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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중국의 그라운드를 후끈 달군 전설의 축구명장 안원생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6.16일 09:14

- 안중근의사의 친조카 축구명장 안원생에 대한 이야기

  [편자의 말]

   편집자: 새중국 이후 중국축구무대에서 우리민족은 축구에 대한 무한한 사랑, 천성적인 축구기질, 용맹한 풍격, 높은 축구수준으로 많은 축구인재들을 배출하면서 중국축구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중국축구의 고향으로 불리우면서 전국축구중점지역 등 영예를 한몸에 안고있다. 개혁개방이후에도 연변축구는 장기간 전국 최고무대에서 활약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확립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은 하루한시에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새중국의 건립되기 전부터 우리민족 축구는 중국축구무대에서 자랑스러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 적지않은 대표적 인물들이 배출되였다.

  오늘 소개하는 분은 그중의 대표적인물로 바로 유명한 의사 안중근선생의 조카 안원생선생이다.

  저자 김원범선생은 기자출신인데 다년간 중국조선족축구사와 인물에 대한 발굴작업을 해온 분이다. 그동안 그가 쓴 조선족축구관련 문장들은 국내 신문간행물과 한국신문 등에 많이 발표되였다.

  중국 조선족축구발원지인 룡정시 덕신골에서 태여난 그는 조선족 축구사와 인물들을 발굴하기 위하여 국내는 물론 조선, 한국에까지 가서 자료발굴을 했다. 그는 2006년 1월 9일 길림신문에 “돌이켜보는 축구명장들”이란 글을 발표하기시작하면서부터 다른 주제의 실화문학을 쓰던데로부터 축구팬들이 신금을 울리는 축구실화 창작에 더 힘을 기울이였다. 2007년 실화 “옛날 덕신은 뽈개지 천하였다”는 청년생활잡지사가 주최하는 제5회 화신문학상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로써 축구제재로 조선족문단에서 문학상 금상을 탄 첫수상자로 되였다.

  지난해 길림성팀 설립 60주년과 전국갑급련맹전 1등 50주년을 맞으면서 조직한 부덕컵 촬영작품평의에서 그의 두 작품이 우수작품으로 선정되였다. 그의 작품은 주정부대청과 체육장에 전시되여 있다.

  김선생은 조선족의 축구사와 인물들을 더 발굴하기위해 한국에 자주 다니면서 한국의 체육사 자료들을 연구하던중 한국의 “백년축구사”에서 안중근의 친조카 안원생이 중국축구사업에 기여하였다는 실마리를 찾게되였다. 그는 한국의 연세대학, 고려대학 등의 도서관과 박물관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또 중국의 여러 도서관과 연변대학 , 축구계 로교수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안원생의 축구생애를 발굴하게 되였는데 3년 남짓의 시간이 걸렸다.

  오늘 본지는 그가 수집정리한 안중근조카 안원생과 중국축구의 인연을 다룬 실화를 게재한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올해는 길림성팀이 설립된지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 전국갑급경기에서 우승한 50주년되는 해이다. 그리고 15년만에 다시 1등 신분으로 슈퍼리그에 진입한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우리 조선족 축구건아들은 건국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중국의 축구사업을 위하여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필자가 소개하자고 하는 축구영웅 안원생명장도 례외가 아니다. 비록 연변팀을 위해 공헌한 일은 없지만 연변팀과 위만주국팀의 선수로 활약한 박익환, 리혜봉, 정수일(모두 룡정시 덕신향 출신임) 등 선수들과 함께 뽈을 차온 명장이다. 금년 길림성팀설립 60주년과 연변팀 우승 50돐을 맞이하는 나날에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애국지사 안중근의 친조카 안원생명장을 축구선수와 축구를 사랑하는 팬들한테 소개하련다.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은 잘 알고있으나 그의 친조카인 안원생(安原生)선생이 축구명장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거의 모르고있다. 안원생이 중국 축구에 큰 공헌을 했다고하면 더구나 처음으로 듣기에 귀를 갸우뚱할것이다. 안원생선생이 중국 체육사업에 남긴 족적이 문헌에 밝혀져 있기에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의 업적에 대해 필자는 구김없이 이 글을 정리하여 써내려갈수 있게 되였다.

  안원생선생은 20년대로부터 40년대 중반까지 축구선수이자 코치로 또한 롱구명장으로 근 30년간 중국체육마당을 주름잡으며 이름을 떨친 체육명장이다.

