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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에 살고 있던 박씨의 '국모'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12.20일 10:33
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흑룡강신문=하얼빈)그들의 계보(系譜) 맨 꼭대기에 적힌 시조(始祖)는 여인이었다. 족보(族譜)치곤 정말로 희귀한 계보였다. 하긴 족보라면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들을 기록한 책이 아니던가. 족보를 편찬할 때 시조로부터 성(姓)과 본관(本貫)이 같은 남자 쪽의 혈통을 기록하는 게 당연한 이치이다.

동릉 근처의 원침에 있는 봉성부인의 비석 .

  그러나 박옥경(朴玉卿, 1954년 출생)은 그들의 시조가 분명히 여인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었다.

  "황제가 시조 할머니의 자식에게 일부러 할머니의 성씨를 하사했다고 하지요."

  이에 따르면 박씨의 선대(先代)는 노조부(老祖父)가 아닌 노조모(老祖母)의 성씨를 따랐다는 것이다. 노조모가 청(淸)나라의 황제에게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박옥경은 아련한 옛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예전에 박씨 가문의 제일 오랜 족보는 바로 그의 집에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족보는 '문화대혁명(1966~1976)' 때 '낡은 것을 타파하는' 운동에 휩쓸리면서 막무가내로 불살라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시조는 박국태(朴國太)라고 불리는데요, 동릉(東陵)의 어디에 묻혔다고 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박옥경이 살고 있는 곳은 동릉이 위치한 북경 동쪽에 있는 게 아니다. 박씨의 가족은 일찍부터 북경 서쪽의 문투구(門頭溝)에서 동네를 이뤄 살고 있었다. 또 여느 박씨 동네처럼 집성촌에 박씨의 성씨를 붙인 게 아니다. 향기를 실어 풍기는 산골짜기라는 이름의 향욕촌(香峪村)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지명 자체를 만든 향긋한 참죽나무가 무더기로 마을의 여기저기에 자라고 있었다.

  어쩌면 마을에 굳이 박씨의 성씨를 달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올 듯하다. 옛날 여성들은 독자적으로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딸로서, 결혼 후에는 남편의 아내로서 존재했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의 어머니로서 존재했다. "풍속에 따라 (여자의) 이름을 짓지 않았다"고 고려 문헌에 기록할 정도이다.

  향욕촌 박씨의 시조도 원체 여느 고려 여성처럼 이름이 없었을 수 있다. 국태(國太)라면 이름이라기보다 문자 그대로 황제의 모친 즉 국모의 의미라는 얘기이다.

  정말로 박씨 성의 '국모'는 궁실에 실재한 인물로 현신(現身)하고 있었다. 청나라 때 자금성(紫禁城)에는 분명 박씨 성의 유모(乳母)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순치(順治, 1644~1661)황제의 유모였다고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이 문자로 기록한다. 박씨 유모는 나중에 청나라 황릉인 동릉의 근처 원침(園寢)에 묻혔다. 동릉에 있는 순장무덤의 4기의 유모 원침에서 박씨 유모는 신분이 제일 특수하다. 박씨는 젖먹이의 순치황제를 길렀고 또 어린 시절의 강희(康熙)황제를 보살폈다고 한다. 박씨의 이런 특수한 신분은 청나라에 유일무이하다. 강희황제는 나중에 박씨를 봉성(奉聖)부인으로 봉(封)했다. 강희 20년(1681), 봉성부인이 병사한 후 강희황제는 특별히 동릉 동쪽 부근에 땅을 선택하고 박씨를 순장했으며 봉성부인의 원침이라고 칭했다. 강희황제는 그 후 봉성부인의 원침을 4차나 찾아 직접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봉성부인은 한때 경동(京東, 북경 동쪽)에 살던 박씨들과 친척이었다고 전한다. 경동의 박씨는 언제인가 아속(衙屬)과 분쟁이 생긴 적 있는데, 이때 봉성부인이 강희황제에게 알려 현지의 지부(知府)를 파면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 때문에 경동의 박씨는 현지 한인(漢人)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부득불 북경을 떠났다. 경동의 박씨는 나중에 당산(唐山) 부근의 야리(冶里)에 집성촌을 이뤘다. 이 이야기를 시시콜콜 적는 것은 경서(京西)의 향욕촌 박씨가 바로 이 경동의 야리촌 박씨와 한 집안이라고 박옥경의 가문에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저자의 인터뷰를 받았던 야리촌의 박씨는 가문의 9대손이었고, 향욕촌의 박옥경은 가문의 10대손이었다. 앞뒤의 퍼즐을 서로 맞추다 보면 박씨 시조의 박국태는 자금성의 봉성부인과 하나의 인물로 겹친다.

동릉에 한때 문물로 전시되었던 봉성부인의 화상.

  박옥경은 인터뷰 도중에 또 하나의 실마리를 좌중에 풀어놓았다. "조모의 남편 이름은 기억을 잘 못하는데요, 아무튼 만족이라고 들었습니다."

