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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무라 마스오의 이국 력사와 문학에 대한 애착(4)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7.04.06일 16:04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중국 조선족문학에 대한 애정

오오무라 마스오: 연변은 나의 제2의 고향으로 되여 버렸습니다

오오무라선생이 연변에 가서 연구를 하고 싶다고 느낀것은 1963년 중국사상사 (中国思想史)학자인 안도히코타로(安藤彦太郎)교수의 《연변기행》을 읽었던 29살 때였다. 그때로부터 중일 수교와 연길시의 대외개방을 기다려야 하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드디여 1972년 중일 두 나라가 수교되고 1985년 와세다대학 교수로서의 첫 재외연구지를 연변으로 택했다.

연변은 상상속의 ‘간도’가 아니다

그해 4월부터 1년간 연변에서의 생활은 오오무라선생의 연구생애에 새로운 령역을 개척해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변은 상상속의 ‘간도’가 아니였다. 가는 곳마다에서 조선민족 자체를 볼 수 있었고 헌법에 의해 보장된 소수민족의 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김훈, 최홍일, 우광훈, 윤종삼 등 연변의 작가들과 함께

일본의 규슈(九州)와 비슷한 면적의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자민족의 언어, 문화, 풍속을 계승발전시키고 있으며 일정한 정도의 자치권과 높은 문화수준으로 중국의 한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당당하게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오오무라선생이였다.

특히 당시의 연변 인구의 40.32% (1982년 통계자료)를 차지하는 조선족의 문화교육은 일본인에게는 전혀 미지의 세계였던 상당한 가치를 가지는 연구령역이였다.

민족의 언어습득에 큰 비중을 두는 민족학교(소학교, 중학교, 고중)의 훌륭한 교육제도, 연변대학 등 4개 민족대학과 연변인민출판사, 연변교육출판사의 존재, 《천지》,《문학과 예술》,《아리랑》등 조선문학 전문 잡지와《연변일보》,《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길림신문》등 조선족 전문미디어의 존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나아가서 전반 중국 조선족의 언어상황과 문화상황에 대한 오오무라선생의 연구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1년간은 시간을 쪼개여쓰는 나날들이였다.

가끔 일본에서 열리는 학회도 2박3일 정도로 참가하고 서둘러 연변에 돌아와야 만 했다. 20여년을 기다려서 차례진 1년간의 연구기간에 윤동주사적조사, 김학철선생 문학연구, 연변조선족의 언어상황에 대한 조사와 연변의 근대 중견작가들에 대한 리해, 연변, 나아가서 중국 조선족문화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연구 등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2002년에 발표한 수필 《연변방문기》에 오오무라선생의 이런 글이 적혀있다.

“20대 후반의 꿈이였던 연변에서의 생활, 정작 생활해 보니 여러가지 현실문제들에 부딪치기도 했다. 하지만 연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밑도 끝도 없는 연변사람들의 인정때문에 연구는 물론, 연길시에서의 생활자체에 미련을 버릴 수 없어 그후로 해마다 한달씩 연변에 가야 하는 ‘연변병’에 걸렸다. 연변은 나의 제2의 고향으로 되여 버렸다.”

《중국조선족-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단행본) 일본서 번역출판

왼쪽으로부터 오오무라교수,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한준광 소장 그리고 아키코부인

1984년 11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문제위원회에서 편찬한 5종 총서중의 《중국 소수민족자치지방개황 총서》의 하나이다.

연변에 가자마자 이 책을 접한 오오무라선생은 그때까지 몇몇 학자들의 론문에서 가끔 소개되군 하였던 연변을 전면적이고 정확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일본에 알리는 중요한 책자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여기게 되였다. 편집위원회 책임자였던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한준광 소장(당시)의 협조로 일본에서의 번역출판이 쉽게 결정되였다.

연변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착수한 첫번째 일이 바로《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의 번역이였다. 이 책의 출판은 큰 문화적인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판로문제때문에 여러 출판사의 거절을 받았다. 다행이 그때 이미 17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었던 고베(神戸)시민단체인  ‘무궁화회’(むくげの会)의 여러분들이 협조해 주었다.

연변에서 돌아온지 1년반이 지난 1987년 12월에 드디여 오오무라선생과 ‘무궁화회’가 공동으로 《중국조선족-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단행본)을 자비로 번역출판하게 되였다.