  안원생은 황해남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출생했다. 안원생의 아버지 안정근과 큰아버지 안중근은 그의 할아버지인 안태호(安泰镐)한테서 태여났다. 안태호의 아버지는 안인수(安仁洙)로 그 당시 부유한 가정이였다. 안원생의 아버지 안정근은 1918년 음력 11월, 39명이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한사람이다.(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에서 참조) 그리고 그들은 자식들의 교육을 중시하는 가문으로 조선 황해도에서 이름이 높았던것이다. 전 가족을 데리고 일찍 고향을 떠나 아래간도(지금의 로씨아연해주)에서 살았다. 륙군참모중장(中将)으로 있었던 안중근은 로씨아에서 부대생활을 하다보니 가정을 돌볼사이 없었다. 백군과 로씨아군대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은 두 가족을 데리고 중국 흑룡강성에 들어와 생활하게 되였다.

  안정근과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할아버지 안인수한테서 어려서부터 교육을 잘 받아왔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아 안정근은 안해와 함께 원생과 안중근의 큰 아들 준생의 앞날을 위하여 철도돈벌이도하고 화전도 일구면서 부지런히 일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글공부에 신경을 썼는데 그의 엄격하고 인자한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사실 리률곡의 어머님처럼 교육한데서 두 사촌은 공부도 잘하여 상해에 류학까지 가게 되였다. (주: 한국의 5천원권지페에 찍혀있는 분이 리률곡(1536~1584)이다. 그의 어머니는 신씨이고 신사임당(1504~1551)이다. 저명한 미술작가이자 교육가이다. 아들 리률곡의 공부를 위하여 이 마을 저 마을을 선후하여 네번이나 이사다니면서 이주하였다. 지금 한국의 5만원권 지페에 찍혀있는 인자한 녀성이다.)

  안원생의 가족관계는 문헌에 똑똑히 밝혀져있다.

  한국 림시정부 ≪독립신문≫ 1920년 1월 3일 안중근의사의 (安重根) 유족(遗族)을 다룬 기사에서는 “…安定根氏의长子는原生、安重根氏의长子가俊生两君의 교육을 위하여上海에亲留하였다…]고 하였으며 [安定根氏는健在한 몸으로 간신히黑龙江省穆稜县东清铁道租借地에서 수년간一家를 지지하게 되였다…]고 씌여있다.

  일본의 데레비또라미(市川正明者)가 “안중근과 일한관계사(安重根和日韩关系史)”에서 밝힌 가족관계에 의하면 안정근씨의 큰 아들은 원생(原生)으로 되고 안중근의사의 큰 아들은 준생(俊生)으로 되여있다. 뿐만아니라 중국의 《민국일보》와 《대공보》에서도 안원생으로 밝혀져있다.

  그후 20세기 20년대부터 화동지구를 위주로 축구가 발전하자 북경, 천진 등지에 축구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천진이나 북경에 주재한 외국인들끼리 축구놀이를 하였으나 많은 중국인들은 축구운동을 시답지 않게 보고 있었다.

  20세기30년대에 들어서서 화동지구의 체육운동발전은 이미 화북지역을 능가하엿다.(谷世权《中国体育史》下册,近代部分P96.)(참고 )상해는 전국체육발원의중추(中枢)였다.그러나 구중국에서 화동지구의 지역성적인 운동화는 개최되지 않았으며 남경과상해를 포함한 《东方八大学运会》를 개최하여 륙상,구기(球技)등 체육종목에서 인재들을 육성해나갔다.

  1920년과 1921년에 상해의复旦大学과 남경의东南大学이 가입하여 《华东八大学体育联合会》가 개체되여 해마다 빈번한 축구경기를 벌려왔다.당시 상해는 축구운동이 크게 성행하였다.무엇보다 상해에 주재한 서구라파(西欧)의 여러 축구인들과 왕래가 빈번함은 물론 외국인들이 많아 극동지역(极东地区)에서는 축구기술이 가장 높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였다.(민국일보 1927년 5월 10일 제3장에서 참고)

  안원생선생은 월리암스대학을 거쳐 상해교통대학을 졸업한 축구명인이였다.

