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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속에서 무르익은 내인생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9.05.27일 10:02
  (흑룡강신문=하얼빈) 공화국과 동갑인 나는 향촌에서 나서자라 교육사업에서 자기의 직업리상을 실현한 행복한 교원이다. 퇴직후 천진, 청도에서 10여년을 보내고 지금은 향촌에 복귀하여 전원생활로 여유로은 삶을 누리고 있다. 세상만물은 다 젊어서 곱고 멋지고 씩씩하다고 하지만 나의 인생은 그렇지 않다. 공화국유고의 력사와 더불어 초년기의 나는 가난과 난세의 풍파를 겪었으며 교육평생에서 투혼의 인생절정을 맞이했다. 그래서 애잔한 추억이 피여나는 안개처럼 한가슴 가득차오른다.



  가난속의 아픈성장

  50년대 나는 화남현 신립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동년시절을 보냈다. 전기도 없는 곳에서 발방아에다 곡식을 찧어 먹으며 살았고 저녁이면 집집마다 기름등잔불을 켜놓고 잔일을 했다. 그때 어머니는 늘 맨나중에까지 등잔불아래서 헤여진 옷도 깁고 이잡이도 했다.

  1958년봄 9살나던해 나는 성화에 와서 처음으로 환한 전등을 보았고 정미기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입쌀을 보았다. 그러다 이듬해부터 온나라는 세폭의 붉은기 아래서 3년재해가 들어 생활이 어려워졌다. 아버지 혼자서 작은 집까지 여덟식솔을 거느려야 하는 우리집 살림은 다른집보다 더 구차하였다. 그때 나는 신을 신이 없어서 부들방매잎으로 엮은 초신을 신고 다녔는데 '6.1'경축운동대회에 참가하여 고무신을 신고 뽈을 찾다.

  60년대초 기황이 들어 배고프던 그 고생은 지금도 잊을수 없다. 식량난으로 우리는 밥대신 멀건 국죽을 많이 먹었고 말을 먹이는 귀밀과 사탕무우, 겨떡같은 대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봄채소도 부족하여 돼지먹이 능쟁이를 데쳐먹고 식구들은 얼굴이 팅팅 부었다. 그때 학교에서 조직하는 근공검학로동일에 다른 애들은 가방에 넣고 다니는 '벤또'에다 밥을 쌌지만 나의 밥그릇은 헝겁보자기에다 싼 사기죽그릇이였다.

  한번은 전교생들이 다 모인 운동장에서 그 사기죽그릇이 땅에 떨어져 깨지면서 쌀죽이 땅에 쏟아졌다. 그것을 본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모두 눈이 휘등그래졌다. 나는 창피스러움보다 보자기를 잘못챙겨든 자기를 원망했을뿐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죽그릇을 싸준 어머니를 원망할줄을 몰랐다. 어질고 순진했던 그 시절 나는 집에서 떼질 한번 쓸줄 모르고 고이 자란 둘째였다.

  난세속의 희비역정

  60년대 공화국력사는 희비가 엇갈린 안개속의 길이였다. 1966년 여름 '만세'와 '타도' 구호속에서 홍위병반란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갓초중을 졸업한 나에게 무지의 유아성만 발작시킨 장황극이였다. 그때 나는 성화조선족중학교 제7기 동창인 신미철이와 같이 학교에서 가장 큰 홍위병조직을 건립하고 우두머리가 되였다. 그해 8월에 나는 북경에 가서 모주석을 볼수있는 학생대표에 선출되였고 잇달아 학교혁명위원회와 공사반란파 총부의 학생대표로 추대되였다. 그러나 나의 '혁명행보'는 본의아닌 '반동구호' 사건으로 하여 절단나고 말았다.