책의 머리글에서 오오무라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자체가 새로운 관점과 자신들의 힘으로 연변을 전면적이고 계통적으로 국내외에 소개한 저작으로서 전체적인 연변을 파악하는데 불가피적인 문헌이라고 본다. 서술이 좀 딱딱한 면도 있지만 숙독하면 할수록 볼맛이 돌고 책속의 글줄기에서 독자들은 여러가지를 섭취하게 될 것이다.”

책의 원이름《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을 《중국조선족-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이라 한데는 그럴 만한 리유가 있었다.

그때까지 일본사람들은 ‘조선족’이라는 명칭에 대해 전혀 리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출판사의 편집들은 ‘재일조선인’, ‘재일코리안’등 명칭에 익숙한 일본독자들에게 알맞게 “재중조선인”이라고 고치자는 건의를 해왔다.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오오무라선생이다.

리유는 다음과 같다.“중국 조선족이란 중국의 56개 민족중의 하나로서 중국국적과 공민권을 가진 조선민족이며 ‘조선족’은 하나의 고유명사이다. 그들은 민족은 조선민족이지만 국가적으로는 중국인이다. 전쟁전후로 중국국적을 가지지 않고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인도 있지만 그들은 조선족이 아니고 중국에서의 외국인 대우를 받는다. 재중조선인과 중국 조선족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띈다”

엄격히 말하면 이 책이 출판되여서부터 ‘조선족’이라는 고유명사가 일본에서 정착되기 시작했고 ‘간도’가 아닌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일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여러 상황이 보이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며 연변사람으로서, 중국 조선족으로서 머리가 숙여졌다.

“책이 팔리면 교수님께는 인세(印税)가 돌아 옵니까? 투자하신 만큼만이라도…”

“아니요. 대부분의 경우 아예 처음부터 인세를 포기하는 계약을 합니다. 그리고 책도 백권정도씩 사군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많은 책을 출판하기만 한다면 좋은 일입니다.”

한번도《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을 열심히 읽은 적이 없는 부끄러움때문에 얼굴이 붉어지고 여태껏 일본인들앞에서 떳떳하게 자랑해 본적 없는 필자의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그토록 애호하시는 교수님을 위하여 ‘뭔가 해 드릴 수 없을가…’고 생각을 하는 한순간이 흘렀다.

《중국 조선족단편소설집ー시카코 복만이》를 일본서 번역출판

전반 조선반도의 문학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일제강점시기의 재‘만(满)’조선인문학에 대한 연구를 중시해 온 오오무라선생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만주국’ 시기 조선인에 의한 조선어문학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민족적인 기개와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지배를 받은 조건하에서 여러가지 제한을 받았지만 그것은 확실한 조선문학의 일부이며 동시에 중국 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의 일부이기도 하다.”

“서울과 평양에 이어지는 조선문학의 거점이고 중한・중조 교류의 거점이기도 하며 항일전쟁의 력사적인 거점이기도 하였던 연변, 연변에 대한 리해가 없으면 조선반도와 중국에 대한 리해는 물론, 일본자체도 진정한 의미에서 리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중국 조선족문학을 제치고 진정한 조선문학을 론할 수 없다.”

일본인들에게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생소한 존재임과 동시에 일본인 조선문학 학자들에게 중국 조선족문학은 미개척지 분야였다.

중국땅에서 조선어로 씌여져 있고 민족의 풍속습관과 고유한 품성, 생활감정을 생동하게 그리면서 중국의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조선족작가들의 시와 소설을 접하면서 한족문학과는 전혀 다른 섬세하고 서정적인 감정, 조선민족 자체의 특유한 유모아적인 수법을 갖고 있는 조선족문학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되였다.

오오무라선생이 처음 연변에 체재했던 1985년, 당시 조선족문단에는 10명의 직업작가들외 대부분의 겸업작가들이 문단을 장식하였는데 그중에는 농민작가들도 많았다. 또한 《천지》(연길), 《아리랑》(연길), 《문학과 예술》 (연길), 《장백산》(통화시), 《도라지》(길림시), 《송화강》(할빈시), 《은하수》(목단강시), 《새마을》(심양시), 《북두성》(장춘시) 등 연변 주내외의 문학 전문잡지가 월간 혹은 격월간으로 출판되였다.

당시의 조선족문학의 특점을 두고 오오무라선생은 이렇게 개괄했다.

