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조선족이 모인 장소나 노래방을 살펴보면 한국노래가 상당한 우세를 점하고 있다. 지난 세기 90년대로 거슬러올라가 보면 자유로운
한국방송 청취도 있었겠지만 특히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들에 의해 대량의 한국노래책이나 한국가수들의 록음록화테프가 흘러들어왔다. 또 일부 사람들은
한국노래 록음록화테프를 팔아 돈벌이를 했다. 이렇듯 한국음악문화의 충격 속에 우리 노래가 자연히 밀려나게 되였다.
우리 노래의 이런 전통과 현실의 딜레마 앞에서 사실 한국노래를 곧잘 불러주는 이들 치고 그 누구 하나 중국에 와서 쉼없이 달리는 세월
속에서 그 가쁜 길을 걸어 새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않았던가? 이 가운데서 산생한 생활의 노래를 부르며 우리는 중국에 뿌리내렸고 우리 새세대 또한
무럭무럭 자라나 오늘의 조선족사회 군체를 무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노래는 삶이고 인생이였으며 또 일종 생활방식과 사회의식의 표출이였다.
한국노래는 우리와 한겨레로 그 말과 글까지 다 통해 아주 쉽게 접수되고 곧잘 부를 수 있다. 하지만 한국노래는 실상 우리와 판이한
생활방식에 사회의식과 이데올로기까지 다 다른 관계에서 산생된 노래이다. 일부 한국노래는 우리와 차이점이 있고 또 잘 어울리지도 않으며 지어
국정과도 서로 저촉될 수 있다. 때문에 노래는 비록 국경이 없다지만 그렇다고 아예 때나 장소를 불문하고 마구 한국노래를 불러준다는 것은 좀
고려해야 할 듯싶다.
우리 노래가 이처럼 경황이 없는 가운데 동북3성의 조선족 노래간행물도 하나 둘씩 페간되기에 이르렀고 학교나 유치원 그리고 로인협회에서는 새
노래가 드물어 그저 중국노래나 한국노래를 배워 불러야만 했다. 또 음악창작인들은 마치 터전을 잃은 페농인이 된 격이였다. 이로써
같은 명곡들이 더는 나올 길 없게 됐고 또 각지의 군중문예활동엔 새 노래가 없고 종목들도 침체되여갔다. 지어 중앙의
노래간행물과 방송TV에선 우리 노래가 나가지 못하고 ‘중국개혁개방 40돐 경축공연’에도 조선족노래종목이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 문예의 부흥과 우세를 어떻게 탐구해야 하는가? 음악 관련 간행물부터 꾸려 가곡창작을 다그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다.
그런 와중에 요즘 《연변음악》이 재출간 소식을 전해오니 반갑기 그지없다. 《연변음악》은 연변음악가협회 기관지로 동북3성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응당 성급으로 올려 월간으로 발행한다면 우리 조선족노래 창작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이 분명하다. 이외 기타 신문과 잡지 및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종종 창작가곡을 실어주고 문화관과 방송TV 같은 매체에서도 정기적인 ‘가곡창작반’을 꾸려 새 노래를 창작하고 발표시켜주며 또
각지에서는 자주 문예경연과 노래콩클 및 창작가곡 공모를 조직해 새 노래 보급과 제고를 다그쳐야 한다.
또 음악창작에 있어서 우리는 오래동안 침체됐던 조선노래 그늘속에서 뛰쳐나오고 또 한국노래 그 물결 속에서도 헤쳐나와야 한다. 응당 우리
중국조선족의 특색있는 생활에 토대하여 그 개성 특점을 충분히 헤아려 생생히 반영해야 할 것인즉 여기서 창의력과 독창성의 매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또 정품을 받아들이는 원칙에 좇아 조선노래나 한국노래 그리고 중국노래나 외국노래의 창작 수법이나 기교는 의례 학습해야 하고
더불어 우리 민요와 장단을 바탕으로 생활에 대한 성찰을 강화해 부단히 새 풍격에 아름다운 선률을 뽑아내여 ‘재미있는 노래’를 륙속 탄생시킴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취지인 것이다.
‘노래는 민족의 얼굴’이다. 때문에 조선족문예의 부흥을 위해 하루속히 조선족 노래간행물을 많이 꾸리여 창작가곡의 돌풍을 일으키는 것이
어쩌면 궁극적으로 우리 주류문예인 음약분야에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상의 우세를 확보하고 더욱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길이 아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