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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국경의 그 강을 건넌 ‘춤’의 녀자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7.10.10일 10:24
-중국 조선족무용의 정체성을 확립한 선각자 박용원교수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옹립된 박용원 조각상

먼저 소설이 아니라고 거듭 밝혀야 할 것 같다. 주인공의 이야기가 자칫 허구의 소설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분명히 실재한 인물이고 또 그녀의 이야기도 진실로 있었던 지난 력사의 한 부분이다.

이 이야기는 1940년대의 마지막 해인 1949년 1월 3일 아침에 시작된다.

“당시 19세 밖에 안되는 어린 중국공민으로…(무용)공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차비만 소지하고 막연하게 두만강을 건너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자필 리력서는 이렇게 그 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두만강을 건너 저쪽 땅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남양 국경지역의 조선수비대에 발각되여 내무부의 조사를 받았다.

박용원교수의 자필 리력서

그 때 박용원(朴容媛, 1930-1992)은 그녀가 원체 평양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녀 본인이 경상북도 김천군에서 출생, 1938년에 두만강 이쪽의 룡정으로 이주한 사람으로 현지의 사정에 밝았다.

“음악학교에서 회령에 하향을 나왔다고 그들을 속였습니다. 삼촌이 살고 있는 도문에 잠간 건너갔다 오는중이라고 했지요.”

4일 후 박용원은 홀로 평양에 도착하여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찾아갔다. 수험(受驗) 결과 그녀는 연구소의 입학자격증을 금방 받을 수 있었다. 연구소의 주인공 최승희(崔承喜, 1911-1969)는 8.15 광복 후 평양에서 그녀 이름의 무용연구소를 세운 사람이다. 반도를 건너 중국 대륙 나아가 유럽과 미주에 소문을 놓았던 최승희는 ‘반도가 낳은 세계적인 무희’로 불리우고 있었다.

스승이 열고 제자가 있는 무희의 이야기는 반도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박용원은 나중에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 창작그룹 연구부원(部員)으로 거듭났다. 그녀는 조선민족 무용을 보급한 공로를 인정 받아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공훈상을 수여받는 등 조선의 이름 있는 무용인으로 평가된다.

3년 후 박용원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그녀는 이 때부터 연변에서 최승희의 무용체계가 씨앗을 뿌리고 뿌리를 내리게 했다. 이로써 최승희의 조선민족 무용교수의 춤 수립체계는 반도의 남북에 비해 대륙에서 가장 완정성과 계통성을 띠게 되였다.

2017년 9월 30일, 연변대학 예술학원 청사에는 박용원의 조각상이 옹립(擁立)되였다. 조선민족 무용의 전설은 그렇게 백옥의 조각상으로 대륙 동녘의 땅에 떠오르고 있었다.

국경의 강을 넘나든 그 이야기

전설의 무희 최승희

단지 리력서의 저술에 의거해서는 박용원의 무용재질이 언제부터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없다. 박용원은 그녀가 적어도 룡정 근화(槿花)녀자학교를 다니던 1945년 9월부터 교원으로 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참고로 박용원은 1938년 두만강을 건너 룡정에 이주한 후 룡정 현지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녀가 춤을 가르치는 녀자로 사람들의 시야에 처음 떠오른 건 1947년 12월 5일이다. 사범학원의 교육학부를 졸업한 박용원은 연길시하남소학교에서 어린이들의 무용지도를 시작했다.

이 때 지인들은 박용원의 무용 특기를 알고 늘 그녀를 권유하고 있었다. “평양에 무용을 가르치는 연구소가 있다는데 왜 거기로 가지 않지?” 그러찮아도 무용 집착은 박용원을 항상 들뜨게 하고 있었다. 결국 평양에 가기 위해 하남소학교를 사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49년 1월 7일, 박용원은 소원 대로 최승희무용연구소에 입학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돛 단 배처럼 순조로운 건 아니였다. 조선 국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용연구소에서 자비생으로 공부를 해야 했다. 박용원은 선후로 성인중학교의 시간강사, 김일성대학 고학생들의 원고 재필서 등 아르바이트를 했다. 또 류숙지가 없어서 하루 건너 이 집 저 집 옮겨다녀야 했다. 나중에 조선 고위관원의 사택에서 식모로 일하는 대가로 류숙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박용원의 무용연구소 무용공부는 단 한번도 끊지 않고 지속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용원의 무용배우 생애는 6.25전쟁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이 때 연구소는 훈련과 학습을 잠시 중지, 부대에서 소규모의 위문공연을 진행했다. 박용원은 그 때 그 날자를 특별히 자필 리력서에 낱낱이 적고 있었다.

북경무용학원에서 무용을 가르치는 박용원교수

“1950년 10월 10일 밤 열시, 선전부의 후퇴명령으로 최승희 애인 안막선생의 지시를 받고 중앙이동예술대 제1대 8명의 한 사람으로 만포까지 후퇴했습니다.”

