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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할빈해방과 조선의용군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5.12일 10:17
(흑룡강신문=하얼빈) 지금으로부터 70년전인 1946년 4월 28일에 할빈이 해방되였다. 동북민주련군 할빈해방전투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도 참가해 한몫 톡톡히 했다는것을 허다한 사람들은 아마 잘 모를것이다.

  1945년 '8.15'광복직후 할빈 조선족사회는 매우 복잡했다. 위만시대에 한자리 해먹던 조선인관리와 경찰들이 뿔뿔이 남조선으로 도망쳤고 의지가지 없는 백성들은 렬차, 화물차 가릴새없이 무조건 잡아타고 귀향길에 올랐는데 지어는 기관차에 매달려 가다다 떨어져 죽은 사람도 있었다. 비적들한테 쫓겨온 수많은 조선족 피난민들은 지난날 매춘부들이 욱실거리던 도리구 '야나기마찌'(유정~후에 민주대원)에 몰려들었다.



자료사진.

  며칠밤사이에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앉아서 '대한독립당'이요, '민주당'이요 하고 당파들을 대여섯개나 만들어냈는데 모두 당수와 부장들만 있고 당원은 없는 껍데기 당파들이였다. 그중에 한관숙이 묶어세운 한국교민회와 고려청년단이 사람들을 가장 많이 끌어모았다.

  고려청년단은 일본군복에 파란 깃을 달고 견장까지 붙인 반군사단체였는데 전사는 하나도 없고 모두 군관들이였다. 그들은 장차 서울에 가서 한자리 한다면 우쭐대였다. 군중기초가 없는 소당파들은 서로 자기들의 세력범위를 넓히려고 두목들끼리 지상골론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 중학교 (위만시대 대도관 국민고등학교자리)강당에서 군중집회가 있었는데 연단에 올라선 사람은 위만시대 오상현 안가에 있던 만몽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있던 리성근이였다. (그는 후에 서울에 가 리승만밑에서 문교부 장관까지 했다.)

  리성근의 연설내용은 반동적이였지만 전 만주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한적있는 그의 구변은 좋아 모든 청중들이 귀를 기울이고 그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중석 뒤에서 "이보게, 허튼소리 그만치고 어서 내려오시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잘 알고있소." 라고 누군가가 큰소리로 호령했다.

  사람들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한 사나이답게 생긴 청년이서 있었는데 그러나 그와 함께 온 몇사람외에는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자료사진.

  그 청년이 바로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혁명에 참가해 조선의용군에 가입한 김택명이였다. 그는 1943년 당의 지시를 받고 동북 송강성 파언현 동성툰에 와서 비밀리에 조선독립동맹 제12지부를 건립하고 광복후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제1임 지대장으로 되였다. 그는 또 조선정전담판에 참가한 우리측 대표단 부단장 리상조중장이기도 하다.

  난처한 처지에 빠진 리성근은 풀이죽어 연단에서 내려가고 김택명이 연단에 올라섰다.

  "여러분 , 지금 조선 '3.8'이북에는 쏘련군대가 들어왔고 '3.8선'이남에는 미국군대가 들어와 있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민족의 전도를 결정해야 할 이 준엄한 시기에 우리는 과거의 친일파가 하루밤사이에 애국자로 변한 그런 사람들의 허튼소리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그의 연설은 길지 않았으나 광복직후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던 우리 조선청년들에게 환한 앞길을 보여주었다.

  1945년 9월 26일에 할빈시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가 성립되였고 김택명이 대대장겸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였다. 그런데 중경담판 조항에 근거하여 공산당은 동북에서 심양, 장춘, 길림, 할빈 4개 도시를 국민당 군대에 넘겨주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20일에 조선독립대대는 하루전에 할빈에 도착한 주덕해 등 19명 연안간부들과 함께 할빈에서 빈현으로 철거했다.

  1945년 11월 25일에 빈현 배극도에서 전체군인대회를 열고 조선독립대대를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하였으며 김택명이 지대장으로 (후에 리덕산), 주덕해가 정치위원으로, 리덕산이 부지대장으로, 김연이 참모장으로 (후에 관건), 리근산이 정치처 주임으로 (후에 정경호), 관건이 공급처 처장으로 임명되였다. (반년후에 김택명 등 일부 동지들이 조선으로 전근되면서 3지대 지도성원으로 바뀌게 되였던것이다.)