  중국체육문사자료편찬위원회의 《체육사료》제10기에 서소무(徐绍武)선생이 1984년에 쓴 “나의 회억”이란 글에는 ”상해의 남양대학(南洋大学)(지금의 교통대학)은 당시 당문치(唐文治)총장이 특별히 축구운동의 발전을 제창하여 영국인 Lelic씨를 초청하였고 조선반도의 축구명장(足球名将)들을 많이 끌어들였다. 화동8대학체육련합회가 설립된후 각 대학간의 축구경기는 아주 정채로왔으며 그 가운데서 가장 표현이 돌출한 팀은 안원생이 소속된 남양대학과 월리암스대학이였다.》라고 적혀있다.

  중국 《민국일보》의 민국 19년(1930년) 1월 2일자에는 “…신국권, 안원생 등 주요 선수들이 축구기술이 매우 뛰여나 상해판을 들썽해놓았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서소무는 또 금릉중학교의 축구운동의 유래를 소개하였다. 이 학교는 반급과 년급에 축구팀을 두고 잦은 경기를 벌렸는데 매주 토요일이면 남경에 주재하고 있었던 영국군함축구팀이 자주 찾아와 축구경기를 벌리고 있었다. 이는 이 학교의 축구기술의 향상에 일정한 역할을 일으켰다. 안원생은 바로 이 축구경기에서 이름을 날렸던 축구명장이였다(서소무는 제5회 극동선수권대회 중국 륙상선수였고 또한 극동선수권대회 중국축구팀의 선수였다).

  안원생선생은 1922년 6월 상해류학생축구단의 일원으로 첫 조선방문 축구경기에 참가하면서 조선의 축구무대를 누벼나갔다. 선후로 평양, 경성, 마산 등에서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결과는 5승 1무 2패의 성적을 올려 평양과 서울 등 지의 관객들과 축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였다.

  한국의 축구백년사사전에는 “…안중근의사의 친조카인 안원생선수도 교통대학의 축구팀과 함께 조선에 와 축구실력을 보였다…”고 적혀있다.

  1930년에는 안원생은 상해교통대학 축구명장이라는 명성을 안고 졸업하였다.축구명장이였던 신국권(申国权)교수가 이끈 연희전문대학팀은 1927년 12월 경성(지금의 서울)의 연회전문학교(지금의 서울연세대학)의 축구팀감독으로 동물을 싣고 다니는 배(生驹船)를 리용하여 상해시 사천로 중국청년회에 머물면서 4차례의 경기를 가졌다. “민국일보 1929년 1월 17일자에서(참조)]”연세대는1927년 12월 25일 한국축구사상 처음으로 출국한 축구팀이다.”(연세대학 70년 축구사에서) 안원생의 알선으로 1935년 4월 평양체육회도 상해 축구계의 패왕(霸王)이라고불리우고있는 동화축구팀을 초청하였는데 조선원정에서 모두 3차례의 경기를 진행하였다.

  1926년 안원생은 상해 교통대학팀의 주장직을 맡고 두번째로 조선방문을 하였다. 교통대학팀은 7월 26일부터 3일간 경성(서울)에서 머물고 8월 1일 평양광성체육운동장에서 상해남양대학, 경성연희전문학교, 부전전문학교(고려대전신 ), 일본도꾜대학, 오사까대학 등 10여개의 팀과 경기를 가졌다. 1926년 8월 1일 부터 평양에서 열린 경기에서 상해남양대학팀은 좋은 성적을 올리고 돌아왔다.

  그는 교통대학축구팀의 주장직을 맡았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1934년부터 1936년기간 북경연경대학(지금의 북경대학전신)의 축구팀의 감독으로 축구무대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1934년 4월 조선인축구팀은 중국방문 세번째 경기를 천진에서 치뤘다. 천진에서의 마지막 친선경기에 안원생선생이 출전하자 관람석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안원생, 안원생》하면서 환영하였다. 그번 경기에서 조선팀과 지기는 했어도 안원생의 두드러진 솜씨는 수많은 관중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안원생축구명장은 조선의 선진축구기술을 중국에 접목시키기에 일조하였다. 그는 조선에 자주 련계를 달아 축구단을 요청하고 한 차례의 경기를 하는데 끝인것이 아니라 중국의 여러 축구팀과 친선경기를 하도록 알선하여 축구기술을 배울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엇다.

  1936년 4월 평양축구팀은 최일(崔一)의 인솔하에 두번째로 천진시 축구계를 방문하였다. 천진시에서 출간한 1936년 4월 22일 《대공보》(大公报)는 “이번 평양축구팀은 북경 안원생선생의 알선으로 천진과 천진주재 서양인축구팀과 교섭한 결과 경기를 가지게 되였다.”고 기사에서 밝혔다.

