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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추억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05.05일 10:19
어머니께서 아프시다. 연변병원에 입원하셨다. 57년 만에 다시 한번 연변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하신다. 참 다행인 것 같다. 병원은 멀리할수록

행복한 거니까. 병상에서 통증을 느끼면서도 어머니는 아프지만 행복하시단다. 혼자가 아니라서. 아들이 옆에서 지켜주어서.

  57년 전에는 혼자셨다고 한다. 17살의 소녀가 아픔과, 어두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혼자서 싸워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57년 전 그

어두움과 외로움 속에서도 어머니는 일생을 두고두고 얘기할만 한 따뜻한 사람들과 감동적인 일들을 겪었다고 한다. 사실 어머니의 그 시절 이야기를

수십 번도 더 들어왔다. 그러나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시절 무기력감에 모대기던 어머니에게 도움을 주셨던 분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그래서 참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구나. 인생은 힘들지만 그래도 참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감동을 찐하게 받는다.

  어머니는 그때는 연길현에 속하였던 장안공사의 하동6대라는 곳에서 농가집 4남2녀 중 장녀로 태여났다. 극빈한 가정에서 태여났지만 공부는

너무 잘하셨다. 날마다 10여리를 걸어서 위자구에 있는 소학교에 다니셨는데 늘 일등을 하셨다. 그래서 초중으로 진학을 하는데, 남존여비의 사상이

심했던 시대라 자습으로 글을 익혔고 많은 책들도 읽으셨고 또 자습으로 장안공사의 유명한 회계도 하실만큼 사리분별이 분명했던 외할아버지셨지만

어려운 살림살이에 딸이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달갑지 않으셨다. 전기가 없었던 시대였는데 어머니가 중학교 진학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밤늦게

등잔불을 켜고 공부를 하면, 기름을 낭비한다는 이유로 방해도 많이 하셨단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약주 한잔 하시고 그때 일이 너무 후회되여

목놓아 우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외할아버지는 빨리 졸업해서 가사를 도우라고 농중으로 가라고 지망을 써놓으셨다. 아마 당시 농중은 학비도 면제가 되었나 본다. 어머니

지망원서에 농중으로 쓰여진 것을 본 담임선생님이 직접 시골에 가정방문을 오셔서 외할아버지를 설득하셔서 연길2중으로 지망을 바꾸어 놓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공부를 워낙 잘하셔서 선생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다. 가난한 가정에서 학비도 제때에 내지 못하면 선생님들이 늘 대신 내주고

두팔을 걷고 도우셔서 어머니는 연길2중에 진학하게 되였다. 어머니는 소학교부터 사범학교 졸업할 때까지 수많은 이들의 도움과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교직에 있는 동안 학생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다. 받은 만큼. 18평되는 단칸방에 살면서 소학교때 가르쳤던 제자가

고3이 되어 대학준비를 하는데 학교기숙사에서 공부할 상황이 어렵다 하여 우리 집에서 1년 동안 기숙하게 했던 적도 있다.

  나는 어머니께 사랑을 주셨던 진정한 스승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또 어머니의 삶을 보아왔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분들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

  연변2중에 진학한 후 어머니는 비록 완전 시골에서 큰 시내로 왔지만 공부는 변함없이 참 잘하셨다. 삼년 내내 공청단지부서기로 활동하였고

공부도 당연 1등이셨다. 인복이 많으셔서 또 인격이 뛰여난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 선생님들은 아마 대부분이 참 스승들이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참 허약했었다. 오랜 가난 때문에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 병을 앓고 있어 초중3년 내내

고생하셨다. 그런데도 너무나 열심히 공부를 하고 늘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기에 모든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다가 초중을 졸업하던 3학년 후학기에 어머니의 인생을 바꾸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시골에서 계시던 외할머니께서 괴질에 걸려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외할아버지는 별수없어 외할머니를 데리고 연길로 중학생인 딸을 찾아왔다. 17살난 중학생이지만 그래도 연길에서

공부한지 3년이니까, 큰딸에게나마 의지할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때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이 나서서 교원들 사이에서 모금해 외할머니를 연변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10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으므로 집으로 가시고 외할머니 병간호는 자연히 어머니의 몫이 되였다. 초중3학년 후학기

고중진학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60년대 고중진학은 현재 대학에 가기보다도 백배는 어려웠다. 어머니는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방과후에는

병원에 가서 외할머니를 돌보면서 침대옆에서 쪽잠을 잤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 외할머니께서는 완쾌되여서 시골로 내려가셨다.