  실제 봉성부인의 옛 신분은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 등에 등장한다. 그녀는 시댁이 휘발살극달씨(輝發薩克達氏)이며 남편이 파살리(巴薩哩)이었다. '살씨가보(薩氏家譜)'에 따르면 파살리는 일찍 사망하면서 수룡입관(隨龍入關) 즉 황제를 따라 장성을 넘는 호황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박씨는 황실을 따라 북경에 진출하며 미구에 강희황제에 의해 봉성부인으로 등극하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는다. 또 이로 인해 박씨는 궁극적으로 자식에게 성씨를 물려주는 등 향욕촌 박씨 가문의 시조로 탄생하는 것이다.

  잠깐, 박국태를 시조로 삼는 박씨는 실은 향욕촌 한 마을의 박씨만 아니었다. 박씨가 시초에 어디에서 살았는가 하고 묻자 박옥경의 대답은 곧바로 향욕촌의 뒷산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산 너머의 융은사(隆恩寺)에 같은 박씨가 있지요. 우리 선조는 옛날 이 융은사에서 건너왔다고 합니다."

  박옥경의 말에 따르면 박국태 후손의 두 형제는 산 앞뒤의 마을로 갈라졌다. 그래서 박씨의 계보는 시초부터 두 갈래의 각기 다른 계열로 나뉘고 있었다. 박옥경처럼 향욕촌 박씨의 돌림자인 구슬 옥(玉)은 융은사촌 박씨의 돌림자인 모일 회(會)와 각기 돌림자의 항렬이 같으며 또 비슷한 나이라고 한다. 뒷이야기이지만, 두 마을의 박씨는 항렬의 돌림자가 다를 뿐이며 각기 항렬의 세수(世數)와 가구의 숫자가 모두 비슷하게 존속하고 있었다.

박씨들이 모여 살고 있는 향욕촌, 옛 향욕촌은 이 마을에서 몇리 더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향욕촌 박씨의 선조는 옛날 고분 때문에 산을 넘었다고 박옥경이 밝히고 있었다. "우리 마을 근처에 옛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요, 무슨 무덤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1958년, 북경 군부대가 땅을 징발하여 사용하면서 주민들이 철거되었고 옛 향욕촌은 금지구역으로 되었다. 옛 향욕촌의 옛 무덤은 더구나 찾을 수 없는 옛 이야기로 멀어지고 있었다.

50년 전 융은사촌을 철거하면서 임시 만든 판잣집은 아직도 남아있다.

  융은사의 옛 무덤은 향욕촌 박씨들의 소실된 옛 기억을 어느 정도 되살리고 있는 듯 했다. 융은사는 청나라의 개국공신 아파태(阿巴太)가 장성을 넘은 직후인 1646년 사망하면서 그의 원침(園寢)으로 되었다. 아파태는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일곱 번째 아들이며 아파태의 원침은 그와 아들, 손자의 무덤을 주축으로 이뤄지고 있다. 여러 무덤 주인의 친척과 병사, 하인 등이 무덤의 지킴이로 되었다.

  융은사촌의 박림삼(朴林森, 1951년 출생)은 마을의 여러 성씨 가족이 각기 다른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고 밝혔다. "우리 박씨는 아파태의 무덤인 선조(先祖) 태왕(太王)의 무덤을 지키던 가문이라고 합니다."

  또 조씨(趙氏)가 큰 태왕의 무덤, 반씨(潘氏)가 둘째와 셋째 태왕의 무덤, 제씨(齊氏)가 넷째 태왕의 무덤 지킴이인 그런 식이었다고 박림삼은 회억했다. 융은사촌에는 이렇듯 전문적인 무덤 지킴이의 성씨가 10여개였으며 공화국 창건(1949) 후에도 여러 무덤 주인의 위치에 각기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향욕촌 박씨가 그 무슨 무덤 지킴이었다는 게 자못 수긍이 되는 대목이었다.

북경 융은사촌의 박림삼은 조선족으로 등록되어 있다 .

  오히려 의문이 가는 것은 박씨들의 돌림자가 없는 박림삼의 이름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는 원래 넓을 홍(洪)의 돌림자를 썼는데 이날 함께 저자의 인터뷰를 받은 융은사촌의 박홍강(朴洪剛)과 같은 항렬이었으며 또 박홍강과 함께 같은 증조부를 두고 있었다. 호적에 이름을 올릴 때 마을의 동명의 박씨와 서로 다투다가 부득불 이름을 고쳤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또 다른 데로 흘렀다. 청나라 때 박씨는 달마다 봉록을 받았다고 박홍강이 박삼림의 말을 잇고 있었다. 관가에서 달마다 관원이 내려와서 무덤 지킴이에게 각기 은자를 내줬다는 것. 박국태 즉 봉성부인은 백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에게 계속 복을 물려주고 있는 듯 했다. 박씨는 무덤 지킴의 신분을 떠나 현지에서 큰 세도를 누리고 있었다. 박홍강의 셋째 증조부 박덕견(朴德甄)은 왕실의 작은 두목으로 총잡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왕실의 소유지가 있는 하북성(河北省) 고원현(沽源縣) 일대에 박씨가 총잡이들을 데리고 다녀올 때면 연도의 마적들은 아예 멀찌감치 박씨의 일행을 피했다고 한다.