  안원생선생은 중국인민의 친선발전과 축구사업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또한 조선 축구사업발전에도 지대한 관심을 돌렸다(1936년 4월 28일 대공보에서<참조>).

  안원생명장은 상해 남양대학 (南洋大学,지금의 교통대학)팀의 선수로 또 주장직을 맡으면서 교통대학을 강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학교의 사생과 상해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이름도 전국에 알려지게 되였다. 그당시 《민국일보》1930년 10월 17일신문에 안원생선생의 모교이자 축구팀의 선수로 있던 상해교통대학을 소개하면서 《…어머니처럼 체육에 많은 공헌을 한 학교이다…》라는 평가를 내렸으며 《…금년에 졸업하는 건장(健将)속에 사회와 교원,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안원생이 들어있다…》고 썼으며 이해 《민국일보》는 10월 19일신문에서 교통대학을 《…축구명인이 나오는 발원지이다…》라고 소개 하였다.

  중국에서는 조선인청년들의 체육열정에 감화되여 처음으로 중국인 자체의 체육조직이였던 《중화전국체육협진회》<中华全国体育协进会>를 발족하였다.

  그후 안원생선생은 《협진회》와 《중화축구련합위원회》의 초청으로 중국 축구발전에 대한 좋은 건의도 내놓았고 기술지도도 늘 해주었다.

  1931년 6월 5일과 9일《민국일보》는 “…그들은 사회적으로 신임을 받은 출중한 능력과 재질을 소유하고 있었다. 권위있는 체육가였고 전사회의 신임을 받는 체육문인(体育闻人)이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안원생선생은 화동과 화북지구를 망라하여 중국축구무대에서 공인하는 축구명장이였다. 안원생은 뽈다루는 재능뿐만 아니라 품격도 널리 인정을 받았다. 민국일보에 따르면 상해에서 가장 우수한 축구선수로 선발되여 1929년 12월에 있은 중화팀과 서양인련합간의 자선경기를 벌려 그 모금을 생활이 극히 어려운 지역에 지원한 안원생의 미담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30년 6월, 아시아 축구계의 혜성으로 불리운 리혜당(李惠堂)은 중국에서 제일 날랜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축구발원지인 영국 등 7개국을 순방할 계획을 세웠다. 리혜당의 락화(乐华)축구팀은 이해 상해만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따내여 명성이 높았다. 락화팀은 화남지구와 싱가포르의 몇몇 명장들까지 유치하여 천국(天国)의 정예부대로 원정길에 나선다는 전략이였다. 그때의 축구선수들로는 리혜당, 리녕, 풍운우, 진진화(陈镇华), 진가구, 대경록, 안원생, 주보책, 조계성, 진광요와 싱가포르의 화교선수 몇 명이였다.

  축구팀 일행은 7월 2일 상해를 출발하였으나 일부 선수들이 사정으로 떠나지 못한데다 또 경제난으로 다만 남양(南洋) 등지에서 23차의 축구경기를 가져 13승 6무 4패의 전적을 기록하였다(<민국일보> 1930년 6월 27일, 7월 2일 기사 참조).