“주인공이 조선족이고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을 묘사한 작품이 대부분이였다. 모든 작품들은 민족특색이 농후하고 풍속습관은 물론 로인을 존중하는 등 백의민족의 고유한 품성이 돋보이는 건전한 풍격을 갖추었다”

오오무라선생은 우선 여러 신문잡지에 발표된 작품을 선정하고 연변대학의 협조로 작가들을 한분한분 찾았으며 긴 시간 동안 왕래하면서 조선족작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1985년이후 부터는 거의 해마다 한달씩 연변에 가서 머무르면서 조선족문학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해왔다.

1989년 9월, 중국 조선족문단의 실력파 작가들의 단편소설 13편을 묶은 《중국 조선족단편소설선-시카고 복만이》가 오오무라선생의 편역과 아키코부인의 표지설계로 일본에서 출판되였다.

《시카코 복만이》(장지민)・ 《생활의 음향》(최홍일)・《포로》(김성휘)・《상장》 (림원춘)・《사시절가》(박은)・《구두의 력사》(김학철)・《오이꽃》(류원무)・《시름거리》(김훈)・《배움의 길》(리원길)・《처가집》(박선석)・《하고 싶던 말》(정세봉)・《중국사람》(리홍규)・《조선에서 온 손님》(김종운) 등 단편소설들을 포함한 이 책은 중국 조선족문학을 료해할 수 있는 일본에서의 첫 문학책자로서 큰 가치를 갖고 있다.

2017년 윤동주기념행사에 참가하신 오오무라교수와 부인 아키코

중국문단의 평론과 조선족문학관계자들의 의견을 참고로 오오무라선생 자신이 직접 읽고 선출하여 번역한 작품들 머리글에는 작가들의 사진과 더불어 상세한 프로필(작가 본인들의 이야기를 기준으로 함)이 적혀 있다. 근 3년간의 시간을 들인 작가들과의 교류와 연변에서의 세밀한 조사연구의 결실이 매 소설 뒤장에 이어지는 오오무라선생의 해설(注)에서 충분히 전달된다. 그리고 사진기록과 표지설계를 담당한 아키코부인의 연변에 대한 애정 역시 표지그림을 통하여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때의 작가들하고 지금 련락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아쉬운 듯한 오오무라선생의 표정을 읽으며 미약한 힘이 될 수도 있을 듯한 자신감이 생기는 또 하나의 순간이였다.

최홍일의 《도시의 곤혹》 단행본으로 번역출판

1992년에 진행한 오오무라선생의 조사에 따르면 1950년이후에 작품을 활자화하여 발표한 조선족작가 총수는 3100명에 달하였고 현역에 종사하는 작가들만 2000명을 넘었다. 당시 190여만명의 조선족사회에 9개의 문학전문잡지와 2000명의 작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놀랄 만한 현상이였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의 비률이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족문학은 조선문학의 전체를 파악하는데서 결핍되였던 부분이였다. 오오무라선생은 “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과 조선문학의 공유지의 성격을 띤 량자의 접촉지역이며 량자를 리해하는데 불가결한 존재이다. 일본군국주의침략에 대한 항전의 최선단이였던 사실로부터 조선족의 삶의 방식은 력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일본인들과 련관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조선족의 삶의 방식은 재일한국인의 현재와 미래에 하나의 암시를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적으로 조선족문학은 우리에게 국가와 민족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라고 조선족문학의 존재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평가를 하였다.

일찍1988년에 중국 문학연구학자인 와세다대학 키시요코(岸 陽子)교수와 합작하여 <중국의 잃어버린 세대>를 테마로 문화대혁명의 폭풍속에서 청춘을 매장당한 특정된 세대의 정념(情念)을 그린 하향지식청년 소설가들의 소설들을 묶어 《새로운 중국문학》시리즈를 번역출판하기로 기획하였던 오오무라선생이다.

일부 력사적인 원인과 번역편자들의 사정으로 1993년에야 여섯권의 책을 출판하게 된 《새로운 중국문학》시리즈에 오오무라선생은 중국문학에서 홀시할 수 없는 한부분이라고 줄곧 주장해 온 조선족문학도 택하였고 거기에 조선족작가 최홍일씨를 선택했다.

오오무라선생이 최홍일 작가와 만난것은 80년대 후반이였다. 특별히 최홍일씨에게 끌리게 된 것은 그의 소설 《생활의 음향》을 접한 후로 부터였다.

