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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무라 마스오의 이국 력사와 문학에 대한 애착(3)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7.03.24일 13:21
-현대 조선족문단의 리정표인 김학철선생의 마음의 친구

오오무라 마스오: 김학철선생은 높은 륜리성을 가진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한생을 바쳤다

이번 취재로 오오무라선생을 만나면서 느끼는 점이 있었다.

윤동주사적 발굴에 대한 이야기를 사흘에 걸쳐 거의 10여시간을 들었는데 이야기할 때의 표정은 항상 조용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전개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으며 필자의 물음에 하나하나 자세한 대답을 주시군 하였다.

며칠전에도 한국 어느 신문사의 기자가 다녀갔다고 이야기하는 표정에서 비슷한 취재에 여러번 대응하는 로고도 보였다.

헌데 윤동주연구에 관한 취재중 연변에서의 1년간 체류과정을 회고하면서 잠간 김학철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였는데 거기에서 뜻하지 않은 선생의 변화를 느끼게 되였다.

표정이 밝아 지고 목소리도 높아 지고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오오무라 마스오(왼쪽 첫사람) 김학철선생 부부와 함께

후날에 김학철문학에 대한 연구를 떠나서 오랜 기간을 두 가족이 깊은 우애로 련결되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나서야 그 영문을 알게 되였다.

“김학철선생에 대해서는 언제 아시게 되였습니까?”

“1974년에 김학철선생의 단편소설 <담배국>을 번역하게 되였습니다.”

오오무라선생이《담배국》을 번역한것은 현대조선문학연구의 일환에서였다.

《담배국》은 김학철선생이 1945년에 한국에 거주하면서 조선독립동맹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문학창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던 시기에 쓴 단편소설이다.

조선의용군 모 지대의 보급대원 문정삼이 갖은 실수로 동료들의 웃음을 사는 이야기, 밤중에 담배잎을 남새인줄 알고 뽑아와서 국을 끓인 에피소드가 중심사건인 《담배국》이다.

소설속 주인공의 모델이 실제인물인 로혁명가이며 김학철선생의 친구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전임 부주임 문정일선생이였음을 썩 후에 김학철선생을 직접 만났을 때 알게 되였다는 오오무라선생이다.

소설번역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85년 4월에 연변의 땅을 밟게 된 오오무라선생과 아키코부인이였다. 연길에 도착한지 일주일 후부터 윤동주묘지에 대한 조사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묘지가 발견되고 윤동주사적 관련 조사를 시작하기전인 6월중순쯤의 어느날이였다.

정판룡(이미 작고, 당시 연변대학 부교장)선생을 만난 오오무라선생이 “김학철선생이 연변에 계십니까?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라는 부탁을 했다. 연변에 가고 싶은 리유중의 하나였던 김학철선생을 하루 빨리 만나고 싶었던것이다.

며칠 후의 어느 밤중, 손님이 오셨다는 주인집 사모님의 목소리에 현관으로 내려간 오오무라선생부부는 그만 그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중국조선족문단의 로장인 김학철선생이, 아무 련락도 예고도 없이 오오무라선생을 만나러 오셨던것이다. 그것도 누구의 배동도 없이 홀로…(홀로 다니는 법이 거의 없으시다고 후에 김학철선생 사모님께서 알려주셨다.)

32년전의 그날을 떠올리면서 두분은 오늘 일인듯 흥분하셨다. 조선족의 로신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적라라하고 결곡하고 명실상부한 글을 쓰시는 분이 너무나 감상적이고 자상하셨다 한다.

“김학철선생은 교수님을 알고 계셨습니까?”

“예. 깜짝 놀랐습니다.”

실은 1985년에 연길로 가는 도중에 북경에서 며칠 묵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아메리카 VOA방송국기자의 취재를 받은 적이 있었다. 10분간의 인터뷰에서 연변에 가게 된 동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김학철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10분간의 인터뷰를 방송전파로 김학철선생이 들었고 또 연변에 오면 만나게 되리라 믿고 계셨던것이다. 참으로 삶의 어느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시는, 세계로 향한 김학철선생의 안테나의 힘을 느끼게 되였다는 오오무라선생이다.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두시간이상 지속되였다. 김학철선생은 류창한 일어로 대화를 하셨다. 중국어에 능하고 중국력사와 중국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장악하고 있는 오오무라선생은 단락단락으로 이어지는 김학철선생이 걸어온 길에 대해 충분히 리해할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 오오무라선생은 연변에 체류하는 동안 선생의 인생이야기를 상세하게 들려주실것을 부탁했다. 김학철선생은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다.

그때의 일을 아키코부인은 이렇게 회억했다. “일본군에 의해 한쪽다리를 잃으신 분이 그렇게 친절하고 유쾌하게 우리를 받아 주실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림에 대한 이야기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며 아름다운 녀성에 대한 죠크며… 그 분의 그 감성의 래원은 어디일가요…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여서 록음을 못한것이 얼마나 후회스럽던지 몰라요.”