  광복전 천진시는 중국에서 체육운동이 비교적 빨리 전개된 지역의 하나였다.이러하였기에 전시 축구경기와 만국축구련합회대회가 개최될수 있었다. 천진에는 외국인들이 주재하는 팀들이 많았다. 《서양상인(西洋商人)≫팀, 프랑스공학팀, (외국인자제학교)외 영국군인팀으로는 A, B, C, D팀들이였다. 중국팀으로는 남민(南敏)팀, 중화팀, 북녕팀 등 팀이였다. 력대의 만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서양상인팀이 줄곧 1등을 차지하였다. 1936년 봄, 천진시체육대회가 개최되였다. 서양상인팀과 안원생명장이 소속된 북녕(北宁)팀이 맞붇게 되였다. 천진에서 줄곧 최강을 자랑하는 서양상인팀은 이번 대회에서도 의례 1등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북녕팀과 격돌하게 된 서양상인팀은 자못 기세가 등등하였다. 서양상인팀은 챤스가 많아 플레이로 가슴을 서늘케 하는 슛을 련발되기도 하였다. 북녕팀은 서양상인팀만 꺾으면 기타 팀보다 버거운 적수를 제칠수 있었다. 많은 관중들도 서양상인팀이 이기리라 짐작했다. 한것은 일사천리로 내달리는 서양상인팀을 어느팀도 꺾은적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북녕팀은 약세이면서도 패기가 높아 튼튼한 방어를 구축하는 한편 절호의 챤스를 바싹 노리였다. 북녕팀은 비록 서양상인팀과는 실력차이는 있었으나 팀에는 공격수인 안원생명장에 또한 30년대초부터 간도성(지금의 연변)팀의 문지기로 활약하면서 전 만주국에서 이름나 있는 리혜봉키퍼가 있어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리혜봉은 연변과 동북3성뿐 아니라 조선반도와 일본렬도전역에 소문놓은 룡정시 덕신향 출신인 박익환명장과 간도팀, 만주국국가팀에서 함께 공을 다루어온 선수였다. [리룡수와 리혜봉선수도 덕신향 장동촌 출신임](룡정시 체육사에서 참조)리혜봉은 박익환선수가 1930년 중기에 조선에 나가자 중국관내로 들어가 천진북녕팀에 합류하였다. 팀에는 튼튼한 방어수인 조선인 리룡수선수도 들어있었다. 서양상인팀은 안원생만 잘 알고 있었지 기타 두 선수에 대한 료해가 크게 없었다. 문지기 리혜봉은 서양상인팀의 아슬아슬한 강슛을 멋지게 막아내여 여러번 위기를 돌려놓았다. 전반전까지 두팀은 줄당기끝에 무승부로 끝났다. 후반전에 들어서 종료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중간방어수인(하프) 손사경이 패스해준 공을 공격수인 안원생이 상대방 중앙방어수를 재빨리 따돌리고 20여메터 거리에서 장거리 강슛을 날렸다. 서양상인팀의 꼴키퍼가 급작스레 날아오는 공을 막을 사이도 없이 공은 왼쪽 문대꼴 그물을 갈랐다.

  《꼴! 꼴!…》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북녕팀의 꼴에 환호하였다. 서양상인팀은 중국팀에서 이런 급작스러운 강슛이 나오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하긴 서양상인팀은 여지껏 중국팀과 치른 많은 경기에서 중국팀의 짧은 패스에만 익숙해 있었다. 서양상인팀은 뒤진 판도를 돌려세우려고 드센 공격과 함께 가슴을 조이게 하는 아슬아슬한 슛을 수없이 날렸다. 나중에 두팀 선수들은 체력이 떨어질때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상하거나 레드카드가 나와 퇴장을 맞거나 체력이 떨어져도 다른 선수를 교체시키지 못하는 규정이 있어 서양상인팀은 불운스레 북녕팀의 드센 역습을 막아내기 어려웠고 방어선은 더구나 뚫지 못하고 말았다. 두팀 모두 상대방의 문전에 추가꼴을 넣지 못했다. 결국 1:0으로 북녕팀은 기적을 일궈내고 말았다. 여지껏 천하무적 최강이라고 으쓱해하던 서양상인 팀을 전승하자그 위세에 눌려 다른 팀들은 맥없이 무너졌다. 북녕(北宁)팀은 모든 적수를 누르고 우승을 따내여 중국인들의 기개를 과시하였다. 그당시 북녕팀은 장대(壮大)시기였다. 이 팀은 가장 강한 팀과 멤버들을 갖고있었다. 이 팀에는 진우덕, 리청오, 장학요, 담복정, 안원생, 손영천, 손사경, 황품장,리혜봉, 손복래, 강로, 량명종, 관학중,정룡수 등 뜨르르한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당시 식민지의 억압속에 눌려 있던 천진시 인민들은 일제를 중국에서 몰아내자면 체육을 통해 신체단련을 잘하여야 한다는 신심을 터득하게 되였다.

  안원생명장을 비롯한 조선인체육인들이나 예술인, 문인, 지식인들은 적지않게 체육과 인연을 맺았고 체육을 통해 사회안목을 넓혔으며 부동한 일터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목표에로 돌진해 나아갔다 .

  최경택의 《김엽에 관하여 》,《중국 조선인물지》등을 보면 김엽(원명 김덕진)은 체육을 몹시 즐기였다. 그는 롱구, 수구, 수영, 야구 등 체육을 즐겼는데 특히 롱구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천진남개중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남개롱구팀의 5명 맹장속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후 1932년에는 련화영화공사에서 련화라는 롱구팀까지 내놓았다. 점프에 능한 그는 명중률이 높아서 중견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제일 인기를 끄는 축구대회를 빌어 선진적인 지식인들은 일제의 침략죄행을 폭로규탄하고 반일민족사상을 선전하군 하였다.

