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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우리 계레의 음악거장 - 안국민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09.02일 15:27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22)

조선족대표음악가 안국민선생을 만나본다



안국민(安国敏)프로필



1931년 7월 4일 흑룡강성 밀산시 출생.

제4차중국음악가협회 리사.

제3차연변음악가협회주석단 주석.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1, 2, 3,4기 명예회장 력임.

제2기연변정협위원.

제4, 5기 연변주인대 대표 력임.

독창곡《연변목가》,《어머니》 무용곡《물동이춤》,《양돈장의 처녀》 등 불멸의 음악작품 200여곡 창작, 도합3천여차 가무공연을 출중하게 지휘, 조선족 가무와 악대가 국내외에서 명성 떨치는데 크게 기여

주요영예 및 수상작품

1991년 가극 《아리랑》(합작) — 문화부 제1차문화신극목대상과 문화음악상 수상

1984년 가야금조곡 《심청》 — 전국 제3차음악작품평의 3등상,

길림성창작극(종)목1등상 수상

2001년 성악작품 《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 — 중국음악《금종상》우수성악작품 은상 수상

2000년 기상곡 《내가 살던 고향》 — 공화국창건 50주년음악작품응모추천활동에서 우수작품상, 2001년 중국음악《금종상》우수음악작품 동상 수상

2003년 가곡《진달래》 — 중국음악《금종상》우수가곡상 수상

천부적인 연주원

1931년 7월 4일, 흑룡강성 밀산시 영안향의 한 농부의 가정에서 음악가의 천부적 소질을 타고난 아이가 고고성을 울렸다. 이 아이가 동년을 보낸 대성촌에는 늘 음악을 들려주는 교회당이 있었고 이 어린 아이의 음악인생을 결정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취주악대가 있었다. 1930년대에 희한하게도 한개 촌에 취주악대가 있어 온 동네를 들썽하는 취주악에 이 어린애의 령혼에 깊이 잠자던 음악세포가 들깨워졌다. 그 아이가 밝게 자라15살이 되던 1946년, 계서에서 있은 부상자위문공연에서 멋진 반주로 관중들을 깜짝 놀래워 때이르게 혼사말이 들어올만큼 인기를 모으기까지했었고 지금은 중국조선족대표음악가로서 중국음악계의 최고상인 《금종상》을 세개나 수상한 안국민선생이다.

소시적 그는 본적없는 악기도 남이 다루는것을 유심히 보고는 익일수 있는 천부적 소질을 갖고있었다. 바이올린은 4촌형이 켜는걸 눈박아 보면서 익혔고 손풍금도 저절로 타보면서 익혔다. 중학교2학년 때다. 그가 다니던 계서중학교 학생들이 시골에 가서 며칠을 숙박하면서 개암을 뜯는 일을 하던 어느날 그들이 주숙하던 마을에 작은 손풍금이 있는것을 보는 순간 어느새 손풍금에 미쳐있는 안국민에게 반주임선생님은 《너는 래일부터 개암 뜯으러가지 말고 손풍금을 련습해라!》는 특혜를 베풀었다. 개암 뜯는 일을 할대신 손풍금을 련습한 안국민은 며칠후에 있은 위문공연에서 손풍금으로 노래반주는 물론이고 무용반주까지 아주 멋지게 혼자서 다 해재꼈다.

1948년 여름, 계림문공대가 설립되였다. 그때 중학생이였던 그는 손풍금연주에서 언녕 두각을 내밀었고 과목마다 100점을 맞는 공부실력까지 보여주어 학교에서는 그를 음악선생으로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발전을 고려하여 벌써 몇달째 눈독을 들이고있는 계림문공대로 보내주었다.

그는 계림문공대에서 바이올린, 손풍금을 다뤘으며 작곡도 했다. 그가 최초에 작곡한 노래는 《농촌의 가을》이였다. 단 한번의 순회공연으로 온 계림향 사람들이 다 부를수 있을만큼 인기를 모은 《농촌의 가을》을 작곡한 그는 평소에 작곡을 하는 한편 음악리론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한해 지나 그는 음악부의 책임자로 자리를 굳히고 손풍금반주를 하면서 계림문공대 대가를 망라한 숱한 노래와 기악작품들을 창작하기도 했다.

