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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유적지 답사 실기(2) 평정산에서 류린석을 만나다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05.23일 10:18
평정산에서 류린석을 만나다

김창영

이번 답사의 첫 코스는 평정산진 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의암 류린석기념원이다. 심길고속도로를 두시간여 달린 봉고차는 영릉(永陵)에서 내려 심통(沈通)선에 들어섰다가 20여분 후 변관(邊關)선을 달렸다. 일행이 평정산진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열시, 오는 길에 리홍광부대가 일제와 싸운 전적지를 잠간 돌아본 시간을 제외하면 제법 빨리 온 셈이다.

신빈현 서남부에 위치한 평정산진은 인구 2만 1000여명에 면적 350평방킬로메터의 작은 향진이다. 행정적으로 1961년에 평정산공사로 건립되여 1983년에 향으로 개칭되였다가 2년 후인 1985년에 현재의 평정산진으로 승격했던 것이다. 력사적으로 신빈현 산하 근 40여개 마을들에 조선족들이 생활해왔지만 평정산진은 한족 만족들의 주거지로 알려져 왔다. 허나 우리는 의암 류린석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낸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양 저 "압록강류역의 조선민족과 반일투쟁" 책자에 따르면 1911년 4월 의병 장령 류린석은 가족과 친구, 제자들의 가족 약 50호를 이곳 평정산진 난천자에 이주시켰고 당지 한족들은 난천자 마을에 조선인들이 산다고 해서 난천자골안을 고려구(高麗溝)라고 불렀었다.

의암 류린석의 중국행은 한마디로 일제와 맞선 "곡선구국"이였다. 19세기 말, 조선인민과 일본제국주의와의 민족모순은 극에 달했다. 1895년 10월, 일제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조작하고 조선황궁에 쳐들어가 민비를 살해하였고 12월에는 "단발령"(斷髮令)을 공포했다. "단발령"의 공포는 조선 전역에서 애국유생들의 격분과 반일정서를 자아낸 동시에 전국성적인 반일의병투쟁이 일어나게 된 도화선이였다. 당시 의병무장투쟁으로 널리 알려진 부대는 류린석의 관동창의군이였다. 류린석의 의병부대는 짧은 시간내 재빨리 3000여명으로 발전하며 일제와 친일매국관리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으나 력량상의 현저한 차이로 일제와 리조 매국통치자들의 포위토벌과 피비린 도살을 감내하기엔 턱부족이였다. 렬세에 처한 류린석은 정세를 분석하고 압록강을 건너가서 실력을 보존하는 동시에 중국의 원세개 지원병을 요청하는 등 "북천"(北遷)전략방침을 실시하였다.

"압록강류역의 조선민족과 반일투쟁"(김양 저)에 따르면 류린석은 1896년 8월 28일 240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조선 초산 부근에서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 보달원에 이르렀다. 이들은 혼강부근 은페된 곳에 군영을 짓고 의병재기를 도모하였는바 이곳이 곧바로 중국땅에 세워진 조선인반일운동이 첫 근거지인 것이다.

류린석은 관전현 보달원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해 말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통화현 오도구에 가서 정착하였다. 12월 11일, 류린석은 조선 국내에 "여동문사우서"(*同門士友書)를 띄워 동문사우들의 서간도로 모일것을 호소하였다. "여동문사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땅을 보건대 오래동안 량국의 경계로 수십년전 청나라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국금(國禁)이 있어왔으나 근래에 대황(大荒)으로 인해 금지가 불가능하게 되여 래거(來居)하는자 만여명에 이르고 나머지 땅에도 몇 만호가 수용될 수 있습니다. 토지가 심히 비옥하여 한사람이 경작하면 열사람이 먹을수 있고 일년을 경작하면 삼년은 먹을수 있습니다. 숙속(菽粟)이 수화(水火)와 같고 사람들이 인심(仁心)이 있는데 그중에는 왕왕 의기가 있어 더불어 일을 도모할만 합니다. 이에 사우들을 취회하고 영웅을 모으면 나의 도모하는바를 거의 이룰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므로 린석(麟錫)은 제공들이 속히 이곳으로 모이기를 바랍니다."(유한철 저 "유린석의 사상과 의병활동" 107-108페지) "여동문사우서"를 보면 류린석의 눈에 서간도는 비옥한 땅, 희망의 땅이였다.