  《간도신보》1926년 9월 12일자에는 “반일지사이며 저명한 시인인 윤동주는 학생시절에 체육에 커다란 흥미를 갖고있었으며 일찍 명동학교와 은진중학교의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낮이면 경기장에서 땀을 흘리다가도 밤이면 열심히 책을 읽거나 교내문예지의 원고를 늦게까지 쓰군 하였다.》는 기사를 실어 윤동주시인의 체육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룡정은진중학은 축구명장 박익환을 비롯한 명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학교이기도 하다.

  안원생선생이 소속된 북녕팀이 외국인팀을 제치고 우승을 따내자 천진시인민들의 환희와 존경을 받게 되였다. 당연히 안원생선생도 이러한 대접을 받은 선수로 되였다. 《천진축구운동사》, 《체육자료》 제10기 에서 이같은 내용들을 찾아볼수 있다.

  1936년 1월 북경 5개 대학축구팀은 올림픽화북지역의 예선 선발경기에 참가하였는데 선발위원회에서는 마요한(청화대학교수이자 중국의 유명한 체육교육가) 안원생선생 등 5명 위원이 참가하였다 .

  안원생선생은 북경보인대학(北京辅仁大学)팀의 코치를 맡은 외에 북경축구팀의 코치로서도 활약하였다.

  안원생선생은 화동지구, 화북지구에 살고있는 조선인의 축구 및 구기운동의 발전 나아가 화동지구의 축구사업에서도 자기의 심혈을 기울였다. 화동지구의 상해와 남경 등지의 축구운동이 날로 흥성발전됨에 따라 이곳에서 류학했거나 천입(迁入)해온 조선인청년들의 축구운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조선인이 많아진 곳에는 축구팀 등 체육조직이 하나하나 나지게 되였고 점차 체육실력을 높이 쌓아갔다.

  1934년부터 1942년사이만해도 북평(지금의 북경)에는 2만 5천여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살고있었다. 그당시 북평선농단(先农坛)경기장에서 있은 학교대항륙상대회에서 조선인 륙상선수들도 몇백명의 선수들속에서 달렸다. 그속에서 중학교 중등부에서는 리달생(李达生)이, 중학교 고등부에서는 리정선(李正善)이, 사회부에서는 최재술(崔在述)이 륙상중장거리에서 선두를 지키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북경에 있는 조선인 유지인사들이 모여 연우축구단(燕友足球队)을 꾸렸으며 북경축구리그전에도 나섰다. 이 시기에 상해에 거주한 조선인은 약 1만 7천명에서 3만 5천명으로 상해만국운동회에 자기의 체육팀을 꾸릴만큼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조직은 바로 상해 계림(鸡林)팀이였다. 물론 조선인 체육팀의 창립은 일정한 시간을 경과해야 했지만 상해의《민국일보》는 이미 상해에 주재한 조선인의 축구팀과 롱구팀을 고려팀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이러한 명칭자체의 산생은 조선인들의 거주조건이 완비하게 구전된데다가 존재 자체가 주변에 영향력을 가져다준다는 확인이였다.

  신문기사와 력사자료들에서 구중국에서의 조선인 체육활동을 살펴보면 1922년 8월과 1926년 화동지구의 동치대학(东治大学), 중화공학대학, 하문대학, 성요옹대학, 노구대학에서 공부하던 조선류학생축구팀이 모국을 방문하였다는 자취를 찾을수 있다. 그리고 《고려축구팀》 소개도 있다.

  중화민국 17년(1928년) 10월 26일 부는 상해의 한교(韩侨)축구팀이 작년(1927년)중화축구협회 제2조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던 군진(群进)팀을 4대 0으로 이겼다고 하면서 고려팀은 인재가 정비한 팀이라고 소개하였다. 10월 23일 신문에는 상해교통대학팀이 명성이 높았던 상해고려축구팀을 전승하는데 안원생이 공로가 컸다고 쓰고있다.

  한편 1929년 조선축구팀이 상해원정경기전 먼저 상해의 고려축구팀과 먼저 몸을 풀었다고 하였으며 1928년 12월 6일, 경성연희전문대학(지금의 서울연세대학)의 축구팀도 상해를 방문했을 때 먼저 고려축구팀과 련습경기를 가졌다는 기사도 있다.

