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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동네의 열쇠꾸러미를 안고 있는 경상도 아줌마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09.21일 08:37
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바야흐로 계절을 잃고 꽃이 땅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청청한 하늘을 날아다니던 꿀벌은 이날따라 유난히 드문 것 같았다. 여름의 더위를 밀어내고 갑자기 일어난 초가을의 찬바람을 피해 어딘가 도망한 것 같다.

  한때 토종벌의 벌통은 하늘이 마을에 선물한 '보배단지'였다. 항간에서는 그 마을을 아예 '꿀 동네'라고 불렀다. 흑룡강성(黑龍江省) 연수현(延壽縣)의 중화진(中和鎭) 선봉촌(先鋒村)'에서 실제로 있은 일이다.

마을 북쪽 입구에 서있는 표지석.

  결국 그 별명에 혹해 김덕림(1948년 출생)은 40리 밖의 가신(加信)에서 일부러 선봉촌에 이주했다. "친척의 소개를 받고 찾아갔는데요, 웬만해서는 이주민을 받지 않아서 호적을 힘들게 올렸습니다."

  일찍 1967년 무렵의 일이라고 한다. 그때 김덕림은 마을에서 명실공한 '가신'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가신은 사이에 끼인 모양이라는 의미의 '협심자(夾心子)'에서 지은 마을 지명이다.

  "저는 평안북도 출신인데요, 선봉촌 사람들은 거개 경상도 사람이었지요."

  김덕림은 변명하듯 이렇게 덧붙인다. 이 '가신'사람은 미구에 선봉촌에서 '꿀단지'를 단지채로 걷어안게 된다. 마을의 토박이 처녀 박정화(1950년 출생)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게 된 것. 그러고 보면 김덕림은 꿀이 아니라 처녀를 따라 선봉촌으로 찾아온 듯하다.

  양봉장은 꿀벌을 따라 동산에 찾아가야 했다. 동산은 꿀과 벌의 '에덴동산'이었다.

집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돌절구와 떡메가 반갑다.

  실제로 연수현의 조선족 역사는 동산에 시원을 두고 있다. 청(淸)나라 광서(光緖) 9년(1903), 김씨 성의 조선인이 동산에 이주했다고 '연수현조선족100년사'가 기술하고 있다. 이 100년사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조선 문자로 출판된 현의 조선족 지방사로 알려지고 있다. 무슨 원인인지 몰라도 김씨는 동산에서 거의 은거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그가 살던 곳은 훗날 '김고려구(金高麗溝)라는 지명으로 고착되었다. 이밖에 지방문헌인 '연수현지(延壽縣志)'에 따르면 그 이듬해인 광서 30년(1904) 또 파고려(巴高麗)라고 불리는 조선인이 가신 지역에서 살면서 수렵생활을 했다. (파씨는 조선 성씨에 없으며, 박씨의 와전으로 추정된다.) 김씨와 박씨는 연수 경내에 살고 있은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민국(民國) 20년(1931)에는 361가구, 1,936명의 조선인이 연수현에서 생활하면서 연수에 조선인사회의 초기 규모를 형성하였다.

  선봉 마을의 논농사 역시 다름 아닌 동산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동산은 장광재령(張廣才嶺)의 지맥(支脈)이다. 선봉촌은 바로 이 동산의 흐르는 물을 에워서 논을 지었다. 장광재령은 만족말로 '여의길상(如意吉祥)'이라는 의미이다. 적어도 동산은 이 길상(吉祥)을 벼가 아닌 꿀로 나타내려 했을지 모른다. 동산에 흐르는 시냇물은 너무 차서 종종 벼에 미숙이 갈 때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의 옛 소학교, 운동장은 밭으로 되어 있다.

  어찌됐거나 선봉에서 맨 처음 마을을 만들어 살고 있은 사람들은 일본인이었다. 1940년 초, 나가노겐(長野縣) 등 지역에서 들어온 일본개척단이 지금의 선봉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개척단은 내처 북쪽의 방정현(方正縣)까지 발을 폈다고 한다. 개척단의 치하에 조선인과 중국인도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땅이 하도 많아서 개척단이 떠나던 8.15 광복까지 여전히 개간한 땅보다 쑥대밭이 더 많았다고 한다.

  박정화의 옛날의 추억에는 키를 넘는 이 쑥대밭이 우거지고 있었다. "아버지랑 할아버지랑 뗏장으로 집을 짓고 땅을 가꿨다고 하던데요, 밤이면 정말 무서웠다고 해요. 모닥불을 지피지 않으면 늑대가 막 들어왔다고 합니다."

연수현 조선족 고중졸업생이 학교청사 앞에서 남긴 기념사진, 그들은 1974년 연수현 초고중 학교가 개설된 후의 제1기 졸업생이다.

