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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장미- 어머니 류옥하녀사를 회고하며”

[기타] | 발행시간: 2017.02.23일 11:58
-한락연의 따님 한건립녀사의 절절한 추모의 정

일전에 있은 “충혼의 넋 예술인생- 《한락연을 기리며》 도서출판 좌담회”에서 한락연의 딸 한건립(韩健立)녀사는 어머니 류옥하녀사에 대한 소개와 어머니의 시각으로 본 부친 한락연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내 마음속의 장미- 어머니 류옥하녀사를 회고하며”강연을 하고있는 한건립녀사

한건립녀사는 18년전 한락연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민족문화궁 바로 이 자리에서 《한락연을 기리며》출판기념식이 있었는데 오늘 다시 재판 기념좌담회를 하게 되니 격동을 금할수 없다고 하면서 부친에 대한 연구가 중앙당교의 고 최룡수교수 한사람으로부터 한락연연구회로 깊이있게 이어져가고있는 것은 한락연은 나라에 속하고 민족에 속하는 동시에 그가 헌신했던 신앙과 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서두를 뗐다.

염보항 집에서 한락연부부의 즐거운 한 장면

녀사는 “독신을 포기하고 부친을 선택하다”,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고 한락연의 사업을 엄호하다”,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한락연의 유작들을 나라에 기부하다”,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고 자녀들을 교육하다”라는 네개 제목으로 류옥하녀사의 일생과 부친과의 혁명적인 사랑, 그리고 어머니의 눈에 비친 부친의 모습을 그렸다.

등영초 송미령과 함께 한 사진

한건립녀사의 어머니는 4살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외할머니는 가난하고 업수임당하는 생활이 글을 모르기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딸만을 글을 깨우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당시 가난한 생활에 학비때문에 어머니는 교회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고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학비면제생으로 소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녀사는 머리 속에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듯 깊은 표정으로 어머니는 중학교, 고중, 대학교는 모두 졸업과 동시에 일년씩 글을 가르쳐서 학비가 모아지면 진학하군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녀사의 어머니가 입학한 대학이 남경금릉녀자대학교 생물학과였는데 1919년부터 1951년까지 졸업인수가 999명이라 999송이 장미로 불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녀사의 마음속에 장미 한송이로 아름답게 남아있다고 부언했다.

한건립녀사는 어머니는 다시 콜롬비아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일년사이에 2년과정을 마치고 석사학위를 받았기에 미국에서는 어머니를 남아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어머니는 우월한 생활조건을 버리고 중국에 들어오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녀사는 또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신음하는 중국에서 부녀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일에 헌신하려는 것이 어머니의 평생 소원이였다고 말했다.

두 자녀인 한건립관 한건행을 안고 단란한 가족사진을 찍은 한락연부부

그렇게 어머니가 30세 되던 해까지 부친 한락연이 나타나기 전까지 어머니는 독신주의자였으나 부친의 직업정신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류학을 했던 동일한 경력과 부친의 유머스러운 성격은 결국 어머니가 독신으로 살려던 생각을 버리고 결혼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1940년 한락연이 국민당에 비밀리에 체포, 1943년 조직의 도움으로 가석방된 서북에서 국민당상층인사들의 공작을 하게끔 파견되였다고 회고횄다. 한락연은 녀사의 어머니가 모든 조직과 단체에 가입하지 말고 필요 이상의 것은 묻지 말고 조용히 애들 교육만 잘하기를 바랐고 수재이던 녀사의 어머니는 두말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부녀사업과 고학력녀성으로서 일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란주에서 딸 한건립을 안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류옥하녀사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들 부부는 다툼 한번 한적이 없고 중요한 일을 상의할 때는 영어로 교류를 했다. 그리고 1950년 란주로부터 내지로 가라는 조직의 배치에 따라 어머니는 란주의 모든 가정기물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옷 몇가지와 부친의 그림 두박스만 챙겨가지고 귀양, 광동, 향항을 거쳐 북경에 와서 정착했다.

북경에 도착해서 녀성청년회탁아소에서 소장직을 맡았지만 1년뒤 페병에 걸려 병원으로부터 입원할 것을 권고받았다. 녀사는 어머니는 우리를 학교에 기숙시키고 작은 방을 찾아서 휴식하고 책을 보고 볕쪼임을 하는 것으로 페병을 이겨낸 어머니의 정신력이야말로 우리를 키운 힘이였다고 했다.

당시 생활이 풍족하지 못했고 부친의 그림을 고가로 사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기념으로 남길 일부만 남기고 전부 나라에 기부했다고 한건립녀사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1947년 부친을 떠나보낸 어머니는 40대의 아름다운 녀성이였습니다. 어머니는 부친과 결혼생활이 8년밖에 안되였지만 한생을 부친에게 바쳤습니다.” 한건립녀사는 어머니와 부친의 혁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감회에 젖었다.

한락연의 그림 포도 말리고있는 건축물 1946년

녀사는 또 우리가 어릴 때 학교에 제출할 등기표를 작성하며 민족란에 친구들과 함께 한족이라고 적어서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니 어머니는 “너희들 아버지는 조선인이고 너희는 조선인의 피줄을 가지고 태여났다. 한족들은 인구가 많으니 너희 둘이 금상첨화 역할을 하지 말고 수자가 적은 조선인으로 살아가다오.” 라고 타일렀다며 어머니의 큰 사랑과 부친이 어머니한테 끼친 영향, 그것을 보고 자란 자녀의 직접적인 체험과 심정을 설명했다. 전정옥 기자

출처: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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