류린석은 1897년 가을 조선 고종황제로부터 귀국하라는 칙유를 받고 일시 귀국하였다가 이듬해인 1898년 봄 제2차로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 보달원을 거쳐 환인현 호로두구(葫蘆頭溝)에 정착했다가 10월에 동북방향으로 진군하여 통화현 오도구에 들어갔다. 이 시기 류린석은 통화지구에서 남만조선인 반일근거지를 창설하는 한편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관전, 환인, 신빈, 무순, 본계 등 조선인 집거지구에서 향약계(鄕約契), 농무계(農務契), 보약사(補約社) 등 조선인 반일단체들을 건립하였다.

1900년, 중국에서의 의병운동이 좌절을 당하자 류린석은 귀국하여 유교의 례속으로써 나라를 구할것을 주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은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에 조선의병들은 항일구국의 기치아래 류린석을 총지휘자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류린석은 외부 지원이 없으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1908년 우병렬, 리진룡 등 제자 약 60명을 거느리고 로씨야로 떠났다. 1910년 6월 21일 조선, 중국, 로씨야 등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계몽운동자와 의병운동자들은 력량을 단합하여 통일적인 지휘아래 반일무장투쟁을 벌릴일 목적으로 13도의군조직을 내오고 류린석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로씨야, 청나라 반동세력들과 결탁하여 국외로 망명한 조선항일구국의사들에 대하여 가혹한 박해를 가함으로 말미암아 조선의병운동은 큰 좌절을 당했다. 외부의 지원을 받아 나라를 구하려는 류린석의 큰 뜻은 로씨야에서도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년세가 든데다 지병을 앓다 보니 류린석은 더는 의병활동을 할 수 없었다. 1912년 류린석은 중국에서 만년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제3차로 중국행을 택했다.

70고령이 된 류린석은 1914년 3월 서풍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해 9월 지금의 신빈현 평정산진 난천자에 이르렀다. 류린석은 더는 의병운동을 지도하지 않고 저서에 집념하였는바 "도모편"(道冒編)과 "우주문답"(宇宙問答)은 이때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류린석은 "우주문답"에서 조선이 향후 취해야 할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분야의 정책을 종합적으로 제시하는 한편 "인류가 세계질서(평화)를 유지하려면 조선, 중국, 일본 등 동양 3국중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재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암 류린석기념원은 류린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신빈만족자치현평정산진인민정부와 신빈만족자치현인민정부 사지(史志)판공실에서 공동으로 2003년에 세운것으로 평정산진 난천자 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념원 둘레에 두줄로 옮겨진 100여그루의 푸르른 소나무들이 기념원의 숙연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전정혁 주임의 소개에 따르면 기념원에 세워진 비석의 높이는 1,915메터로 류린석이 세연을 접은 1915년을, 너비는 1,842메터로 출생년인 1842년을 나타낸다. 상단 세계평화를 상징하는 구형 모형의 둘레의 길이는 1,29메터로 사망 기일인 1월 29일을 나타낸다. 기념정(亭)의 미관을 위해 비석 원체우에 20센치메터 두께의 단을 2층으로 두고 구형 모형을 올려놓았는데 두께 20센치메터는 류린석이 중국에서 20년간 의병활동을 해온 년도를 나타낸다. 비석의 뒤면에서 류린석의 사적이 소개되여있었다.

일행은 비석 앞에 헌화하고 술을 부은 다음 묵념했다. 여느때와는 달리 이들 모두 항일선렬들의 후손임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숭엄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언젠가 류린석 선생을 기리여 지은 시가 떠오른다.

관전현 방취구의 산천이

풍경이 된

태극기를 손에 든 당신의 모습은

오랜 력사가 묻어나는

명화입니다

멀직이 서서 유심히 바라보면

1915년 1월 29일로 날인이 박힌

그림 속에는

74년간의 풍파가

고스란히 스며있습니다

무연한 논밭이며

논밭기슭을 다독이는 개울물이며

개울물너머 청청한 소나무숲이며

그 속에 숨쉬는 하찮은 미물들마저

당신의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춘천"이란 이름의 명화 속

당신이 꼭 쥔 태극기 속에는

춘천의 산천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춘천이 손짓하고 있습니다.

--졸시 "'서탑.76'--의암 류린석을 기리여" 전문

류린석 기념원을 떠나면서 의문 하나가 생겼다. 만년을 평정산에서 보낸 선생의 희생지는 관전현 방취구(芳翠溝)다. 여기에는 또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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