  《민국일보》1930년 11월 6일의 기사에서는 고려팀은 상해의 교민들로 모아졌는데 축구의 건장들로서 실력이 대단했고 그만큼 실력이 강한 프랑스 함대축구팀과의 경기에서 후반전에 한골을 내주고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고려축구팀의 실력이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쓰고있다.

  안원생선생은 일찍 상해서 공부하던 상해교통대학 축구선수로 활약하면서 상해교포팀과의 자주되는 경기를 통해 교포팀을 관심해왔다.

  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 북경과 상해에는 조선인으로 꾸려진 연우축구팀과 계림팀, 40년대에는 순덕(顺德) 등 조선인 축구팀과 중경의 조선인청년축구팀들이 있었다. 그때는 조선민족청년들이 집결되여 있는 곳이라면 의례 축구운동이 펼쳐졌다. 중국의 하남성에 특대 홍수가 져서 수천만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리고있다는 소문이 중경에 전해지자 당시 중화전국아동복지협회 주석으로 있던 송경령녀사는 재해지구 리재민들을 구제하려는 취지로 재해구제축구의연경기를 발기하였다. 한청(韩青), 호성(沪星), 동평(东平), 영련(英联) 등 네개 팀이 초청을 받고 경기에 참가하여 사흘동안의 경기에 얻은 수십만원의 입장료수익을 재해지구에 의연하였다. 페막식에서 송경령녀사는 각 팀에 금기를 수여하였고 선수들에게 《하남성재해구제모금집축구의연기념 송경령 증》이라고 새겨져있는 메달을 수여하였다. 그 당시 한청팀은 중경에 있던 조선민족청년들로 조직된 축구팀이였다(중국조선민족 체육사에서 <참조>).

  북경의 연우축구팀은 1938년에 설립되였다. 그후 조선 평안도 출신인 문사철(선수)외 2명이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림시정부의 련락원과 내통한 사실이 일본특무기관에 발각되여 전 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2명 축구선수는 고문에 죽기까지 하였고 문사철을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불구자로 되였다.

  1946년에 상해의 계림팀은 상해 최강팀들인 동화, 청백, 합군팀, 그리고 이딸리아, 이슬레, 영국해군, 러시아팀이 참가한 리그전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때 계림(鸡林)팀은 상위권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계림팀이 해산됨에 따라 1946년 3월 계림팀의 대부분 선수들은 귀국선에 올라 조선이나 미국으로 떠났는데 안원생선생도 조선으로 갔다. 그후 그의 일가와 안씨 친척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가서 생활하게 되였다. 안원생이 친 6촌동생인 안춘생은 한국의 장군으로(1927-2011)있다가 별세하였으며 지금도 미국에는 올해 81세나는 안중근의 친손자 안웅호씨가 생존해 있다.

  이상에서 보다싶이 중국 화동지구에서 조선인들의 축구운동은 20세기 2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1946년까지 근 30년간 꾸준히 맥을 이어왔다.

  안원생선생은 축구명장이기도 하고 또 롱구명장이기도 하였다. 상해만국롱구선수권대회는 1925년에 시작하여 1937년까지 매년에 한번씩 이어졌다. 그때 참가한 팀들로는 상해의 중화팀, 미국, 영국, 뽀르뚜갈, 유태인, 고려, 카나다, 화교 등 팀들이였다. 《민국일보》는 1928년, 1930년, 1931년의 고려롱구팀의 활동상을 이렇게 기사화하였다. 《…그때(1928년 3월 16일)에는 고려팀의 진영에는 최찬학, 최비덕, 리규홍, 안원생, 함규형, 최경섭이였으며 1930년 3월 2일에 출전한 선수들로는 허택, 박제도, 조혜국, 송기수, 최동현, 안원생, 길련기, 한규영이였고 1931년 2월 24일에는 허택, 오자승, 안원생, 리규홍, 송덕표, 장운기 등 선수였다…》고 적었다.

  1928년 3월 26일, 만국롱구대회에서 34대 31로 그 이듬해인 3월 21일에 있은 상해만국롱구대회에서도 39대 35, 41대 23으로 뽀르뚜갈팀을 큰 차이로 이겼으나 중국과 미국팀에는 아쉽게도 지고 말았다.

