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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기억을 가지면 인생이 더 편해질까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06.03일 11:19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의 한 에피소드인 ‘당신의 모든 순간’에는 ‘그레인’이라는 작은 기계장치가 나온다. 뇌에 ‘그레인’을 이식하면 모든 경험을 영상으로 저장하고 필요할 때 재생해 볼 수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면접 기억을 되돌려 보며 합격 여부를 가늠해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옛 추억을 다시 틀어놓고 즐기기도 한다. 완벽한 기억을 가지면 인생이 더 편해질 것만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억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다. 제대한 뒤 한번도 쓴 적 없는 군번은 아직도 생각나는데 마트에선 1시간 전에 차를 세운 곳이 지하 2층인지 지하 3층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홍 계열 매니큐어가 필요해서 하나 새로 샀는데, 집에 와보니 코럴, 자몽, 핑크 매니큐어가 한가득 있다. 이럴 때마다 애꿎은 기억력을 탓하게 되고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닐까 살짝 걱정하기도 한다. 기억은 대체 왜 사라지는 것일까?

요요 마, 25억 첼로를 택시에

망각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애초에 기억이 ‘제대로’ 저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첼로 연주자인 요요 마는 1999년 미국 뉴욕에서 공연을 마친 뒤 250만달러에 이르는 첼로를 택시 짐칸에 넣은 것을 잊어버리고 내렸다. 잠시 뒤 ‘아차, 첼로!’ 하고 떠올렸으나 이미 택시는 떠난 뒤였다. 다행히 그는 택시비 영수증을 보관하고 있었고 몇시간 뒤 첼로를 무사히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망각은 특히 반복적으로 하는 익숙한 행동을 할 때,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잘 일어난다.

모든 경험이 뇌에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주의를 기울여 외우지 않았다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 제대로 저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장 간단한 테스트를 해볼 수 있다. 당신이 기억 실험의 참여자이고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해보자. 500원 동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할 수 있는가?

대부분은 동전의 한 면에 숫자 500이, 다른 면에는 두루미가 있다는 정도는 잘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두루미 아래에 ‘500’이 새겨져 있는지, 두루미가 어느 쪽으로 날고 있는지 등 구체적인 모양은 정확히 떠올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진행된 비슷한 실험에서는 1센트 동전의 모든 세부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실험 대상자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고 믿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정보는 장기기억에 제대로 저장되지 않는 것이다.

주의를 기울일 때의 기억은 다르다. 이때는 정보를 처리하는 뇌 영역의 활성화 정도도 달라진다. 예컨대 단어의 글자 수를 세는 단순한 과제가 아니라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경우처럼 깊게 정보를 처리할 때 왼쪽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영역에서 강한 활성화 반응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앤서니 와그너 교수는 1998년 에 발표한 논문에서, 전전두피질의 일부인 왼쪽 하전두회(inferior frontal gyrus)가 얼마나 활성화하느냐에 따라 어떤 정보가 기억될지 잊힐지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활성화 정도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측정했다. 실험 결과 단어를 처리할 때 왼쪽 하전두회의 활성화가 낮을수록 시간이 지난 뒤 그 단어를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게 나타났다. 즉, 정보처리가 깊게 이뤄지지 않아 약하게 저장된 정보들은 나중에 더 쉽게 잊힌다는 것이다.

옛 기억과 새 기억의 경쟁

망각이 일어나는 또 다른 이유는 기존 기억과 새로운 기억이 서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를 새로 만든 직후에는 새 번호보다 옛 번호가 더 쉽게 떠오르는 것처럼 이전의 기억이 새로운 기억을 방해하기도 하고, 반대로 새로운 기억이 생기면서 유사한 이전 기억이 잊히기도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마이클 앤더슨 교수 연구팀은 2015년 에 발표한 연구에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그와 유사한 다른 기억을 잊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단어 ‘모자’와 배우 김태리의 사진을 같이 외우고 난 뒤, ‘모자’와 다른 배우 김태희의 사진도 외운다고 해보자. ‘모자’를 보면 두 배우의 얼굴이 모두 연상될 수 있기 때문에 김태리와 김태희의 얼굴은 서로 경쟁하는 기억이 된다.