융은사촌의 박홍강이 박씨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증조부님의 총잡이들은 그때로는 드문 연발총(快銃)까지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박홍강의 어린 기억에 총알처럼 박혔다는 가문의 옛 이야기이다.

  고원현은 증조부가 자주 드나들면서 언제인가부터 박씨네 셋째의 주둔지라는 의미의 지명 '박삼영자(朴三營子)'가 생기까지 했다. 사실상 이 총잡이들이 아니더라도 워낙 만주 8기병을 따라 말을 타고 장성을 건넜던 박씨는 군부대와 남다른 인연이 있는 듯하다. 예전에 북경 시내에는 박씨 장령의 '박대장군(朴大將軍)' 묘비가 있었는데, 이 묘비는 '문화대혁명' 초기까지 숭문문(崇文門) 일대에 잔존했다고 한다.

  '박대장군' 묘비의 옛 존재를 저자에게 알린 박진산(朴振山, 1952년 출생)은 향욕천에 있는 그들의 박씨 가문에도 이런 자랑거리가 있다고 했다. 어쩌면 박진산의 증조부는 봉성부인 때 생겼던 그 일을 2백여 년 후 다시 반복하는 듯 했다. 박씨 가문과 생긴 소송 문제로 황제가 칙령을 내린 사건은 이번에는 경동이 아닌 경서에서 또 한 번 일어났다고 한다.

  "왕실의 산을 지키고 있던 증조부가 본바닥의 건달과 분쟁이 생겼대요." 박진산은 현지 문투구의 사지(史志)에 실은 이야기를 이렇게 회억했다.

  이때 건달들은 산에 함부로 탄갱을 개설했다. 박씨가 살던 문투구 일대는 석탄을 캐낸 역사가 오래며 청나라 말 탄갱이 많았다. 그런데 건달들이 암암리에 관부와 결탁하면서 증조부는 뜻밖에도 관아의 송사에서 지게 되었다. 그러자 증조부는 직접 황제에게 상주했고 건달들은 종국적으로 목이 날아났다는 것이다.

  박진산은 증조부가 황제를 알현할 수 있은 것은 정삼품(正三品)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힌다. "민국(民國, 1912~1949) 전까지 우리 가문은 정삼품의 관모(官帽)를 들고 관가에 가서 봉록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관모는 정삼품의 품계와 그 대우를 확인하는 박씨 가문의 증명서였다. 청나라 때 정삼품의 품계 대우는 통상 3대를 승계했다고 한다. 이 관모는 청나라가 망국한 1912년부터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극좌운동이 일어났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그만 분실되었다. 이 관모처럼 박씨 가문에 남고 있는 옛 기억도 역사의 뒤안길로 멀어지고 있었다. 같은 선조의 박씨이었지만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향욕촌의 박씨는 족명(族名)이 한족이었으며 융은사촌의 박씨는 족명이 조선족이었다.

  와중에 옛 선조가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라고 해서 조선족의 족명을 찾은 게 아니라고 박홍강이 그들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정부의) 정책에 따르면 소수민족은 아이를 둘 낳을 수 있고 또 대학교 입시 때에는 가산점을 부여한다고 하던데요."

  1990년 문투구 호적상의 조선족은 39명으로 나타났으며 북경의 조선족 인구는 도합 7,689명으로 집계되었다. (2010년 북경 조선족 인구는 3만 7천명으로 늘어났다고 제6차 인구전면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실제 조선족(인)의 이주는 훨씬 일찍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북경 지방지(地方志)의 속편인 민족지(民族志)에 따르면 당(唐)나라 고종(高宗, 649~683) 연간 선후로 1만 4천 명의 고구려인이 북경에 정착했다. 원(元)나라 말에도 고려인들은 적지 않게 북경에 거주했다. 하지만 족명의 반도 시원을 명백히 밝힐 수 있는 성씨는 현재로선 거의 박씨 하나뿐이다. 그러고 보면 명나라 말, 청나라 초 만주 8기병을 따라 장성을 넘은 박씨와 그 후예들은 북경 조선족의 최초의 '시조'로 되고 있는 것이다.

  북경 서쪽의 마을에서 시작된 박씨의 옛 이야기는 며칠 후 북경 동쪽의 하북성 동릉에서 끝났다. 유감스럽게도 동릉 현지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봉성부인이 박씨 유모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봉성부인의 원침(園寢)은 단지 '유자의 엄마 무덤(乳子媽墳)'라는 무명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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