그날 저녁 김학철선생이 집에 돌아가실 무렵이였다.

현관에 나선 오오무라선생은 당황해났다. 왼쪽구두가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조급해하는 그 모습을 보고 김학철선생은 시치미를 떼고 한창 구경만 하다가 허허 웃으면서 “난 신을 사도 옹근 한컬레 값을 내고 한쪽만 갖고 온다니까… ”라고 우스개를 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구두 한쪽의 이야기>이다.

수없이 오간 서신들

오래전부터 김학철선생의 아름다운 문학세계를 사랑한 오오무라선생은 그날 이후로 그의 신상에 대해 너무나 허물없이 이것저것 물을수 있었다. 근 열달동안 오오무라선생과 아키코부인은 거의 주일마다 김학철선생의 저택으로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 원산과 서울에서 지낸 소년시대, 상해와 남경에서의 생활, 신사군과 팔로군에서의 생활, 해방직 후 서울에서의 생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기자생활, 연변에서 겪은 고난의 생활 등 너무나 생동한 이야기들이였다. 대부분이 눈물 없이는 들을수 없는 이야기였다. 1매에 60분되는 카세트테이프 A, B면에 전부 록음을 하면서 파란곡절의 인생이야기와 더불어 김학철선생의 마음의 웨침을 육성으로 남겼다.

《담배국》을 번역하면서 작품의 유모아적수법에 끌리웠다는 오오무라선생은 김학철선생을 직접 뵈면서 눈물 없이는 들을수 없는 파란많은 인생이야기를 롱담과 웃음으로 엮으시는 모습에 ‘유모아로 양조(醸造)’하는 소설풍격의 래원을 찾았다고 한다.

1986년, 오오무라선생부부가 일본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김학철선생은 23년간의 풍상을 겪은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의 원고를 보여주었다. 오오무라선생은 깜짝 놀랐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본어로 된 제1부가 동시에 완성되여 있었다. 다시 말하면《20세기의 신화》는 일본어판도 준비되여 있었다.

김학철선생은 일본에 가서 이걸 출판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오오무라선생은 괴로운 마음으로 거절했다.

이미 1983년에 출판된 《항전별곡》이‘국내에서만 발행한다’는 조건으로 힘들게 출판된 사연을 알고 있었던 오오무라선생은 만일 일본에서 《20세기의 신화》가 출판될 경우 뜻하지 않는 다른 방면으로 소설이 리용될것만 같은 우려때문에, 인제 겨우 평온을 찾은듯한 선생의 생활을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거절하고야 말았다.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미안함이 남는 일이라고 한다.

거의 1년간 김학철선생 가족과의 래왕은 오오무라선생부부에게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었다.

연길을 떠나기 직전 김학철선생에게 부탁이 없으시냐고 물었다. 선생은 오르골, 그것도 “황성의 달”(荒城の月)이 담겨있는 오르골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일본군의 기세를 떨어 뜨리려는 목적에서 밤마다 일본군에 향해 대적방송(対敵放送)을 하군하였는데 조선의용군의 병사들이 일본어에 능한 까닭으로 그 일을 맡게 되였다 한다. 그때에 늘 방송한 일본의 류행가가 <황성의 달>이였던 것이다. 항일전쟁시기의 피비린 력사의 한페이지기도 한 일본류행가요, 아니 전쟁을 떠나서 다만 그 노래의 선률이 김학철선생의 마음에 들었을 지도 모른다.

무척 김학철선생의 귀여움을 받았던 오오무라선생의 딸 미치노(三千野)양이 석사공부로 북경대학에 갔을 때 오르골을 전해드렸다.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황성의 달>을 들으면서 김학철선생이 무척 기뻐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면서 오오무라선생은 노래의 선률을 코노래로 들려주셨다. 애수에 빠지는듯한 그 모습은 그리운 분을 떠올림이 틀림없었다.

1989년에 오오무라선생은 가난하여도 사회주의 큰길을 걸어가는 젊은이를 묘사한 김학철선생의 단편소설 《구두의 력사》와, 항일전쟁을 제재로 한 《이런 녀자가 있었다》를 번역출판하였고 이어서《기구한 력사를 산 작가 김학철선생 》(평론),《조선족작가 김학철》(평론),《김학철-그의 인격과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한 오랜기간을 가지고 김학철선생과의 대화기록인 육성테이프를 정리하였다. 2003년에 드디여 활자화 된 《김학철선생의 발자취》가 일본에서 출판되였다. [반우파투쟁과 <20세기의 신화>], <김일성>, <항일전쟁과 조선의용군>, <신사군에서 팔로군에로>, <팽덕회>, <황포군관학교>, <부상,구속>, <김사량>, <서울시대>, <평양시대>, <조선전쟁>, <북경에서 연길로>, <연길시 58년이후>,<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등 31개의 소제목으로 된《김학철선생의 발자취》는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조선족문단의 로장인 김학철선생이 걸어온 험난한 길에 대한 력사적인 실록으로 남게 되였다.