1950년 11월, 계림문공대는 사명을 완성하고 해산을 선고했다. 했지만 음악을 계속할 일념으로 불탔던 안국민은 연변문공단을 찾아갔다. 연변문공단에서는 처음 접촉하는 곡도 악보를 초견으로 훌륭하게 연주하는 그의 손풍금실력에 대만족이였다. 그러나 성분이 뭔가는 물음에 두달후에는 재 획분이 되여 중농이 된 성분을 부농이라고 입을 뻥긋한바람에 테밖으로 허망 밀리웠다가 얼마후 박승일(후에 국가교육위원회 민족교육사 사장 담임)과 김명(당시 동북행정사무위원회 민정과 과장)의 관심어린 소개로 지금도 기억에 또렷한 1951년 1월 31일, 연변문공단을 재차 찾아갔다. 손풍금은 언녕 자리가 메워진 상황에서 비올라를 처음 배워야 하는 그였지만 배우면서 악대합주에 참가할만큼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그는 비올라 연주에서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연변문공단에서는 그 당시 민족음악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상급의 정책에 해당정신에 따라 그한테 가야금을 배울 임무를 맡꼈다. 가야금으로 민족선률을 연주하면서 민족정서에 푹 빠진 그는 민족음악을 깊이 깨닫게 되였다. 그는 가야금을 익혀가지고 정진옥선생의 작곡인 《처녀의 노래》와 판소리 《떡메의 증오》 반주에 참가하였고 그것이 밑거름으로 되여 나중에는 전국 제3차음악작품평의 3등상과 1884년 길림성창작극(종)목평의 1등상을 수상한 가야금조곡 《심청》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성망있는 지휘가
안국민이 지휘가의 첫걸음을 떼게 된것은1953년 12월, 서장참관단이 연길에 왔을 때 지휘를 처음 맡아서부터였다. 통솔력이 강한 지휘가 정진옥선생의 지휘에 습관된 악대성원들은 지휘라고는 한번도 못해본 햇내기 밑에서 연주하는것을 마치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한것처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면 될것 같습니다. 저를 믿고 련습하는게 어떻겠습까?》라고 자신심을 내비치자 악대성원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지휘에 따라주었다. 생각밖으로 공연은 퍽 성공적이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지휘를 배우지 못했던 그는 1956년 중앙악단이 성립되면서 동부독일에서 청해온 그스린지휘를 스승으로 모시고 지휘를 배웠다. 그스린은 5, 60명 학생들중에서 번번히 지휘에서도 천부적 소질을 보여주는 그를 앞에 나와 시범하게 하였다. 1957년 6월에 연길로 돌아온 그는 악대대장으로 되여 지휘봉을 잡았다. 전문지휘가의 화려한 인생이 펼쳐진것이였다.

정년퇴직할 때까지 3천여차의 가무공연에서 지휘봉을 날린 그의 지휘생애는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한 공연, 캄보쟈 시하누크친왕, 뉴질랜드 마얼덴총리 등 외국수뇌자들을 위한 공연과 출국공연 등으로 휘황하게 장식되였다.

1958년, 문화부 부장 모순선생이 연길시찰걸음에 연변가무단의 가극 《콩쥐와 팥쥐》를 관람하고는 《악사석이 너무 깊어 발아래의 악대와 머리우의 배우들을 잘 통일하기 조련찮은데 지휘기능이 출중하여 아래우를 잘 통일시켰다》고 높이 평가했고 그의 지휘에 매료된 시하누크친왕은 그에게 특별히 선물까지 주는 은총을 베풀어주었다. 관중들에게 늘 뒤모습만 보여지는 지휘봉 날리는 사람의 역할을 충분히 긍정해준 대목이였다.

주지하다싶이 지휘의 최정상은 교향악지휘이라고 할수 있다. 베토벤의 서거 129주년인 그해초에 베토벤의 제7교향곡 제2악장을 연주하기로 한 연변의 첫번째 교향악연주회가 열린 1956년, 연변에서 최초의 교향악지휘를 성공적으로 해재껴 25살 새파란 나이에 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모은 뒤를 이어 안국민은 40여부의 교향악 을 지휘함으로써 연변교향악사업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성취있는 작곡가

안국민이 연변가무단에 와서 처음 작곡한 곡은 《물동이춤》이다. 기나긴 50여년세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물동이춤》은 창작 당시, 레코드에 취입이 될만큼 명곡으로 히트를 쳤고 새천년 문턱을 넘은 오늘도 가끔은 공연되고있다.

