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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고향에서키운 꿈을사쿠라 나라에서 펼쳐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9.07.29일 10:08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부회장이며 농학박사인 최우림씨 인터뷰



  (흑룡강신문=하얼빈) 진달래 고향에서 태를 묻고/ 뼈를 키우며 자래웠던 꿈을/ 바다 건너 사쿠라 나라에서/ 펼치며 나래치고 있노라 …

이는 최우림씨가 사쿠라꽃이 만발한 올해 3월에 고향의 진달래를 그리며 지은 시 《진달래와 사쿠라》 의 한 소절이다. 진달래 고향에서 태어나 이곳 사쿠라 나라에서 꿈을 펼쳐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듯 싶어 마음을 울린다.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부회장이며 농학박사인 최우림씨도 비록 몸은 고향을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민족의 언어를 잊지 않고,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고 어디에서든지 빛나고 꿋꿋하게 살고 있는 수많은 우리 조선민족의 한사람이다.



  최우림씨 프로필

  1984.7월 연변농학원 (지금의 연변대학농학원)졸업

  1991.7월 길림농업대학 석사연구원 졸업

  1995.7월 북경농업대학 (지금의 중국농업대학) 박사연구생 졸업

  1984.7-1992.8 길림연변려명대학 조교, 강사

  1995.7-1996.12북경시과학기술원 북경시영양원연구소

  1997.1-1999.3 일본국립도크시마대학 의학부 방문학자

  1999.4-2002.3 일본국립건강영양연구소 HS연구원

  2011.3-지금에 이르기까지 MARUEI그릅 이사, 연구소 소장

  

  최우림씨는 마을이 하도 가난하여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웠던 도문시 립봉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수전이 없어서 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에 좁쌀밥과 정부에서 떼어 준 자그마한 땅에 심은 감자나 옥수수가 고작이였지만 이십여호되는 화목한 동네였다 한다.

  어렸을 때 몸이 허약하여 많이 앓았지만 워낙 열심히 하는 성격이어서 중학교졸업 때까지 줄곧3호학생이었고 반장이었다. 그때는 학생이 낫을 들고 호미를 메고 학교에 다니던 때라 그는 무척이나 일도 잘했다.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아들에게 쌀밥을 먹이는 것이 아버님의 꿈이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농민 신분이 아버님의 한이였다. 자주 앓았던 그는 커서 의사나 연구자가 되는 것이 꿈이 였다 한다.

  그러던중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대학입학시험제도가 다시 회복되어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때는 처음으로 중점고중제가 실시된 때라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그는 제일 높은 성적으로 성중점고중인 도문1중에 입학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매일 산을 넘어 4키로 되는 거리를 걸어다녀야 했다. 여름이면 바지가락이 이슬에 흠뻑 젖군 했다. 먼길에 지쳐 친척집에 하숙하게 되였을 때 우연히 장양 (张扬) 작가의 《두번째 악수》 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그는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대학시험준비를 위한 금싸락같은 시간을 독서에 몰붓게 되었다. 그는 특히 이기영작가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고향》과 《땅》은 아직도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 한다. 아마 지금도 글쓰기를 좋아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한다.

  《어떻게나 호미자루를 다루는 농민의 신세를 면해야 한다》는 아버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머리를 동여매고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연변농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연변려명대학에서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행운아였다. 새로 서게 된 인삼, 곰, 수달피 등을 연구하는 특성전업설치위원회에 참가하게 되어 길림농업대학에 1년간 연수를 가게 되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길림농업대학에서 석사공부를 하게 되였고 부인의 격려와 지지로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 중국농업부분의 최고학부인 북경농업대학에서 박사공부까지 하게 되었다.

  

  성공한 남자 뒤에는 여자가 있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소중한 세 여인이 있었다.

  첫번째 여인은 바로 그의 할머니이시다. 저 멀리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계신지 20년도 더 된다고 하시며 할머니의 따뜻한 숨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27살 꽃 나이에 남편을 잃고 세명의 아들딸을 혼자 손으로 키우셨고 손주들까지도 돌봐주셨다.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마다 할머니가 곁에서 꼭 끌어안아주시어 견딜 수 있엇던 것 같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최우림씨가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3개월 뒤에 마치도 시름놓으신듯 돌아가셨다고 한다.

  두번째 여인은 초등학교2-4학년때 담임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남달리 그를 총애하시고 짬짬의 시간을 이용하여 웃 학년 교과서를 가져다가 따로 배워주셨다 한다. 여러가지 참고자료도 제일 먼저 가져다주시군 햇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모두 다 반주임선생님께서 머리를 틔여주시고 기초를 잘 닦아주신 덕분인 것 같다고 한다. 선생님은 지금도 고향에서 에 심혈을 기울이고 계신다 한다.

