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 잰말 닭똥 세말 오양간 문 삐꺽 소 음매” 어린시절 말버릇처럼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나이 들어서도 이따금 저도 몰래 입 밖으로 툭
튀여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한겨울 외양간에서 하얀 입김을 쏟아내며 큰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던 둥글소의 착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군 한다.
사전을 펼쳐보면 외양간은 표준어로 새기고 오양간은 방언으로 표기하고 있다. 외양간은 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말이나 양을 기르는 거처를
뜻한다. 연변과 함경도 지방에서는 겨울철의 혹독한 추위로 정지간과 벽을 사이 두고 집채 건물 안에 두었기에 외자가 아닌 오양간으로 부르는 것이
관습으로 되여있고 다른 지방에서는 거개가 집과 거리를 둔 헛간이나 창고에 설치하여 밖을 뜻하는 외자를 달아 외양간으로 부르고
있다.
녀진어에서 집짐승 가축을 뜻하는 의미로 ‘ulha’이란 단어가 있는데 그 음이 연변과 함경도 방언 오양간의 오양이란 소리와 대응된다. 비록
조선반도 전역에서 외양간 방언분포양상이 복잡하게 나타나지만 소, 말, 양,닭 등 가축을 기르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뜻과 소리가 류사한
하나의 언어 그물망에 얽혀있음을 알 수가 있다.
15세기로부터 17세기 두만강 류역의 력사를 훑어보면 오랑캐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 오랑캐라는 단어는 기존의 가축이란
의미로부터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이란 의미로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결국 오랑캐란 말은 이 음을 한자로 옮겨 적은 단어로서 최초에는 한 부족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쓰이다가 차차 두만강 류역에 거처하면서 사실상 외적의 침략을 대신 막아주는 스펀지 역할을 해오던 부족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되여왔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들 오랑캐 무리는 사람의 얼굴은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고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이와
같이 오랑캐를 짐승과 동급으로 취급하고 심지어 짐승보다 못한 야만인 미개인으로 락인찍어 오다보니 민간설화에서는 오랑캐를 ‘五囊犬’라고 풀어가면서
사람 축에 못 드는 짐승으로 둔갑시켜버린다. 오랑캐를 비웃고 철저히 외면하여 왔던 력사에는 우리와 그들이 섞임과 공존으로 인해 력사가 강물 되여
굽이굽이 흘러왔던 것이다. 우리와 가까운 곁에 서서 서로 싸우기도 하고 함께 화평의 시대를 열어왔던 기나긴 세월 동안 우리는 땅을 맞대고 있는
이들과 서로 말을 나누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방언권을 형성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두만강류역에는 오랑캐령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오랑캐령은 강대 세력들의 다툼으로 란리가 났을 때 우리 선인들이 험난한
삶에 쫓기여 연변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놓인 피눈물로 얼룩진 고개길이다. 재난과 가난이 먹장구름처럼 드리워 캄캄했던 그 옛날에 소와 함께
오랑캐령을 넘어 연변땅으로 퍼져 들어와 새와 조이 짚으로 이영을 하고 타래벽을 틀어가며 정지간 옆에 오양간을 지었다. 소는 단순히 가축이 아니라
식구가 되여 선인들과 함께 그들의 고단한 삶을 짊어지고 걸어온 동반자이다.
두만강 그 갈림길에서 말에 올라 칼과 보물을 걸머쥐였던 타민족들과는 달리 소고삐를 잡고 농기구와 씨앗을 움켜쥐였던 선인들의 그 뛰여난
통찰력은 그들이 조상으로부터 세세손손으로 물려받은 농작물 재배기술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산간지대에 위치한 연변에서 소를 리용하여
가대기로 찌갈이 하고 후치로 홰지를 하는 정교한 밭농사 재배기술을 개량하여 연변땅에 소중한 농경문화의 유산을 남겨놓았다.
오양간이란 방언을 따라가다 보면 가축 유목민, 짐승 야만인 등 어휘 의미적 변화과정을 감지하게 된다. 마치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과정에서
점차 다리가 생기고 꼬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굴곡적인 언어변화과정을 펼쳐 보이고 있다. 외양간과 오랑캐란 두 단어는 얼핏 보면 의미적 거리가 먼
어휘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양간이란 방언에서 귀한 실마리를 찾아 가까운 이웃관계에 얽혀있는 단어임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방언은 죽은 송장이
되여 세월의 이끼가 끼고 마모되여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미이라가 되여 선인들의 령혼의 아우라가 되여 오랜 과거와 아득한 미래를 이어주는 긴 시간
축 속에 그 신비한 빛을 뿜고 있다.연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