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니하, 삼원포에서 신흥의 흔적을 찾다(상)
김창영
얼음이 갓 풀려 유난히 푸른 혼강의 물결을 흔상할 겨를도 없이 일행은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길에 올라야 했다. 이제 남은 일정은 신흥무관학교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 밖에 없으나 신흥무관학교의 흔적이 남아있는 합니하유적지는 통화현 광화진 광화촌에, 경학사유적지는 류하현 삼원포진 추가가에, 신흥강습소유적지는 류하현 고산자진 대두자촌에 있는지라 오늘내로 소화하기엔 벅찬 일정이 아닐 수 없다.
리진룡장군 기념원에서 이곳에 올 때 안상경 소장 다큐팀이 30분 정도 먼저 도착한 점을 고려하여 일행은 환인현성에서 이곳에 온 길을 포기하고 안상경 소장 다큐팀이 리용한 길을 선택했다. 명지한 결정이였다. 환인현성을 거쳐 올 때는 약 한시간 40분 가량 걸린 것이 하로하조선족향, 보달원진을 거쳐 우모오진(牛毛塢鎭)에서 단통고속도로에 오르기까지는 한시간 10분 가량 걸렸다.
봉고차가 단통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전정혁 주임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은 류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세워졌던 경학사로 시간적으로 앞섰으나 이번 답사에는 편리를 위해 통화현 광화진 광화촌에 있는 합니하 유적지를 먼저 답사하고 류하현 고산자진 대두자촌의 신흥강습소 유적지, 경학사 유적지를 순으로 답사한다고 소개했다.
봉고차가 환인현성과 길림성 통화시 외곽을 에돌아 통화현 광화(光華) 출구를 빠져나올 때는 이미 오후 한시 20분을 넘기고 있었다. 다행히 광화촌 합니하 유적지는 고속도로 출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15분 정도 달려 도착할 수 있었다. 전정혁 주임은 이번까지 여덟번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광화촌 앞으로 합니하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전정혁 주임은 합니하 건너편 언덕 우 동네를 가리키며 행정상 "광화7대"로 되있으나 로인네들은 지금도 "고려촌"이라 부른다고 소개했다. 현재 이 마을의 밭은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농사짓던 둔전이였고 집터는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였다. 지금은 논밭으로 변해있으나 합니하를 사이두고 "고려촌"과 마주한 산기슭의 너른 평지가 옛날 신흥무관학교 교실과 훈련장이였다.
합니하 유적지에 대한 리해를 돕기 위해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에 나오는 주인공 김산(신흥무관학교 학생이였음, 1923년 상해서 공산청년동맹 가입, 1925년 광주 중국공산당 가입, 1938년 반혁명죄와 간첩죄로 처형당함, 1983년 억울함을 시정받음.)의 추억담을 여기에 옮긴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합니하에 있는 조선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 아주 신중한 이름 아닌가! 하지만 내가 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들은 겨우 열다섯살 밖에 안 된 꼬마였던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입학 자격 최저 년령이 열여덟살이였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내 기나긴 순례 려행의 모든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학교측은 나를 례외로 대우하여 시험을 칠 수 있게 했다. 지리, 수학, 국어에서는 합격이였지만 국사와 엄격한 신체검사에서는 떨어졌다. 다행히 3개월 코스에 입학하도록 허락받았고 수업료도 면제받았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여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열여덟살에서 서른살까지의 학생들이 백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학생들 말로는 이제까지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내가 제일 어리다고 하였다.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 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였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였다. 이른바 게릴라 전술 훈련이였다. 다른 학생들은 강철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등산에는 오래 전부터 단련되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그들을 뒤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등에다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지지 않았을 때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그날'을 위해 조선의 지세, 특히 북조선의 지리에 관해서는 주의깊게 연구하였다. 얼마간의 훈련을 받고 나자 나도 힘든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러자 훈련이 즐거워졌다. 봄이면 산이 매우 아름다웠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으며 기대에 넘쳐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 소냐?"
그랬다. 청명을 앞둔 합니하의 산천은 바야흐로 푸름을 터뜨리는듯 했다. 여기가 신흥무관학교 옛터였다는 사실을 알려줄 표지석 하나 없어도 해마다 봄이면 새싹 틔우는 산천은 기억하고 있으리!(다음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