그후 일본에 오신 김학철선생을 초청하여 와세다대학에서 강연회를 여는 등 오오무라선생을 통하여 일본에서 김학철선생이 널리 알려졌다.

김학철 와세다대학에서의 강연을 마치고

40여년만에 다시 일본땅을 밟았을 때 김학철선생은 “내 한쪽다리는 이미 일본의 흙이 되였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옛일을 떠올렸다 한다.

김학철선생은 태항산에서 팔로군내의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싸우던중 1941년에 다리에 탄알을 맞고 의식을 잃은 채 일본군에 잡혀 나가사끼에 압송되여 사상범으로 징역 10년의 판결을 받았었다. 그때의 일을 돌이키면서 김학철선생은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여 염증으로 시달리던 때 다리를 절단해 준 일본인의사가 고마웠다는 말씀도 하셨다. 전쟁의 잔혹함과 더불어 인간애를 기억하시는, 참으로 감복할 수 밖에 없는 말씀이였다.

김학철선생의 인간성에 크게 반한 오오무라선생은 연구활동 이외 사적인 교류도 끊지 않았다. 거의 해마다 연길에 가서 만나뵙군 했고 한국에서도 여러번 만난 적이 있었다.

어느 한번 한국 국무총리의 초청으로 한국에 가신 김학철선생이 국립묘지참배를 거절한 동시에 신변보호를 해주는 호화로운 호텔을 거절하고 파고다공원 뒤골목의 허름한 려관에 머무르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적이 있었다. 손님이 찾아 왔다는 소리에 필경 마스오선생일 것임이 틀림없다고 말씀하셨다는 김학철선생이다. 한국 3류 려관 이웃방에서 한주일동안 같이 머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두분과 두 부인이다. 담배와 술을 모르시고 불합격남편이라는 점에서 너무 비슷한 두분, 그리고 그런 두분을 위해 팔다리가 되고 가장 믿음직한 조수가 된 두 부인사이의 우애는 세인이 추측할수 없는 깊은 것임에 틀림없다.

한국에서

김학철선생과 마지막으로 만난것은 2001년 9월 14일(금요일)이였다. 돌아가시기 직전이였다.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댁을 찾았다.

“나 정판룡선생과 죽음시합을 하는 모양이요…”(당시 정판룡선생님도 병환에 계셨다.)

“이 시합에서는 지는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두분이 여태껏 하시던대로 롱담을 주고 받았다 한다.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글을 쓰셨습니까?”

병환 때문에, 게다가 련일되는 단식으로 마르신 선생의 손을 잡으면서 한탄하는 오오무라선생을 보고 김학철선생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いい男だね〜”(“멋있는 남자야…”)였다.

그동안의 우애를 두고 오오무리선생에 대한 최대의 평가를 주셨다.

《담배국》으로부터 시작된 김학철선생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그후의 15년을 꾸준하게 이어온 만남과 오고간 수많은 서신속에서 공경의 마음으로 진화되였고 믿음을 바탕으로 정을 주고 받은 마음의 친구로 남았다.

거의 10개월에 달하는 대담을 통하여 록음기의‘ON’,‘OFF’를 거듭하면서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OFF’일 경우의 두분만의 세계는 누구도 알수 없는 것으로 영원히 남을것이다.

김학철선생의 부인(왼쪽)과 오오무라선생의 부인

올해 8월 뉴질랜드에서 열리게 되는 제13회 국제고려학회에서 발표할 김학철선생에 관한 론문준비에 비쁘신 선생이시다.

“김학철선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는 리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의 인간성과 작품에 매료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족으로서 중국혁명에 평생을 바친 그는 높은 륜리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실현을 위해 한생을 바쳤습니다. 김학철선생은‘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일본에서의 김학철연구는 어느 정도로 되고 있습니까?”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정아영교수를 비롯한 분들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조선족연구학회에서 최근에 김학철선생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는 것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지길 원합니다.”

“앞으로 김학철문학연구에 의욕이 있으시다면?”

“<항전별곡>을 일본어로 번역하려 시도했는데 모종의 원인으로 아직 실현을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풍부한 중국 근대력사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입니다. 방대한 작업일지라도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김학철선생 문학의 제1로 가는 특색을 ‘시대의 증언에 대한 기록성’이라고 보는 오오무라선생은 “선생께서 걸어온 길, 문학창작을 비롯한 선생의 옹근 생애는 중국, 북조선(조선), 한국, 일본이라는 지정학적 범위를 훨씬 넘어 세계유산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굴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 자신의 신념에 대한 충실성, 그러면서도 천진무구한 소년과도 같은 솔직함, 선생은 한마디로 ‘사무사(思无邪)’ , 즉 거짓을 모르는 성품의 소유자이다.”라고 김학철선생을 높이 평가하였다. / 리홍매 일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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