  박씨 가문은 개척단의 뒤를 따라 이곳에 와서 행장을 풀었다고 한다. 박씨 가문이 다른 일행 몇몇과 함께 발을 들여놓았을 때 이곳에는 한해 전부터 벌써 조선인 세 가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중에 '연수현조선족100년사'는 1947년 2월 조선인 이주민 여덟 가구가 이곳에 와서 논을 풀기 시작했다고 연도를 밝혀 기술하였다.

  마을의 첫 이름은 왜서인지 가구의 숫자로 만들고 있었다. 8.15 광복 전에 선봉촌은 여섯 가구라는 의미의 '육호(六戶)'로 불렸다고 하얼빈(哈爾賓)의 '시지명지(市地名志)'가 밝힌다. 그 후 마을은 선후로 신흥촌(新興村), 호림촌(虎林村)으로 개명하다가 1954년에 비로소 현재의 선봉촌(先鋒村)이라고 새롭게 작명했다는 것이다.

농쟁기를 내려놓고 게이트볼을 즐기는 마을의 노인들, 첫줄 오른족 첫 사람이 김덕림이다.

  이때부터 일부 농가에서는 벌써 선봉촌의 솔선자로 되어 양봉업을 벌리고 있었다. 선봉촌이라는 이름이 선 후 이번에는 개체가 아닌 마을이 동산에 올랐다. 마을의 3개 소대(小隊, 촌민소조)가 각기 양봉장을 두었고, 양봉장마다 꿀벌 130통씩 길렀다. 일부는 농사를 짓지 않고 벌만 길렀다. 사람들은 꿀을 미처 나르지 못해서 산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깔아서 꿀을 저장했다.

  그때는 꿀이 많아서 꿀에 목욕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박정화가 말하고 있었다.

  "큰비가 내리면 온 마을에 꿀 냄새가 진동했어요. 땅에는 솜처럼 흰 꿀이 흐를 지경이었지요."

  어느 해인가 선봉촌은 무려 15만근의 꿀을 낸 적도 있었다. 그때 그 시절 꿀 한 근의 가격이 1원 30전이었다. 보신약 맞잡이인 계란 한 근에 고작 90전 정도 할 때였다. 선봉촌은 꿀 덕분에 공수(工値)가 일별 2원 이상으로 뛰어올라 연수에서 제일 잘사는 마을로 소문이 났다. 1959년, 흑룡강성 양봉 현지회의가 연수 현성에서 열렸는데, 선봉 마을은 그들의 경험을 120명 대표에게 소개하는 영예를 지닌다. 김덕림이 기어이 선봉촌으로 이사를 하게 된 이유를 알 것 같다.

  사실상 선봉촌은 꿀에 앞서 벌써 동네방네 이름난 고장이었다. 1950년대 초, 선봉촌은 땅이 많고 수확이 높다는 소문이 전하면서 많은 농부가 이사를 왔다. 선봉촌도 그때 80가구의 420명으로 부쩍 늘어났다.

  이 즈음 연수현 전체에 조선족 인구가 급작스레 늘어나고 있었다. 1952년 요녕성(遼寧省) 관전현(寬甸縣)에서 국가의 통일배치에 따라 180가구의 농가가 연수현에 집단 이주했다.

  에피소드가 있다. 1954년 조선의 복구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족 181가구의 771명이 조선에 이주했다. 나중에 이 이주민 가운데서 160여 가구가 다시 연수에 귀향한다. 1959년과 1960년, 일부 마을의 조선족 100여 가구가 다시 조선으로 나갔다. 그러나 1970년대 식량난으로 인한 연변과 요녕 지역 이민이 들어오면서 인구가 다시 보충되었다. 1981년 도합 12,019명에 이르는 등 1980년대 초반까지 연수현의 조선족 인구는 계속 상승세를 긋고 있었다고 '연수현지(延壽縣志)'가 기록한다.

  연수 현성에서 100여리 떨어진 선봉촌도 계속 마을의 덩치를 불려갔다. 김덕림이 이사했던 1968년 무렵 선봉촌은 180가구의 큰 마을로 되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 산꼭대기였다. 1982년 무렵부터 시작된 도시진출, 1990년대부터 늘어난 해외노무 등으로 연수현의 조선족 인구는 그냥 내리막길을 걷는다.

농쟁기를 내려놓고 게이트볼을 즐기는 마을의 노인들, 첫줄 오른족 첫 사람이 김덕림이다.