  세번째 여인은 바로 부인이다. 쉽지 않은 박사공부까지 견지한 것은 부인의 도움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부인은 연변농학원 동창이였고 수석으로 연변농학원을 졸업했다고 한다. 남편의 박사공부 뒤바라지를 하기 위해 대학교 교사직을 버리고 북경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가정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켰고 낯선 일본땅에서는 식당일, 공장일을 가리지 않고 도맡아하였다. 최우림 씨는 공부를 해도 일을 해도 부인이 더 잘하셨다고 한다. 가정형편이 좋아지면서 부인은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석사, 박사공부를 끝마쳤고 세개 대학에서 강사로 계셨고 중일대조언어학회이사며 국제련어론학회상무이사로 활약하셨다 한다. 3년전에 갑자기 부인을 병마에 빼앗기고 나서야 비로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말의 진정한 뜻을 알았다고 한다. 30년 가까이 비가 오고 폭풍우가 쏟아져도 항상 곁에 있어주었기에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25년전 북경에서 아들 생일 때 찍은 사진.

  

  최우림씨는 1995년10월에 북경에서 있은 아시아영양학회에서 일본 도크시마 대학교의 한 교수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가 발표한 논문을 보고 그 교수님이 요청장을 보내와서 일본에 오게 되였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일본도크시마 대학에서 알레르기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7살난 아들애와 부인도 같이 일본땅을 딛게 되였다. 그때 당시 최우림씨가 쓴 시이다. 가족을 위해 그 어떤 곤난이 닥쳐도 헤여나가려는 그의 굳은 결심과 용기를 엿볼 수 있다.

  바다의 삶

  바다를 보지 못하고 바다로 나오기 전에는 / 바다를 아름답게만 여겨왔습니다. / 푸른 물에 비낀 아침저녁노을 / 물보라 안겨주는 그 격랑을 / 또 자유롭게만 헤아릴 수 있는 걸로 알았습니다.

  정작 바다에 나오고 보니 / 바다는 고통으로만 가득 쌓인 것입니다. / 일망무제한 방향을 헤아릴 수 없는 / 바다는 또한 짜기도 쓰기도 합니다.

  또 배에서 내리면 설 수도 없습니다. / 배 타고 바다에 나온 내가 / 나 혼자 스스로 헤여가는 선장입니다. / 배가 방향 잃지도 않고 번져지지도 않게 / 튼튼히 키를 잡아야만 하고 / 태운 이들에게 고통도 적게… / 꾸준히 가노라면 대안일 겁니다.

  풍랑을 헤여가는 내가 / 다시 없는 장사로 될 거고 / 배 탄 이들도 자랑스럽게 격정 넘치는 / 그 항로 되새기게 될 겁니다.

그는 가끔씩 돌이켜보면 그의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중국에서 직장 다니면서 그리고 일본에 와서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최우림씨는 여러 사람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 이제는 보답하고 싶다고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로, 제일 잘하는 일로 나라와 국경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지금의 꿈이라고 한다. 그는 이십여년간 인체의 건강과 식품관련의 연구개발에 종사해왔다. 그는 지금 MARUEI 그룹 (건강식품천연소재무역상사) 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끊임없이 신체건강을 위한 보건품의 연구개발에 심혈을 다하고 있고 거룩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가 발표한 논문은 2015년 중국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에 VIP 초대를 받았고 우수 논문 1등상을 수여받았다. “日刊ゲンダイ”등 일본 중국 여러 신문사의 취재도 받아 화제가 되었다. 그는 3년간 중국과학자포럼 상무이사로, 중국과학자협회 부이사장으로 활약하였다.



  

  우리의 문화를 사랑하고 우리 글을 사랑해 온 최우림씨는 다망한 일상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돌아오는 11월4일날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 는 일본 조선족 각 사단법인, 중국 각지의 조선족사회단체 그리고 한국 조선족사단법인과 협력하여 “세계조선족문화절및동경포럼”을 기획하고 있다. 총 1500명이 참가하게 되는 이번 문화축제는 경제계, 학술계, 예술계의 각 계층 인사들과 조선족 각 계층의 대표들로 자리를 빛낼 예정이다. 최우림씨는 부회장으로서 이번 문화제를 성공시킴으로써 우리의 조선족전통문화를 일본에 있는 조선족뿐만 아니라 일본사회, 더 나아가서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서로 교류하면서 우리 조선민족의 더 휘황찬 미래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고 한다.

《비온 뒤에 땅은 굳어지는 법》 최우림씨는 힘든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고 있는 후배들한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언제나 한치의 꾸밈이 없이 거둔 성과보다는 더없이 겸손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최우림씨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신체건강을 위해, 우리 조선민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한걸음 한걸음 신중하게 힘차게 내딛고 있다.



  일본문화교류협회 문화축제준비 3차회의 때 찍은 사진(앞쪽 오른쪽으로 세번째)

/리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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