만포에 도착한 후 박용원은 전시(戰時)중앙이동예술대 2분대에 편입되여 부대 혹은 농민을 대상으로 전시위문공연을 했다. 1951년 5월, 정식으로 최승희 무용창작 공연에 출연했다. 그해 7월 3일부터 8월 5일까지 박용원은 또 조선인민중국방문무용단의 일원으로 중국 전국 순회공연에 참석했다. 이듬해인 1952년 6월 몽골 방문 조선대표단의 일원으로 출국공연에 참석했다. 이에 앞서 1951년 8월 20일부터 12월 10일까지 두달 반 동안 박용원은 료녕성(遼寧省) 창도현(昌圖縣)에 가서 중국인민해방군 문예대대의 무용보도 과업을 수행, 그들의 무용 창작에 필요한 동작 기초를 보급했다. 리력서의 내용을 읽어보면 이 무렵부터 박용원은 무용교육 재질의 두각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1951년 3월, 박용원은 최승희와 그의 일부 제자들과 함께 북경 중앙연극대학 소속 최승희무용연구반을 개설, 연구반의 일원으로 참석한다. 이 무용연구반은 중국 무용계의 대가 오효방(吳曉邦,1906-1995)의 무용운동간부훈련반과 함께 공화국이 개설한 첫 무용전문 대학반이다. 박용원은 무용연구반의 공부를 하는 동시에 일부 교수를 진행했다. 무용연구반에서 육성한 중국학생들은 공화국 창건 후 양성한 제1대 무용가들로 전국 주요한 예술단체에 포진한다.

조선 내각의 결정으로 무용연구반의 최승희와 제자는 1952년 8월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최승희무용연구소는 조선 문화선전성의 직속기관으로 되여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개명한다. 무용에서 줄곧 각별한 지도력과 연기력을 나타냈던 박용원은 연구소 창작그룹의 연구부원 직무를 갖게 된다.

그러나 박용원은 종국적으로 두만강 이쪽의 연변 고향으로 귀향을 작심한다.

마지막의 그 강을 넘은 이야기

제자들과 함께(앞줄 오른쪽 세번째 사람)

그 때 조선의 국내 정세와 더불어 무용연구소의 상황은 아주 복잡했다고 박용원이 자필 리력서에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주변에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그러나 최승희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기막힌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박용원은 신기하게도 스승 최승희와 동월동일의 1930년 11월 24일 출생이다. ‘동갑’의 스승과 제자는 늘 19년의 나이 차이를 허물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용원은 스승 최승희에게 그녀의 귀향 속내를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 그 무렵인 1953년 2월, 박용원은 자강도 지방에서 무용보도를 하던 도중 차전복 사고로 골절과 근육 단렬의 중상을 입었다. 이 상처는 오히려 박용원에게 다시 강을 건너 연변에 귀향할 구실로 되고 있었다.

“저는 이 다리가 회복되지 못하거나 또 회복될 수 있더라도 돌변의 사정이 있을 때는 (평양에) 못 올 수 있습니다.”

최승희는 박용원에게 직접 내무부 통행증 수속을 해줬다. 최승희는 무용 교육과 보급에 전념하고저 하는 제자의 귀향을 아주 기쁘게 돕고 있었다고 박용원은 자필 리력서에 밝혔다.

1953년 4월 19일, 박용원은 연길에 돌아왔다. 그녀는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고 연변대학의 김씨 성의 교수와 결혼했다. 치료를 마친 후 연변가무단에서 조선민족 무용 기본훈련을 보도했다. 그녀는 마침내 대륙에 정착, 꿈의 무용 생애를 본격적으로 펼치는 듯 했다.

“복은 천천히 오고 화는 쌍으로 온다.” 몇년 후인 1957년 박용원은 자필 리력서를 조직에 회부하게 된다. 국경의 강을 넘나든 그녀의 소설 같은 경력은 당연히 심사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 해 중국 대륙에서는 정풍운동과 반우파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실제 조선에서도 일장 정치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958년 문화선전성 부상으로 있던 안막이 반당종파분자 혐의로 체포되였고 뒤미처 최승희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도 결국 페쇄되였다.

경계의 그 강을 건넌 박용원도 정치운동의 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종당에는 대학교의 강단을 쫓기듯 내려서 시골마을에 ‘류배’를 가게 되였던 것이다.

1960년대가 막 가는 1969년 12월이였다. 박용원은 대학 캠퍼스를 떠나 모아산(帽兒山)을 넘었다. 모아산은 연길과 룡정 접경의 산이다. 산너머에는 춤의 무대가 아닌 거친 땅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곳 룡정시 동성향 태평촌의 시골마을에서 박용원은 동네의 아낙네들과 함께 날마다 장고 대신 낫과 호미를 휘둘렀다.

연변대학 인사처 전임 처장 로동문은 그 때 박용원이 마을에서 로동교양을 받고 있었다고 회억한다. 그 무렵 로동문은 룡정제1중학교의 공청단서기 직무를 맡고 있었다.

