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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의 100년 력사에 대한 조명을 시작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05.30일 09:27



1992년 봄, 9월 3일에 거행될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40돐 경축활동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TV방송은 여러가지 TV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해야했지요. 그래서 저는 오래전부터 구상하던

중국조선족의 100년 력사를 영상으로 살려내는 작업을 실천하기로 했어요.

조선족100년사 TV영상프로 및

력사화책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권립 소장은 우리의 부탁을

받고 이라는 100년사를 써주셨어요. TV사회교육부에서는 그 문장에 근거하여 씨나리오를 각색,

영상촬영과 제작을 마치고 방송하였어요. 비록 미숙하지만 그것이 중국조선족의 100년사를 영상으로 제작하는 초시작이였구요.

《중국연변조선족력사화책》 주필 김희관 부회장이 원고를

심열하고 있다.



1997년

원고를 보시고 수개의견을 말씀하시는 조남기 부주석.

그러다가 저는 연변주정협 해외련의회 부회장으로 자리를

옯겼지요. 당시 전국의 정치협상회의 계통에서는 모두 해외련의회을 설립하여 개혁개방사업에 이바지하는 사업을 전개하였어요. 그 사명인즉

정치, 경제, 문화 방면의 민간외교사업을 하는 것이였지요.

그때로부터 저는 연변해외문제연구소 상무 부회장을

겸하고 열심히 여러가지 국제교류사업을 벌렸지요. 그중에서 우리의 100년사를 외국에 알리기 위해 을 기획하고

편집하는데 많은 정력을 쏟아부었지요. 주요하게는 100여년래 우리 연변의 생동한 력사사진을 수집하기에 여념이 없었지요.



1997년 10월

발행식

1997년 가을, 저의 저작

이 출판발행되였고 연변에서 처음으로 을 받았어요. 남상복 주장은 정부사업보고에서 연변의

출판사업이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면서 이 국가상을 받았다고 발표하였고 주신문출판국 채영춘 국장은 은쟁반

감사패까지 발급해주었지요.

1999년 11월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을 열었어요. 한국의 여러 력사연구단체와 학자들이 모여와서 중국조선족의 100년사 사진을 보면서

감탄하더라구요. 여러 영상매체에 보도되기도 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지요.



저는 을 밑그림으로

TV대형력사기록편 을 기획했어요. 이에 기초하여 연변텔레비죤방송국과 주문화국 창작실이 함께 50부작 대형다큐멘터리

을 제작해 내였어요. 그때로부터 우리는 이라는 중국조선족 100년사의 대명사를 쓰게 되였고 우리의

백년사가 그렇게 고난의 아리랑에서 행복의 아리랑으로 이어졌음을 알게 되였지요.

극작가 고 리광수의 구수하고 설복력 있는

씨나리오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구요. 특히 력사사진자료가 극히 희소하고 동영상은 거의 없는 상황에서 50부작

의 영상을 제작해낸 서봉학 선생에게 라는 별호를 드렸지요.

1999년 봄에는 국경 50돐을 맞아 과 을 기획하였지요. 을 구상하는 과정에 연변주정협 부주석

김영만은 주요 편집일군들을 거느리고 북경을 방문했지요.

우리는 조남기 장군, 리영태 장군, 정순주 장군과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 주임 등 지도자들을 만나 보고를 올리고 조언을 받았으며 귀중한 사진들을 촬영했지요. 그때 저는 조남기 장군에게 농담을

한마디 했지요. “장군님의 상장 견장에 큰별 세개는 리해되는데 올리브가지문양은 무슨 뜻인가요?” 그랬더니 조남기 장군께서는 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중국조선족의 초기 공산당원이며 혁명가,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한락연의 아들도 그때 만나게 되였어요. 그는 당시 체육잡지사의 주필을 맡고 있었어요. “당신들을 만나니 너무나 반갑습니다.

제가 비록 조선말로 여러분과 대화를 못 나눠도 저 역시 당신들과 같은 중국조선족의 후예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혁명렬사가 있음으로 하여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라고 하며 그는 우리를 무척 반기는 것이였지요.

실은 한락연에 대해서는 일찍 1983년 경에 알게

되였어요. 연변대학에 을 개설하기 위해 중공성위선전부 교육처, 성정부 교육청에 여러가지 문건을 보고하고

신청서를 올리면서 장춘으로 많이 다녔지요. 하루는 에서 근무하는 원 의 친구 역홍빈(易洪斌 후날

길림일보사 사장 력임)을 찾아갔지요. 그는 나를 반기면서 얼마전에 출판한 잡지에 조선족혁명가 한분을 소개했다고 하면서

나의 손에 잡지를 쥐여주더라구요. 그 즉시 잡지를 펼쳐보았는데 바로 한락연의 사적이 기재되여 있었어요. 당시 국무원 부비서장인 염명복(阎明复)이

아버지 염보항(阎宝航)을 회고하면서 쓴 회고록에서 조선족혁명가 한락연동지는 아버지 염보항을 혁명으로 이끌어준 은인이라면서 한락연동지의 일생을

소상히 기록했더라구요.