  1967년 10월 21일 업간 시간에 내가 운동장에서 뽈을 차는데 애들이 줄달음쳐 나와서 "용수야, 학교안에 큰일났다."고 하기에 들어가 보니 교실안은 두파 학생들이 내가 쓴 '반동구호'를 꺼내놓고 다투었는데 전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반동구호는 내가 전교비판투쟁대회를 집행하면서 기록부뒤가위 안쪽에다 한자로 '반대 XXX'이라고 란필한것이였다. "잘못됐구나!" 사태의 엄중성을 직감한 나는 눈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자리에서 나는 자기의 실수를 반성하고 모든 직무사퇴를 선포했으며 사생들의 비판처리를 바란다고 했다. 천길벼랑에서 떨어지는 악몽이였다. 그세월이 어떤 세월인데…그런데 그때 나의 문제는 다행이 현행범죄안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너무 '혁명적'이고 너무 '정직한' 학생이라는 평판이 따랐기 때문이였는지 풍파는 그럭저럭 가라앉았다. 후에 물론 부분적 후배생들이 들고 일어나 투쟁대회를 벌리자했지만 학교의 김태진, 리학재, 박광선 등 선배선생님들이 극구 나서서 설득했기에 참상은 더 벌어지지않았다. 그때 만약 내가 '현행반혁명분자'라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 도로 끌려가 두들겨 맞았더라면 어찌되였을가?

  그후 나의 문제는 지진후의 여진처럼 희비역정으로 이어졌다. 1968년 4월 내가 학교를 나올때 정치심사감정서류를 작성했는데 반동구호를 쓴 문제를 서류에다 써넣기로 했다. 그 리유는 "아무리 무의식적인 실수라 해도 반동구호를 쓴것만은 사실이 아니냐?"라는것이였다. 그리하여 그해 나는 화천1중에 추천받지 못하고 중성촌에 귀향하여 생산소대 사원으로 되였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문제는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여 나의 정치면모의 흑점이 되였다는것을 의식했다. "정신 바짝 차리자!" 그때로부터 나는 철저한 '혁명적 행동'으로 나를 립증하고 싶었으며 나를 괴롭히는 사악의 정치감투를 시원히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리하여 사회상의 모든 정치활동은 물론 생산소대의 체력로동을 해도 민병훈련을 해도 청년활동을 해도 최고를 향하여 몸을 내던지는 악종이 돼버렸다. 그 세월에 나는 그렇게 자기를 강박하지 않으면 어느때 세상밖으로 뿌리워나갈지도 모르니깐.

  귀향 1년후 나는 대대청년들의 신임으로 공청단총지부 부서기에 공사기간 무장련패장으로 사업하였다. 그때는 모든 청년들이 참군하는것을 가장 선호했던 세월이였는데 추천선발도 엄했고 공사의 정치심사가 최후관문이였다. 그때 300여호 큰 동네에서 사원들이 련속3년 나를 참군후보자 명단1호로 뽑아주었다는것은 조련찮은 일이였다. 대학입학생 모집에도 련속 두번이나 나를 추천해주어서 해뜨는 날이 보이는듯했다. 그때마다 나는 심저에서 우러러 나오는 존재감으로 하여 눈시울이 뜨거워 났다. 그것은 내가 몸과 마음을 다바쳐 몸부림친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인생 발분의 힘은 그때로부터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1969년 4월 나는 공사의 선발로 대흥안령18참—이시컨(伊西肯)구역 국방공로건설에 참가하게 되였다. 쏘련수정주의 침략도발에 대비하는 준전쟁준비 상황이여서 국방공로건설은 형세도 매우 긴장했고 임무도 과중하여 밤낮이 따로 없는 전투태세로 추진되였다. 그때 성화공사 5련은 석달시공임무를 한달 앞당겨 완성함으로 합강지구 선진련대 칭호를 획득하였으며 5련1패는 영웅패로 명명되여 합강지구공로건설현장 순회강연단위로 선정되였다. 그때 정치간사였던 나는 영광스럽게 현장순회강연대표에 선발되여 특수한 영예를 누렸다. 지금 생각하면 쥐꼬리만한 문화수준에 한어발음도 엉망인 내가 어떻게 각지 시공현장을 돌며 강연보고를 했던지 믿기어렵다. 그것이 내인생지평에 비껴든 잔잔한 희광이였다. 그러나 그때 내가 그토록 바라며 갈망했던 참군요구만은 번번히 정치심사에 걸려 탈락되군했다. 1970년 징병때에는 혈서까지 써서 바쳤지만 역시 최종심사관을 넘지못했다. 알아보니 '우수한 중에서 우수한자를 뽑는다'(优中选优)는 원칙이 있었다. 그해 나는 또 대학입학에도 추천되였지만 '성화하향지식청년을 먼저 고려한다.'는 리유로 또 밀려났다. "진짜는 어느때든 꼭 통할거야." "울분이 있어도 참자." 그때의 나는 이미 그런 탈락에 울고불고할 어린애가 아니였다. 나는 이 모든 좌절과 울분, 고통이 내마음을 열어주지 못한다면 나는 구경 어떤 사람이 될가 라고 생각했다.