  그런데 워낙 허약하고 장기간 영양실조에 시달렸던데다 한달동안 시험준비를 하면서 외할머니를 간호하다나니 건강상태가 엉망이였던 어머니가

외할머니로부터 병이 옮은 것이다.

  고중시험 한달을 앞두고 어머니는 수업중에 쓰러졌다. 담임선생님께서 둘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입원 보증금(押金)이

필요했다. 급히 달려간 선생님께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교원의 월급이 넉넉지 못한 시대였다. 제자는 혼수상태인데 보증금은 없고, 선생님은

다급한 나머지 교원증을 꺼내보이면서 호통을 쳤었다. “나는 연길2중 교원이고 이 애는 내 제자인데, 내가 의료비를 떼먹고 안 줄가봐 이러시오?

당장 입원시키고 아이를 치료하세요. 내가 월급 받으면 다 갖다 줄거요!!!”

  요즘은 병원에 가서 교원증을 내놓으면 얼마정도의 보증금을 면제해줄가? 그때는 달랐다고 한다. 선생님의 일갈에 병원책임자들이 나와서

사과를 하고 보증금 없이 입원수속을 밟고 치료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연길2중 교원들은 또 얼마 안되는 월급에서 거금을 떼여 병원비를 모아 대주셨다. 담임선생님은 시골에 있는

외할아버지에게 전보로 상황을 알렸으나 련락이 닿지 못하자 어머니의 고모에게 련락하였다. 어머니의 고모가 련락을 받고 돼지새끼를 두 마리 팔아서

30원을 들고 외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가보니까 외할아버지도 똑 같이 외할머니한테서 병이 옮아 한달내내 집에서 앓고 계셨다. 외할아버지가 녀동생이

마련해온 30원을 받아 쥐고 아픈 몸을 끌고 연길로 담임선생님을 찾아와 30원을 내놓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피골이 상접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본

선생님은 냉면을 사서 대접한 뒤 병치료비용으로 쓰라면서 30원을 돌려주셨다. 그리고도 또 자신의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5원을 외할아버지 손에

쥐여주면서 학생은 학교에서 잘 돌봐줄거니까 아무 걱정 말라고 위안했다. 그때 5원은 거금이였다.

  혼자 병원에 있는 제자가 걱정되어 졸업반을 맡았음에도 담임선생님은 출근 전과 퇴근 후 하루에 두 번씩 병원으로 와 상황을 체크하고

힘내라고 격려해주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병원에 입원해 두려움, 외로움 속에서 투병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손길을 내밀어준 분들은 또 선생님들과

학우들이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건강상태와 가정상황을 감안하고 또 그간의 늘 우수했던 성적과 단지부서기 활동경력 등을 참작해 교장선생님이 시험을 면제

받고 사범학교로 진학할 수 있게 추천해주셨다.

  고중에 갔더라면 분명 좋은 대학에 진학했을 어머니지만 중등전문학교인 사범학교에 간 것에 후회나 아쉬움이 없다고 늘 말씀하신다. 학교

다니면서 받았던 사랑을 선생님들께 보답하는 방법은 똑같이 교원이 되여서 학생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범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은 어머니는 일생동안 허약한 건강상태 때문에 교도주임이나 교장같은 직분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떤 감투도

써보시지 못했다. 평범한 교원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학생들을 사랑하는 그런 참 스승이셨다.

  57년이 지나, 꿈 많던 소녀가 로인이 되여 아픈 몸으로 연변병원 병상에 누워있다. 그리고 아들에게 수십번도 더 했던 이야기를 또

들려준다. 반세기전 이곳에서 있었던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아픔과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때도 어머니는 행복했었다.

  인생은 힘들다. 아프다. 외롭다. 삭막하다. 절망적일 때도 많다. 그럼에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누구에게나 따뜻한 사람... 그런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다.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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