  3지대는 성립된 직후부터 목란, 동흥, 통하, 연수, 오상, 주하(상지)등 여러 현의 토비들을 숙청하고 그곳에 인민정권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할빈에 둥지를 틀고 있던 국민당 반동파가 중경담판 조항을 위반하고 1946년 3월 9일에 할빈에서 중쏘우호협회 회장신분으로 사업하던 공산당간부 리조린장군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러한 정황에서 동북민주련군은 할빈을 포위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946년 4월 28일 할빈을 해방하는 전투에 우리 조선의용군 제3지대도 참가했다는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때로부터 어연간 7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3지대는 할빈에 들어와서 성과 시의 령도기관을 보위하고 비행장, 발전소와 송화강철교 등 중요한 시설들을 보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군대 기률을 감독하는 할빈시 집법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조선인 반동당파 우두머리들을 체포하여 집법대 지하실에 가두어놓고 그들에 대한 사상개조공작도 했다.

  그해 5월에 할빈 조린영화관(후에 아동영화관)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위 대표대회가 열렸는데 3지대 선전대 전사들이 악대 반주로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연주하자 대표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박수를 쳤다.

  단막화극 '학도병'을 위주로 한 노래와 무용절목은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나는 그때 할빈조선중학교 초중2학년에 다녔는데 민족의 연극과 무용을 처음 보았다. 3지대 선전대는 농촌에도 여러번 순회공연을 하였는데 학생들은 모두 그들의 절목을 배웠다. 3지대는 우리 북만에 사회주의 민족문화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6월 4일 단오날에 8구체육장에서 할빈시 조선족축구대회가 열렸다. 이 축구경기에 참가한 단위는 우리 조선중학교, 동명전문학교(조선학교), 한인문화사, 오렌다맥주공장, 조선의용군 제3지대, 민주련군조선인부대였다. 3지대 대렬앞에 선 선전대 악대가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연주하면서 입장하자 관중헉에서는 열렬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할빈에 진주한 민주련군은 그 때 군악대가 없었다. 악대성원이 30~40명이나 되는 3지대악대는 거이 매일마다 할빈 주요거리를 행진하면서 '8로군행진군'과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연주했다. 한족들이 선전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흔들었다.

  그해 6월, 중순에 독립동맹은 민주련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3지대는 동북민주련군 송강군구 제8퇀으로 개편되였지만 대외로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라는 간판을 그대로 걸고 있었으며 퇀급 편재였으나 진운동지의 관심으로 려급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해 8월에 태평구와 고향구에 주둔하고 있던 3지대 중대가 반동무장조직 '홍창회'의 불의습격을 물리침과 동시에 그들을 철저히 섬멸했다. 그리고 9월 2일에는 3대대 7중대 중대장 리영택이하 21명 용사들이 비적들을 물리치는 사리툰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할빈 비행장에서 거행된 그들이 추도식은 장엄하고도 성대했다.

  그후에 해마다 청명절이면 조선족문화관을 비롯한 민족단위 간부들과 군중들이 21명 용사묘지에 찾아가 술을 붓고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그곳에 찾아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1947년 5월에 3지대 한개 대대는 민주련군 철도호로대로 개편되여 가목사에 가서 민주련군의 무기를 보관하고 운동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8년 4월에 주덕해동지가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전근되고 3지대는 상급의 명령으로 리덕산지대장의 지휘하에 길림성연통산일대로 진출하여 장춘해방전투와 료심전역에 참가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와 주덕해동지는 할빈에 있은 2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토비숙청과 할빈을 보위하는 군사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여 상급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 외에도 많은 일들을 하였다.

  교도대를 조직하여 수많은 군사간부와 지방간부들을 양성하였다. 토지개혁시기와 사회주의건설시기에 북만농촌의 조선족간부들은 거이다 3지대 교도대 출신이였다.

  위생대를 건립하여 부대의 위료문제를 해결하였으며 많은 의무일군들을 양성하였다. 조선전쟁후에 할빈시 조선민족병원에서 사업한 의무일군만해도 7~8명이나 된다.

  운수대와 북흥공사 등 기업체를 꾸리고 탕원현 탕왕, 삼과수와 천항구(지금의 도리구 민주향)에 농장을 개척하여 부대의 경제곤난을 해결하였으며 많은 피난민들을 안치하였다.

  3지대는 특히 북방의 민족문화교육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족중학교와 소학교에 훌륭한 교장과 교원들을 파견하였고 각지에 건립되였던 불완전한 민족중학교들을 통합하여 송강성 제1조선중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3지대 선전대는 많은 문예인재들을 양성하였으며 그들의 순회공연은 북방 조선족문예발전에서 본보기 역할을 했다.

  할빈해방 70주년을 맞으면서 할빈해방에 공로가 있는 조선족의용군 3지대 지도자들과 주덕해동지를 그리면서 이글을 한 사나이답게 생긴 청년이독자들에게 내 놓는다.

  /김종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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