“박용원선생은 ‘반동학술권위’의 감투를 쓰고 투쟁의 대상으로 되고 있었지요.”

학생들에게 무용을 가르치고 있는 박용원교수

1972년 음력설, 로동문은 소문을 듣고 태평촌의 그 마을에 찾아갔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박용원을 룡정제1중학교의 무용교원으로 초빙했다. 험악한 그 년대에 감히 예술인재를 보호, 등용한 로씨의 용기는 후날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박용원은 중학교 무용교원으로 초빙된 후 눈물부터 흘렸다고 한다. 인생의 저조기에 있던 그녀가 뜻밖에도 ‘신의 선물’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때 박용원은 무용생애가 논과 밭으로 끝났다고 생각하고 춤과 무대에 대한 꿈을 접고 있던 참이였다.

미상불 박용원은 운명적으로 춤의 그 세계와 접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발 한짝’을 찾은 이야기

이윽고 박용원은 무용극 <신발 한짝>, <아마니(阿媽妮)>를 무대에 올렸다. 혁명적인 본보기극(樣板戱)이 중국의 무대를 통치하고 있던 그 시절이였다. 연길현(지금의 룡정시)문공단 등 전문 문예단체는 누구나 감히 창작품을 무대에 올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골 중학교의 일개 선전대가 나중에 자치주의 소재지 연길시내에 올라와 군분구(軍分區)에서 무용극을 공연하는 기적을 연출하고 있었다.

“〈신발 한짝〉은 딸이 지주에게 끌려가면서 신발 한짝을 떨구는 진실로 있었던 피눈물 나는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든 겁니다.”

로동문은 박용원의 조각상 제막식에서 이 이야기를 회억하면서 감개무량해했다. 그 때 무대 뒤에서는 연주자들이 울고 무대 우에서는 배우들이 울고 무대 아래서는 또 관중들이 울고 있었다고 한다.

삽곡 <어머니와 동생을 도울래>는 종국적으로 그 때 그 시절 룡정제1중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애창곡이였다. 이 삽곡은 그들이 교가처럼 저마다 익숙하게 부르는 노래로 되고 있었다.

박용원교수를 룡정제1중학교 무용교원으로 초빙한 전임 연변대학 인사처장 로동문

“길가에서 주어온 한쌍(컬레)의 헌신/어머니는 밤도와 곱게 기웠네

어머니와 동생은 나를 신으라(고)/헌신 한짝 귀중한 우리 집 신세…”

박용원은 그 때 그 시절 운명의 ‘신발 한짝’을 옛 고향과 옛 고향 사람들로부터 다시 얻고 있었다. 또 옛 고향과 옛 고향 사람들은 이로써 반도에서 시작된 그 무희(무용)의 신화를 계속 잇고 있었다.

박용원은 드디여 그녀의 춤의 세계를 되찾고 있었다. 그 세계에서 박용원의 춤 추는 모습은 화려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977년, 박용원은 조선족무용의 첫 교재인 《조선민족무용기본》을 출판하며 잇달아 교재 《조선민족무용표현동작묶음》을 편찬한다. 1983년에는 론문 <조선족무용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발표하고 조선족무용의 특징을 8가지로 귀납하는 등 중국 조선족무용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선각자로 대두한다. 이 기간 그녀는 무용(극) <봄맞이>, <장고춤> , <도라지꽃>, <칼춤>을 창작, 국가와 성, 주급 상을 수차 수상했다. 이밖에 손(벽)치기, 무릎치기 등 박용원의 남성춤은 또 '천하제일'라는 평을 받는다.

연변의 하나의 상징물인 연변가무단은 그 대부분 무용인들이 박용원의 제자나 제자의 제자로 알려지고 있다. 박용원의 슬하를 떠난 후에도 무용 후배와 제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찾았다. 제자 황숙자도 예술학교를 졸업한 3년 후 아예 다른 무용인 한명과 함께 또 박용원에게 다녀왔다. 그 때가 1978년 7월이라고 황숙자는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회억하고 있다.

“학교를 너무 일찍 나온 게 아쉬워서 무용을 더 배우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9월 30일 오전,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있은 박용원 조각상 제막식의 한 장면

박용원은 저녁마다 퇴근 후이면 그들 둘을 위해 따로 무용특강을 했다. 춤의 내용을 설명하고 뒤미처 시범동작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정전이 되여 학교 전체가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황숙자 등이 못내 아쉬워하자 박용원은 그예 어디선가 초불을 얻어오더라고 한다.

그 날 학교 강당의 야울야울 춤추는 초불 아래에서 스승과 제자는 몽환 같은 춤의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현실과 꿈의 그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박용원은 정녕 춤에 살고 춤에 움직이는 춤의 녀자 아니, 춤을 생명의 전부로 뛰는 신들린 무신(巫神)의 기억으로 황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말 잊을 수 없어요. 우리가 평생토록 기억해야 하는 무용인입니다.”

/북경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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