  현재 선봉촌 마을에 살고 있는 원주민은 33명 정도, 제일 나이가 어린 사람이 5,60대라고 김덕림이 밝히고 있었다. 선봉촌은 이번에는 현의 이름처럼 '연수'의 노인마을로 되고 있는 듯 했다. 참고로 연수는 장수현(長壽縣)으로 불리다가 내륙에 동명의 현성 이름이 있다고 해서 개명했으며 민국 18년(1929)에 연수현으로 작명했다. 연수는 최초의 지명인 장수현처럼 연년익수(延年益壽), 즉 장수를 한다는 뜻이다.

  솔직히 선봉촌의 실질적인 행정조직은 더는 촌민소조가 아니라 노인협회로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에 오면서 마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니, 촌장이 대뜸 소개한 첫 인물이 바로 노인들의 수장인 김덕림이었다. 김덕림은 2013년부터 선봉촌의 노인협회 회장으로 있었다.

  김덕림이 밝힌데 따르면 마을에서 논농사를 하고 있는 원주민은 현재로서는 하나도 없다고 한다. 논은 다른 마을의 사람들에게 임대되어 논과 밭으로 되고 있었다. 박정화는 뭐가 답답한지 우리의 대화에 참견을 하 듯 한마디 말했다.

  "우리 양주가 마을에서 젊은 사람의 축에 드는데요, 논농사를 무슨 힘으로 해요?"

  박정화의 말을 빈다면 논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사라지듯 마을에서 어린이의 말소리를 들은 기억이 오랬다. 아니, 마을에는 아직도 한명의 어린이가 있다고 했다. 한족 촌민의 자식이었다. 어린이는 10리 밖의 농장 학교에 통학하고 있었다.

  실은 선봉에 1947년부터 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연수현의 조선인학교는 이보다 20년 전의 민국 15년(1926)에 벌써 존재했다. 그때 연수현에는 한인사립소학교가 있었다고 '연수현지'가 기술한다. 민국 19년(1930), 연수현의 사립학교는 무려 13개에 달했다. 연수현에서 조선족 인구가 정점을 이루고 있던 1985년 무렵 조선족소학교만 해도 16개, 중학교는 2개나 되고 있었다.

  선봉학교는 학생들이 줄어들면서 1999년에 이웃한 중화진의 민광(民光)소학교와 합병하여 중화진 조선족소학교로 되었다. 합병한 그 이듬해 중화진 조선족소학교의 학생은 도합 47명, 와중에 2학년은 학생이 제일 적은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결국 이 소학교도 연수 역사의 뒤안길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학교가 합병되면서 선봉촌과 민광촌도 선봉촌 하나의 마을로 통합되었다. 와중에 경상도 마을의 선봉촌과 전라도 마을의 민광촌은 물과 기름처럼 한데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8.15 광복 후 반세기 넘도록 두 마을 사람끼리 서로 통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을끼리 그 무슨 척을 진 게 아니었다.

1980년대경 북경유람을 한 흑룡강의 한 조선족마을 사람들.

  "전라도 깍쟁이라고 했어요… 예전에는 이미지가 좋지 않았지요."김덕림이 얼결에 입 밖에 흘리는 말이다.

  옛날 조선의 유림(儒林)은 대부분 경상도에 있는 반면 전라도는 유배지로 쓰이는 등 역사적으로 지역차별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대륙에 이주한 후손들에게도 여전히 그런 차별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눈과 마음의 간극이 좁혀졌을까, 지역차별은 인제는 두 마을 사람들의 옛날의 취담으로 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한 학교에서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던 두 마을에서 서로 결혼한 부부도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흡사 옛 고향마을과 앙숙을 진 듯 더는 마을에서 살지 않고 있었다. 아파트가 있고 공원이 있는 좋은 도시로 꽃을 찾은 꿀벌처럼 분분히 날아갔다.

  "제가 보관한 집 열쇠만 해도 열세 개나 되는데요."박정화의 자랑인지 푸념인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박정화는 마을 동생의 집, 이모네 집… 또 누군가로부터 빈 집의 열쇠를 받고 있었다. 천정에 비라도 새지 않았는지 이따금씩 빈집에 들려 살펴달라는 부탁이란다. 박씨는 마을의 오랜 가문이다 보니 친척이 남달리 많았다.

  "예전에는 어느 집에서 큰 잔치를 한다고 하면 몇 십 가구가 한자리에 모였어요."

  옛날 옛적의 이야기이었다. 언제인가부터 이웃이 하나둘 씩 자리를 떴고 집들에는 자물쇠 걸렸던 것이다.

  사실 동산에 있던 벌통은 이보다 앞서 사라지고 있었다. 산기슭에 철길이 서고 밭과 논에 농약을 치면서 꿀벌이 날아갔던 것이다. 꿀벌이 사라지면 인간도 뒤미처 사라지게 된다고 과학자가 귀띔한다. 그렇다면 인간 아니, 꿀벌은 다시는 동산에 날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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