1958년에 창작된 《연변목가》는 그해에 전국적으로 열조가 일고있는 민가수집을 위해 훈춘 경신벌에 내려간 그가 한 농민이 소수레를 몰고가면서 부는 휘파람 선률이 하두나 좋아 기보해놓았다가 국경 10주년헌례작품을 창작하고저 룡정 동성향에 내려갔을 때 생활체험으로 방목을 하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방목을 하면서 보니 아득히 펼쳐진 벌이 한눈에 안겨오는 순간 떠오른 아름다운 선률이 바로 연변목가의 서두이다. 이 노래는 장춘문예콩클에서 처음으로 불러진 뒤를 이어 중앙레코드사에서 레코드에 취입, 전국 각지에 발행되였으며 1959년 10월, 북경에서 열린 국경10주년헌례공연에 참가한 부인 김인숙가수가 불러 대번에 히트를 쳤다. 선률이 우아할뿐만아니라 연변에서 처음으로 절가형식을 타파한 예술가곡으로 자리를 굳혀 력사적 의의가 크다는것이《연변목가》에 대한 음악리론 권위인사들의 평이다.

1981년에 작곡한 가곡 《어머니》는 28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가수들과 대중들에게 꾸준히 불리위지는 노래이다. 이 독창곡은 류수용가수가 불러 널리 방송되면서 청중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1984년 호요방총서기를 위해 마련한 공연프로 합평회에서 북경의 송일가수가 불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놀래워 이 노래의 진가가 가일층 높아졌다.

1989년에 완성된 작품 《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는 1965년, 공연차로 그가 내두산, 백하, 소사하 일대에 갔을 때 일망무제한 밀림을 걸으면서 느낀 진한 감수가 인차 곡상으로 떠올라 창작한 가곡으로서 정서기복이 크며 격조가 청신하고 청중들에게 드넓은 흉금을 안겨준다는 음악계의 한결같은 평가에 힘입어 이 가곡은 2001년에 제1차중국음악금종상 은상을 받았다.

공화국창건 50주년음악작품응모추천활동에서 우수작품상을 안아왔고 2001년중국음악 《금종상》우수음악작품 동상을 수상한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은 중국교향악단의 연주로 2001년 중국공산당창건 80주년기념공연에서 연주되였고 한국 서울예술축제와 한국 제10회교향악축제에서 연주되였으며 하자크스탄의 작곡가협회대표대회에서 연주하려는 제의를 받을만큼 유명해졌다.

2003년 중국음악《금종상》우수가곡상을 수상한 가곡 《진달래》는 2002년 연변주창립50주년 대형기념행사에서 히트를 쳐 왕성한 생명력으로 지금 중국조선족음악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있다.

《연변은 나한테 음악의 천국으로 통하는 령감을 주었다》

안국민의 작품은 《연변목가》, 《연변의 노래》, 《아, 연변이여》 등 직접 연변이란 이름을 붙인것외에도 대부분 작품은 연변을 열렬히 노래한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연변을 사랑한다. 연변은 비록 내가 태여난 고향은 아니지만 나는 20세에 연변에 온후 장장 반세기가 넘도록 연변을 떠나지 않았다. 연변의 모든것이 나를 감동시키고 나한테 음악의 천국으로 통하는 령감을 주었다. 나는 연변을 나의 두번째 고향 아니, 나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가을언덕에 음악농사의 어거리대풍을 맞아와 음악의 로적가리를 높게 쌓고도 성차지 않아 피끓는 젊은이마냥 부글거리는 정열로 아직도 피아노건판을 두드리는 중국조선족음악의 거장 안국민! 그는 말한다. 《전반 조선족 음악이 대중가요에만 머물러있지 말고 교향음악과 예술가곡 면에서도 다른 민족 특히 한족에게 뒤떨어지지 않도록 모든 조선족음악인들이 사명감을 갖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리고 호시절을 맞은 우리 민족의 음악인들은 자기의 특성이 뚜렷하면서도 다른 민족들도 좋아할수 있는 높은 차원의 음악을 창조애야 한다》고.

편집/기자: [ 류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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