주체적으로 살려고 하는 인물이 현실 사회와의 여러가지 모순에 부딪치면서 출로를 모색하는 주제로 평탄하지 않은 작품을 많이 쓴 최홍일씨는 그 작품성때문에 제때에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진정한 소설가의 모습을 보게 되였고 그의 소설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 오오무라선생은 소설 《도시의 곤혹》과 《그녀와 그, B현소재지》를 《새로운 중국문학》시리즈 제3부의 작품으로 선정하여 단행본으로 번역출판하였다. 일본에서 조선족작가의 소설이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은 그것이 처음이였다.

사실 최홍일작가의 《도시의 곤혹》은 중국에서 발표되기 전에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였다.

저서 《중국 조선족문학의 력사와 전개》

연변의 작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오오무라교수

1985년4월에 시작된 연변을 향한 선생의 발자취는 2004년 1월 15일 와세다대학 14호관 501교실에서의 마지막 강의 <조선근대문학과 일본>을 끝으로 맞은 정년퇴직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중국문학에 발을 들여 놓고 그 속에서 조선을 알게 되였고 조선 근대문학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거쳐 중국 조선족문학에 이른 마스오선생의 조선족문학에 대한 세심한 연구는 여태껏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 아닐가라는 생각이 든다.

‘위만’시기의 중국 동북의 조선문학에 대한 연구로부터 싹 트기 시작한 ‘간도’연변에 대한 꿈, 20여년간의 밀도 있는 조사와 지구적인 연구로 오오무라선생의 학자인생에 중요한 령역으로 자리잡은 조선족문학이다.

정년을 맞기 1년전인 2003년 3월 31일, 조선족문학과 관련하여 쓴 그 동안의 론문과 평론, 기행문, 수필로 무어진 오오무라선생의 전문 서적 《중국 조선족문학의 력사와 전개》가 세상에 나왔다.

《김창걸연구시론》,《심련수의 시를 두고》,《조양천농업학교시절의 김조규》,《윤동주시와 그의 생애》,《윤동주사적에 대하여》,《윤동주의 일본체험》,《최홍일의 소설세계》,《인삼의 고향 장백조선족자치현을 찾아서》,《중국 조선족과 그 언어상황》,《조선족문학의 매력》,《중국 조선족문학의 현황(상,중,하) 》,《김학철의 발자취》,《김학철선생》,《김학철선생의 생애》,《연변을 빼놓고는 론할 수 없는 조선문학》,《조선족문학의 매력》 등 수십편은 중국 조선족문학을 일정한 위치에까지 끌어올리고 단단하게 자리잡도록 한 오오무라선생의 공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전문 자료로서 위대한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소명출판사에서 출판하는 《오오무라 저작집》 (전6권, 이미 2권까지 출판)의 교정작업에 시간이 딸리는 선생이시다. 그외에도 일본 평범사에서 출판중인 조선 장편소설시리즈 《조선근대문학선집》 제2권에 강경애의《인간문제》를 번역한 뒤를 이어 제8권에 낼 리기영의 장편소설 《고향》에 대한 번역작업을 마무리단계에 둔 선생이시기도 하다.

일본 식민지문화연구학회의 년간지 《식민지문화연구》 제15호에 올해에는 연변의 리욱시인의 시 10여편을 제공하였다며 니이가다(新潟)대학 후지이시 다카요(藤石貴代)씨가 번역하게 된다고 기분이 좋으신 선생이셨다.

취재를 마무리할 즈음에 선생의 서재에 들어가 보게 되였다. 작은 전문 도서관이였다. 계렬적으로 정리정돈 된 책자들을 보면서 당연한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 ‘조선’이란 글발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였고 연변의 책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일부는 연변에 갈적마다 고서점에서 사셨다는 력사적인 책자들이였다.

20대 후반에 쓴 <나와 조선>이라는 수필에서 오오무라선생이 쓴 이런 글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였다.

“내속에 언제부터 조선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국 근대사와 문학을 공부하던중 나는 항상 인도와 조선이 마음에 걸렸다. 아세아 문화와 력사가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보잘 것없는 내 손을 뻗으면 신세 만 망치고마는 것이 아닌가 주저하고 있었다. 허나…조선의 력사는 일본과 너무나 생생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일본・조선・중국이 서로 뒤얽히는 관계를 해명하고...”

84세의 고령에서 되돌아 보는 지난 길에 젊은 오오무라 마스오의 그 꿈은 어디까지 도달되여 왔을가…

/ 리홍매 일본 특파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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