앤더슨 교수 연구팀은 기억 중 하나만 반복해서 회상했을 때 경쟁하는 다른 기억의 흔적이 뇌에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으로 측정했다. 실험 결과, 특정 기억을 회상할수록 뇌에서 떠올리는 기억과 경쟁하는 기억의 패턴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전전두피질이 강하게 활동할수록 경쟁하는 기억의 망각이 늘어났다. 다시 말하면, 모자를 보고 김태리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잘하기 위해 전전두피질은 경쟁 기억인 김태희의 기억 패턴을 억제했고, 억제된 기억은 쉽게 잊혔다. 기억이 곧 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망각은 때때로 적절한 단서가 없어서 일어나기도 한다. 영국의 인지심리학자 앨런 배들리는 1975년 재미있는 실험을 진행했다. 잠수부들에게 단어를 외우게 했는데 일부는 물속에서, 일부는 물 밖에서 단어를 암기했다. 잠수부들은 단어를 외울 때와 같은 환경에서 단어를 더 잘 기억해낼 수 있었다. 즉, 물속에서 공부한 잠수부는 수중에서 기억검사를 했을 때 더 많은 단어를 기억해냈고, 물 밖에서 공부한 잠수부의 기억검사 결과는 수중에서 더 낮게 나왔다. 기억을 저장할 때의 상황과 기억을 회상할 때의 상황이 다르면, 기억을 인출할 단서가 더 적어 기억을 꺼내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 술자리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을 때 다시 술을 마셔서 뇌를 같은 상태로 만들면 기억이 더 잘 날까? 실제로 실험한 결과에 따르면 정말로 술 마셨을 때 학습한 내용은 다시 술을 마셨을 때 조금 더 잘 기억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는 것이 전날 술자리의 기억을 되살릴 최고의 방법은 아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외우고, 그것을 멀쩡한 정신 상태에서 회상할 때 정확도가 가장 높았다. 술을 마시면 기억이 잘 안 되지만, 다시 술을 마셔서 뇌가 같은 상태에 있으면 그나마 조금 더 나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기억 연구에서 가장 유명한 뇌 손상 환자를 꼽는다면 헨리 몰레이슨(1926~2008)일 것이다. 뇌과학자들은 이름의 약자를 따서 그를 ‘에이치엠’(HM)으로 불렀다. 1953년, 당시 27살의 에이치엠은 뇌전증을 치료하기 위해 해마와 그 주변 부위를 제거하는 뇌 수술을 받았다. 수술 뒤 에이치엠의 인지기능은 대부분 정상이었으나 그는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었다. 기억은 수십초 정도 단기기억으로 유지되었지만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지 못하고 곧 사라졌다. 수술 전 몇년의 기억도 잃어버렸다. 그에게 자동차를 그려보라고 하면 수술 이전 1940~50년대의 모델을 그렸고, 수술 뒤 새로 유명해진 연예인을 기억할 수 없었다. 결국 에이치엠이 기억하는 세계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영원한 현재’만이 남았다. 그로 인해 해마가 기억 형성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해마는 기억뿐 아니라 상상에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 다른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개발자인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는 기억을 연구한 인지신경과학 박사이기도 한데, 그는 2007년 (PNAS)에 발표한 논문에서 해마에 손상을 입은 기억상실증 환자 상당수가 미래를 상상하는 일도 어려워한다는 것을 보고했다.

연구팀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상황을 상상해서 묘사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해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했을 때, 뇌 손상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해변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바다의 색과 해변의 모습, 주변의 나무와 건물 등을 자세히 상상할 수 있었다. 반면 해마 손상으로 기억상실증을 지닌 사람들은 “파란 하늘과 흰 모래가 보여요”라고 답할 뿐 더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기 어려워했다. 기억과 상상은 뇌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였다.

망각은 기억과정의 일부

많은 연구자들이 일상의 망각은 정상적인 기억과정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기억은 경험의 모든 것을 사진처럼 정확히 보관하지 않는다. 대신 망각을 통해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제거하고 핵심만을 저장한다. 이렇게 남은 ‘일반화된 기억’은 다양한 상황에 적절한 예측과 대처를 하도록 도움을 준다.

최근에는 동물 연구는 물론 기계학습과 인공지능 연구에서도 ‘적당한 망각’이 있어야 변화하는 환경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는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특정 장소에서 쥐에게 약한 전기 충격을 주면 쥐는 다시 그 장소에 들어갔을 때 공포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공포 기억이 생겼던 환경에서만 공포 반응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유사한 환경에서도 공포 반응을 보이는 일반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망각을 잘 못 하도록 조작된 쥐는 일반화된 공포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일반화가 일어나려면 여러 상황에서 겹치는 정보를 추출해야 하는데 망각이 없으면 특정 상황에만 적용되는 세부적인 정보까지 계속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재밌게도 인공신경망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기계학습을 사용한 인공신경망이 주어진 자료만을 과도하게 학습하고 일반화를 하지 못해, 다른 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과적합’(overfitting) 현상을 보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인공신경망이 개와 고양이 사진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더라도 학습 때 보지 못한 다른 품종의 개와 고양이를 만나면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식이다. 이런 한계를 피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인공신경망에 ‘망각’을 더하는 것이다. 학습 중 인공신경망 일부를 생략하면 오히려 새로운 개와 고양이도 구분하는 일반화가 더 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앞서 얘기한 드라마 ‘당신의 모든 순간’은 완벽한 기억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면 언제나 차를 세워둔 장소를 정확히 찾을 수 있고, 매니큐어 컬렉션은 겹치는 색 없이 완벽할 것이다. 그러나 망각 없는 기억은 유연함도 없을 것이다. 결국 어느 정도의 망각은 기억의 결함이 아니라 더 효율적인 기억을 위해 필요한 기능이다.

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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