저는 너무나 신기해서 단숨에 그 회고록을 읽었어요.

읽을수록 흥분을 금할 수가 없었어요. 그 회고록을 기차에서도 계속 읽으면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밤을

새워가면서 그 회고록을 몽땅 번역했지요.

이튿날 편집부를 찾아가 사연을

말씀드리고 번역원고를 내놓았지요. 편집부에서는 이미 다 편성된 다음기 기사를 조절하고 한락연을 소개하는 번역원고를

1983년 4월호에 실었지요. 그래서 의 독자들은 룡정출신의 중국조선족의 거룩한 혁명가이며 라고

불리는 화가 한락연선생에 대한 글을 읽게 된 것이지요.



2000년 6월 연변의

정치협상회 원로들과 력사학자들이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수건방안을 토론하는 장면.’

에는 주은래 총리가

연변에 오셨을 때 찍은 귀중한 사진이며 조남기장군께서 상장군복을 입으시고 강택민 주석과 환담하는 사진 그리고 연변은 물론 북경, 상해 등지에

계시는 조선족의 유명인사들의 사진을 최대한 많이 모셨어요. 너무나 고마운 것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저의 기획서를 흔쾌히 받아들여 거액의 자금을

들여 을 출판발행을 한 것이지요.

201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는 그때는

《연변인물록》의 문화편 주필을 맡아 조선족, 한족 등 300여명의 문화예술 인물들의 사진과 략력을 알심들여 편집하면서 연변의 문화예술사업에

헌신한 그들의 공적을 기입하였지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를 세우던 나날

1999년 가을, 연변주정협 해외련의회에서는

청산리항일대첩 80돐을 맞이하기 위해 화룡시 청산리에 를 세울데 관한 결정을 내리고 중공연변주위 왕유림서기에게

보고서를 올렸어요.

물론 우리의 보고서에는 1920년 10월 화룡현

청산리일대에서 벌어진 항일대첩에 관한 연변력사학자들의 고증자료를 첨부해서 올렸지요. 며칠후 왕유림 서기는 다음과 같이 회시를 내렸어요.



연변대학 전임 총장이며

력사학자인 박문일(좌4) 교수와 연변대학 최홍빈교수(좌 3) 등이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수건방안을 심열하고 있는 장면.

그런데 왕유림 서기의 회시가 명백한데도

청산리항일대첩에 관한 일부 논란이 그치지 않고 계속 라고 고집을 부리는 잡음이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연변력사학자들의 지도하에 수차례 해당 력사자료를 정리하면서 학술적으로 청산리항일대첩은 우리 중국조선족항일투쟁사의 일부분이라는걸

론증했지요.

우선 청산리항일대첩은 연변땅에서 벌어졌고 연변의

조선족과 여러 민족인민들이 피어린 반일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자들에게 심중한 타격을 준 반파쑈전쟁력사에서 특기할만한 대첩이라고 론술했지요. 후날

중공길림성위 선전부에서 주관하여 출판한 에도 청산리항일대첩은 조선족의 항일투쟁력사의 일부분이라고 명백히

등재되였어요.

1999년 여름부터, 연변주인대 조룡호 주임,

중공연변주위 부서기 장진발, 연변주정협 주석 조봉명, 부주석 김영만, 신창순, 비서장 비금성 등 연변의 원로들과 력사학자이며 연변대학 교장인

박문일, 박창일교수,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 권립, 연변박물관 부관장 력사학자 김철수 등은 모두 우리의 든든한 뒤심이 되여

수건사업을 적극 지지해 주었어요.



2001년 8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남상복 주장이건설현장을 시찰.

저는 그때부터

수건현장에 파견되여 청산리소학교 교원의 집에 주숙하면서 모든 사업을 추진했지요. 청산리소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봄비를 무릅쓰고

주변에 꽃과 잔디를 심던 장면이 눈앞에 선합니다. 는 우여곡절 끝에 2001년

8월 31일에 드디여 락성식을 가졌지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락성식의 한장면

전 지금도 가끔씩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를 찾아보군

해요. 가을에 단풍이 빨갛게 익을 때면 마치 선렬들의 피가 새빨갛게 물든 것 같아요. 멀리 베개봉으로부터 ’쏴-‘하고 송도가 파도처럼 밀려올

때면 아주 가관이예요. 소나무가 꽉 찬데서 소나무잎들이 서로 마찰하는 송도소리, 현장에서 그 거대한 흐름을 느낄 때면 아주 격동이 되는거예요.

마치 선렬들의 혼령이 배회하고 있는 듯한 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글 김청수 기자, 영상사진 김성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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