  안원생선생은 상해에서 류학하는 기간에 학습과 체육사업을 잘하는 한편 조선인 녀자롱구에도 큰 관심을 돌렸다. 그는 조선인 녀자가운데서 롱구싹수가 보이면 인츰 그들한테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후에 상해조선인 녀자롱구팀은 상해서 상위권에 속하는 동남대학팀과 자웅을 겨룰만치 성장하였다. 조선인녀자롱구팀이 1928년 4월 4일 사상 처음으로 상해에서 동남대학과 친선경기를 가졌다는 기사를 ≪만국일보≫에서 찾아볼수 있다.

  여기에서 보다싶이 안원생선생은 축구명장이자 롱구명장(名将)이였다. 고려롱구팀은 중국인팀과 미국인팀에는 차했지만 뽀르뚜갈팀과 유태인팀 등 팀을 큰 차이로 따돌리는 실력을 과시하였다. 상해만국롱구선수권대회는 중국현대체육사에도 기재된 당시로는 중국사회에서 업적을 쌓아 그 명성이 날따라 높아갔으며 그 위망과 위훈이 긍적되였다. 그들은 조선인 자체의 리익에 부합되는 유력한 사업을 추진하였을 뿐만아니라 중국과 조선인들의 친선을 축구와 롱구라는 매개로 이어놓았다. 체육명인로서의 품성과 자질을 갖춘 안원생선생은 상해와 북경, 천진 등 지역에서 공인하는 체육계의 예인(艺人)이였다.

  안원생명장은 30년대에 북경보인대학(지금의 북경대학 참고:북경대학은 보인대학으로부터 연경대학으로 후에 북경대학으로 되였음)축구팀의 코치로 사업하였으며 1936년 4월에는 북경보인대학축구팀과 롱구팀의 30명을 거느리고 일본체육계 인사들의 초청을 받고 도꾜와 오사까의 대학도 순방하였다. 안원생선생은 1936년 1월, 중국화북지구의 코치로 상해에서 열린 전국올림픽 축구선발경기에도 참가하였다.

  안원생선생은 중국의 체육가인 청화대학의 마효한교수와 사업했던 저명한 인물이였다. 1956년부터 1982년까지 국가체육운동위원회 구류사 부사장이였던 북경대학 축구명장 리봉루(李凤楼)의 코치로 있었다.

  1932년 7월 30일부터 8월까지 미국 로스안젤스에서 제10회올림픽대회가 개최되였다. 당시 중국사회는 일본이 1931년 《9.18》사변을 발동하여 중국의 동북3성을 점령하면서 극심한 암흑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니 당시 민국정부로서는 체육에 관심을 둘 경황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이때 고약한 일본은 《위만주국》을 올림픽대회에 내세우려는 궤계를꾸미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체육협진회는 총간사인 심사량선생(월리암스대학 총장)을 관찰원으로 파견하려했다. 일본의 음모와 맞서 100메터 10초 7의 전국기록 보유자인 류장춘의 코치 송복군, 그리고 미국 류학생 류설송(刘雪松)등으로 중국체육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신국권교수와 안원생 등 조선인들의 도움으로 7월 30일 올림픽개막식에 참가하는 쾌거를 이루게되였다.

  안원생선생은 상해교통대학에서 진진화(陈镇和, 중국의 유명한 축구선수) 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해내여 화동과 화북지구의 축구운동발전에 중대한 업적을 남겼다.

  안원생선생은 해방전 일찍 축구무대를 통해 조선축구팀, 연희전문대학축구팀(지금의 서울연세대학), 평양축구팀 등의 중국방문과 중국주재 조선류학생, 조선방문 및 중국인 화동팀 등 팀들의 조선방문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하여 중국과 조선인민들간의 친선을 촉진하였으며 체육인사들간의 래왕과 교류에서 중대한 지책가(智策家)로 사업하였다.

  안원생선생은 자기의 청춘의 정열을 중국체육에 쏟았다. 그러면서도 조선인 체육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민족의 체육발전사업에 정력을 기울렸다.

  안원생선생은 중국 체육계에서 여러가지 중책을 맡았고 중국 사회체육분야에서 높은 덕망을 쌓았고 체육계의 손색없는 문인(闻人)으로 자리하게 되였다. 안원생선생은 안중근의사의 의지대로 자기의 마음속으로 원하는 체육을 통해 오직 민족해방의 목표를 하나하나 이루어나갔다. 하여 구중국의 중요한 지대였던 상해 북경, 천진 등지에서 활약하면서 축구와 롱구장에서 굵직한 자욱을 남기게 되였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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