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도 진보도 한목소리…평화로운 집회문화 빛나
율곡로 따라 청와대 진입 내자동 교차로까지 가득
(서울=뉴스1) 사건팀 = 100만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촛불을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마라. 자리에서 내려와라". 시민들의 외침에 절절함은 없었다. 주권자로서 당당하게 요구했다.
12일 서울 광화문과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범국민행동'에는 역사상 최대 인파인 100만여명(주최측 추산, 경찰 추산 26만명)이 모였다.
이날 인파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기간 중 역대 최다 인원이 모였다는 6월10일의 주최 측 추산 70만명(경찰 추산 8만명) 기록을 경신했다.
서울 말고도 부산 3만5000명, 광주 1만명, 제주 5000명, 대구 4000명 등 전국 10여개 지역에서 6만명이 집결했다고 주최측은 전했다.
◆광화문 앞 전 차로 시민행진 건국 이후 처음
'11.12 민중총궐기'로 기록될 이날 집회에서 시민들 손에 들린 촛불은 광화문 앞 8차로인 율곡로를 가득 채워 흘러내렸다. 건국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경찰은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정도까지만 행진을 제한했지만 법원은 시민들이 신고한 만큼 걸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이날 행진을 허용하면서 "기존 집회들이 지금까지 평화롭게 진행됐고 이 집회 역시 그동안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 등에 비춰볼 때 평화적 진행이 예상된다"고 이유를 달았다.
법원의 예상대로, 시민들의 의지대로 이날 하루 서울 도심 곳곳에서 진행된 집회와 행진은 평화롭게 진행됐다. 3차 촛불집회는 차라리 축제에 가까웠다.
가족·친구·연인들의 손을 잡고 나온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신이 났다. 박근혜 대통령·최순실 코스프레 같은 재기발랄한 풍자도 분위기를 더했다.
전국 50여개 대학 총학생회와 각종 청년단체 회원 등 4000여명이 참여한 '2016 청년총궐기'에선 대중가요를 개사해 "박근혜 하야, 좋아 좋아 좋아"라는 노랫말의 '하야송'이 울려퍼졌다.
'2016 민중총궐기 대회'인 12일 밤 서울 세종대로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2016.11.12/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평화로운 집회·행진…축제이자 한풀이 굿판
세종대로사거리에서 만난 시민 윤모씨(46)는 "각자가 자기의 위치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박근혜 하야 페스티벌'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민주노총 등 1503개 시민사회단체가 주최했지만 대규모 참가그룹보다는 가족과 친구, 개인 등 개별 참가자들이 주를 이뤘다.
시민들의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요구는 한결 같았다.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나왔다."(40대 부부), "대통령이 잘못했고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초등 6년생 김모군),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파괴됐다. 이런 상황에선 침묵도 악이다"(고교 1년생 정모군), "박 대통령의 두 번의 사과문을 보면서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나오게 됐다"(35세 최모씨).
행진 뒤 광화문광장에서 이어진 문화제에선 가수 이승환의 공연에 열광하는 젊은층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거리에 선 80, 90년 운동권 가수 정태춘씨에 환호하는 중장년층도 밀리지 않았다.
가수 조PD의 '풋 유어 캔들 하이어(Put your candle higher)'라는 랩에 촛불을 커다란 물결처럼 출렁였다.
털모자에 '하야 해요'라고 쓰인 하얀 천조각을 붙인 초로의 할머니 셋은 광화문 광장 주변 보도 에 걸터 앉아 컵라면으로 저녁을 대신하며 토론을 벌이는 모습도 보였다.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민중총궐기투쟁본부·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2016년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가한 한 시민이 촛불을 들고 있다. 2016.11.12/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보수도 진보도 "시민 주권 행사하겠다"
시민들의 요구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었다.
방송인 김제동씨가 진행한 광장콘서트 '만민공동회'에서 "새누리당만을 사랑했다" 50대 여성은 "삼류 정치에 일류 시민"이란 말로 박수를 받았다.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시민으로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겠다는 신명나는 굿판이었다. 민심은 성이 났지만 집회는 흥이 났다.
시민들이 걸어간 거리에는 주최측에서 준비한 선전물 몇 장을 제외하고는 쓰레기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부 지점에선 집회 참가자와 경찰의 대치가 이어지면서 긴장을 높이기도 했다.
청와대로 향하는 주요 길목인 경복궁역 인근 내자동 교차로에서는 집회 참가자 수만여명이 차벽으로 가로막은 경찰과 오후 5시50분쯤부터 4시간 넘게 대치상황을 이어갔다.
골목을 우회에 허용된 행진 구간을 넘은 5000여명의 집회 참가자들은 오후 6시쯤 청와대로 향하는 신교동 교차로 필운대로 방면까지 진출해 연좌 농성을 벌여 경찰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2016 민중총궐기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해산하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 2016.11.12/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시민도 경찰도 성숙한 집회 문화 만들어
시민들은 신고한 구간을 힘으로 넘으려 하지 않았고 경찰도 강압적인 진압보다는 법과 질서를 지켜달라는 요구로 현장을 통제했다.
오후 11시 현재까지 집회 참가자와 경찰과의 충돌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경찰에 연행된 시민도 1명 없었다. 하지만 광화문광장에서 발산되는 시민들의 함성은 경복궁을 넘어 청와대에 닿을 만큼 거대했다.
촘촘하고 단단한 차벽은 시민들의 행진을 가로막지만 시민들의 목소리까지 차단하진 못했다. 청와대 경내를 지키는 한 경찰은 "청와대에서도 광화문광장의 촛불과 함성이 들려온다"고 귀띔했다.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청와대가 만들어진 이후 광화문 앞을 성난 민심이 가득 채운 날이 몇 번이나 될까. 박근혜 대통령은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에 시민들은 궁금해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다시 대답을 해야 할 시간이 그리 길지 남지 않은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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