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며 가며
된장국
정홍화
“야? 너는 언제 오니? 학교일은 니 혼자 하니?”
전화를 타고 들려오는 엄마 특유의 연변말투 목소리에는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이 딸에 대한 안타까운 불만과 애처로와 하는 근심이 가득 실려 있다. 연변을 떠난지 40년이 지났어도 고치지 못한 엄마의 그 연변말투, 나는 언제 들어도 정겹기 그지 없다. 꽃다운 청춘에 남편을 여의고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심양에 시집 온지 어느덧 사십년 세월이 흘렀다. 어느새 고왔던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로고를 이야기하듯 깊은 주름살이 패였고 한때 2000근이 넘는 배추도 단숨에 절여서 김장을 담그던 모습도 사라졌으나 항상 자식들을 잊지 못하는 엄마다.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된장국을 만들었으니 어서 와서 먹으라는 전화다.
41년전, 막내 남동생이 태여남에 따라 우리 집에는 매일마다 기쁨과 행복의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아들이 태여나기를 학수고대하던 아버지인지라 아버지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우리 집안의 행복은 3년만에 깨지고 말았다. 아버지가 불치의 간암으로 세상을 떴기때문이다. 그때 내 나이 열살, 둘째 녀동생 일곱살, 막내 남동생 세살이였다. 억장이 무너졌을 엄마의 심정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난다.
1982년, 엄마는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심양으로 시집왔다. 계부에게도 자식이 셋이였다. 여덟식구가 12평방메터가 될가말가한 집에서 생활한다는게 여간 어려운것이 아니였다. 눈치밥이 무엇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다행히 심양비행기공장의 고급공정사로 사업하는 계부는 마음이 비달결로 주위에서 이름난 "호인"(好人)이였다. 우리들이 기죽을가바 자전거 앞뒤에 나와 엄마를 태우고 일부러 남보란듯이 씽씽 달리군 했다. 생활이 어려워도 어쩌다 엄마가 삼겹살 한근을 사서 된장국 한가마를 끊이면 온 집안은 큰 잔치집인양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그때 그 된장국은 왜 그리 맛있던지 지금도 내 목젓을 간지럽힌다.
세월을 그렇게 흘러 어느덧 여섯남매 모두 시집 장가 가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엄마의 살림집도 더는 그제날의 12평방메터가 아닌 널직한 아빠트이지만 엄마는 항상 옛날 그 12평방메터의 작은 집에서 살던 때는 떠올리군 한다. 자식들의 발길이 뜸해졌다싶으면 된장국을 끓여놓고 빨리 와서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 엄마의 그 된장국을 먹으며 우리 형제들은 삶의 행복을 느낀다.
"어디까지 왔니?"
엄마의 그 물음소리를 타고 구수한 된장국 향이 내 코끝을 간지럽힌다. 엄마집으로 향하는 내 발길이 조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