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부터 현재까지 김권룡은 주로 열쇠로시리즈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시리즈에는
자물통,지구,대문,꽃병,얼굴 등 여러가지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열쇠들은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회화는 평면에서 작가의 기교나 기법, 작품의 내용을 결합하여 공간을 만든다면 조각은 실존의 공간 속에서 작가가 표현하고저 하는 덩어리를
만드는 작업이다. 거기에는 그 어떤 눈속임도 통하지 않는다. 한번이라도 더 갈고 다듬으면 그만큼 더 빛을 발하는 것이 조각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북경 송장예술구에서 자신만의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조선족 청년조각가 김권룡(38세)은 이와 같이 조각예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했다.
그가 조각예술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으나 천부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동네의 상점이나, 리발관, 음식점의 간판을 그려주기도 했고 집에서 쓰는 옷장이나 이불장의 유리에 그림을 직접 그리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김권룡 역시 자연스럽게 미술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됐으며 중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모든 필기장이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도배될 정도였다.
결국 고중진학을 포기하고 그는 진로를 바꾸어 직업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해 미술전공을 선택했다. 이후 2000년, 연변대학 미술학원에 입학하면서 은사
김동운 교수의 권유로 조각전공을 선택하게 되였고 2008년 한국 국립 창원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 2010년 10월에는 꿈에도 그리던 북경
송장예술구에 자신만의 조각작업실을 차리고 이후 본격적인 조각예술의 길을 걷게 되였다.
조각예술은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작가는 어느 한 부분도 대충 넘길 수 없다. 수많은 재료의 선택,
기법, 내용, 표현형식들을 결합해 독창적인 자신만의 작품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김권룡은 늘 ‘인내’와 ‘솔직함’이라는 명제와 부딪치군 했다.
하지만 절대 요행을 바라는 심리로 대충 넘어가지 못했다. ‘창작과정에서 많은 우연성과 마주하게 되지만 그 어떤 우연성이든 작가가 스스로
장악해야만 자신의 것이 된다.’며 그렇게 돼야만 비로소 반복적인 활용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마쳐야 하는지 작가는 분명히 알아야 하며 만약 그 반복적인 작업이 싫증나고 귀찮다고 넘어가버리면 아쉬움은 영원히 작품에 남아있는다. 자신이
스스로를 속일 수 없듯이 작품을 마주한 작가는 솔직할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2012년부터 현재까지 김권룡은 주로 열쇠로 시리즈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에는 자물통, 지구, 대문,
꽃병, 얼굴 등 여러가지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열쇠들은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만나고 헤여지고 부딪히고 감싸주는 인간관계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기나긴 려정이 인생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닐 수 있듯이 타인들이 생각하는 ‘나’ 역시 진정한 ‘나’일 수 없다. 진정한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타인들이 생각하는 ‘나’와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라는 접합점에서 미세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수많은 관계들이 이루어져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된다.”
김권룡은 이처럼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 어떤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의 목표고 의미’라고 말하며 자신의 작품에도 이를 집중적으로
구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아직도 북경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한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대형작품 6점을 북경의 한 광장에 설치하던 때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꾸준히 걸어왔던 자신의 길과 그 길에서 쏟아왔던 땀들이 인정을 받는 순간이 되는 것 같아 기뻤고 작품의 매입으로 생기는 경제수익으로
가장의 책임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에 뿌듯했다고 털어놨다.
김권룡은 “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눈과 귀를 열고 입은 닫고 큰 변화없이 견지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한다”며. “초심을 잊지 않고 더 좋은 작품으로 자신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연변일보 박진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