며 제10종대, 8종대에도 많은 조선족 지휘관과 전투원들이 있었다.

그 간고했던 해방전쟁시기에 3500여명 우리 민족 전사들이 싸움터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쳤고 근 100여명에 달하는 사급 이상 전투영웅과 지구급 이상 모범인물들이 용솟음쳐 나왔다.

공화국 탄생에 바친 선렬들의 피와 목숨의 대가로 우리 민족은 중국의 56개 민족가운데서 우수한 민족으로 자리매김을 한것이 아닐가!

한 누이동생의 헌신

이번 청명날화피창렬사릉원에는 지팽이를 짚은 어르신 부부가 찾아왔다.

바깥어르신은 82세의 김철송. 료심전역에 참가했다가 머리와 다리에 총상을 입고 5급 잔페(그전의 2등 갑 잔페)로 룡정영예군인학교를 거쳐 1950년에 퇴역했다. 김철송씨는 비위생적인 전선에서 마취약도 없이 맹장수술을 받은것이 감염이 와 전선에서와 후방에서 선후하여 다섯차례 수술을 받은 상태였고 퇴역하던 그때에도 복부에서 고름이 줄줄 흐르고있었다.

청명날, 김철송어르신을 부축해온 부인 박춘자(79세)어르신. 안도현 복흥농촌에서 1948년에 입당하고 부녀회에서 활약하던 그녀에게 1950년, 조직에서는 쌍지팽이를 짚고 호리원의 부축을 받아 퇴역해온 김철송씨를 소개했다.

1946년 4월 하루한시에 참군한 오빠와 남동생을 둔 그녀로서는 차마 그 혼사를 거절하지 못했다.

당년 박춘자씨의 오빠는 15살의 남동생을 18살이라고 속여서 데리고 참군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남동생은 살아돌아왔지만 태여난지 6개월밖에 안된 딸애와 안해를 남겨두고 참군했던 오빠는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후에 렬사증이 나오기는 했어도 누이동생 박춘자씨의 마음에는 오빠가 지금도 그 어디엔가에 생존해 있다.

올케는 어린 딸애를 키우며 13년 동안이나 청춘을 바쳐 오빠를 기다리다가 엄마가 강제다싶이 등을 밀어 재가시켰다.

그런 오빠와 동생을 생각하며 박춘자씨는 잔페군인 김철송씨와 호리원 겸 안해로 결혼했다.

김철송씨와 결혼해 지난 60년간 박춘자씨는 평생 혼자다싶이 여섯남매를 키우면서 남편의 지팽이, 팔다리가 되여 묵묵히 고생해 왔다.

기자가 김철송어르신의 퇴직금과 2등 갑 잔페군인 무휼금에 대해 물었을 때 3년전까지만 해도 월 퇴직금이 1000여원이였는데 지금은 올라서 1700원이고 무휼금은 3, 4년전까진 1년에 830원이였는데 최근년에 올라 올해에는 1만 2000원을 받았다면서 만족해 하신다.

금방 졸업한 대학생이 월급2000원을 받는 세월에 조국을 위해 피를 흘렸음에도 나라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분들, 기자는 어르신들 앞에 머리숙여졌고 죄송스러워졌다.

기억하리 이어가리

이번 청명을 계기로 자료들을 수집해 읽고 지금까지 생존해 계시는 중국해방전쟁 참가자들을 만나보며 기자는 조금이나마 알것도 같았다. 우리 민족 렬사들이 이 땅 반석우에 세우려 했던것이 무엇이였고 그분들이 지키려 했던것이 무었이였던가를!

그 점을 알기에 또 그 점을 세세대대로 후대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허다한 우리 민족의 로일대들은 오늘도 자기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경비를 해가며 백방으로 렬사들의 자료를 수집하고있다.

청명날, 화피창렬사기념비 앞에서 장춘시와 길림시 조선족중소학교 학생대표들이 한 선서― 《선렬들이여, 고이 잠드십시오. 우리는 선렬들의 신념을 가슴깊이 새기고 부지런히 배워 선렬들의 피와 생명으로 바꿔온 이 땅을 더 부강하고 더 아름답게 건설할터입니다.》

그래, 세세대대로 기억하리 그대들의 영웅업적을, 세세대대로 전해가리 그대들의 유지를!

편집/기자: [ 홍옥 김정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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