  투혼속의 성공가도

  1971년 이른봄 대대령도에서는 학교의 수요에 따라 나를 소학교체육교원으로 채용하기로 결정지었다. 우리집까지 찾아온 지부서기의 리유는 너무 간단했다. "너 이제 어디로 가겠니?" "더이상 보내줄곳도 없다."는 최후 통첩이나 다름없었다. 속으로 내키지도 않았지만 나는 더 거절할 리유도 면목도 없었다. 이리하여 교육사업은 인생갈림길에 들어선 나에게 처음으로 나의 존재를 요청해준 직업으로 되였다. 이듬해 10월 성화조선족중학교에서 체육교원자리가 비게되여 나는 또 중학교교원으로 발령받았다. 모교를 떠나 다시 찾아온지 꼭 3년만이다. 교원신분으로 모교에 돌아와 당년의 스승님들과 마주했을때 나는 스승님들의 정적인 사랑에 행복감을 느꼈다. 또 몹시 부끄러웠다. 초중내기가 고중생들을 가르치다니…두려움도 없지않았다. 나보다 키도 더큰 학생들에게 놀림이라도 당하면 어쩔가?어느모로 보나 나에게는 추호의 오만과 교만이 있을수가 없었다. 그때는 37원 50전 월급을 받았지만 돈계산을 먼저 하는 세월도 아니였다. 다행이 나한테는 귀향 3년 고행속에서 고이 굳혀진 근성이 있었다.

  교육사업은 비록 내가 처음부터 바라며 추구했던 직업리상은 아니여도 내인생을 익혀준 정적인 사업으로 자리잡았다. 정열이 가장 왕성했던 청년기에는 꿀단지를 학교에다 묻어놓은 사람처럼 밤낮을 학교에서 보냈는데 련애할줄도 몰랐다. 사랑하는 학생들속에 심취하다보니 '아이들대장'이란 말도 들었고 교원같지 않은 교원이 될때도 있었다. 1979년 11기3중전회후 나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것은 나에게 정치면모상의 '오점'을 완전히 지워버린 철저한 해방같았다.

  1985년 개혁개방후 나는 5년간 연변대학 지리계함수공부를 마치고 초라한 초중생학력에 종지부를 찍었다. 90년대 교육개혁의 심화와 발전속에서 나는 연구형교육실천에 진력하여 수많은 자격증서, 론문증서와 영예증서를 따냈는데 직업성장에 황금시기를 맞았다.

  그중 '전국우수교원'이란 영예는 내가 교육의 인성가치를 추구하면서 이루어낸 '성공교육'의 결실이였다. 90년대 허술한 성화향촌중학교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줄지어 나오고 '대학생마을'까지 배출된것은 선배선생님들과 투혼을 함께한 보람찬 성취였다. 돌이켜볼때 내인생 지난날의 가난과 좌절은 모두 비극은 아니였다. 도리여 내 삶의 기적을 만들어 준 원동력으로 되였다.

  2009년 퇴직한 나는 《화천조선족발자취》 편찬주필을 담당하면서 학교밖의 사회공부도 많이 했다. 공화국성장의 발자취와 더불어 그 세월의 진토우에 찍혀진 나밖의 수많은 인생도 다 순조로운것이 아니였다. 누군가 "인생이란 늙어가는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말이 나한테도 꼭 맞는 말이다.

  /흑룡강성화천현성화향중성촌 박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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