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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파를 헤쳐온〈손풍금 타는 총각〉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08.22일 09:11



1962년 여름 돈화 대구촌에서《손풍금 타는 총각》창작을 마치고 경박호로 가는

똑딱선에서

조선족음악사에서 대표적인 애정가요의 하나로 처음 창작된《손풍금 타는 총각》은 창작과정도

너무 인상깊고 또 그로 하여 겪은 세상살이도 웬만하지는 않았소.

대구촌의 열정과 손풍금 소리

1962년에 연변문련계통에서 창작회의를 조직하면서 김철시인이 우리 문예계 창작일군들과

시인, 미술가, 촬영가들을 이끌고 돈화의 대산지역 대구(大沟), 서구(西沟), 소구(小沟)가 있는 조선족마을로 창작하향을 갔댔소.

대구촌에서는 연변가무단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프랑카드를 내걸고 연회를 베풀면서 접대를

했었지. 공사간부들도 일년에 한두번 올가말가 하고 공량도 내도 되고 안 내도 되는 이런 치벽진 산골로 연변가문단이 찾아온다는 건 대구촌의

희사이며 영광이라고 촌민들은 그토록 반겨주었댔소.

대대주임은 고혈압이 200도도 넘지만 이렇게 기쁜 날에 어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겠냐며60도 ‘빼갈’(흰술)을 사발에 부어서 모두 함께 들자고 권주 ‘호소’를 했지. 그러니 젊은이들이 나서서 우리 창작조 8명앞에 흰술을

한사발씩 부어놓았소. 술을 마실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귀를 잡고 마구 부어넣다싶이 권했지.

한창 취기가 오르는 판에 한 로친이 일어나서 춤을 추자고 하는 것이였소. 그 로친은

허술한 북을 둘러메고 집과 집사이를 누비며 동네돌이를 하는데 어찌나 세게 북을 쳐댔는지 북이 구멍이 다 뚫렸댔소. 북이 안 울리니 북통을 마구

잡아두드리며 장마비로 물이 고인 땅을 피해 걷다가 그만 김치움에 빠지기도 했지.

그렇게 대환영을 받으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소. 지금은 고인이 된 김창석선생은 아주 점잖은

분인데 그가 ‘손풍금 타는 총각’이라는 가사를 써낸 것이였소. 김창석 선생이 주숙을 정한 집 총각이 키꼴이 훨씬 크고 인물도 잘났는데 저녁이면

그냥 손풍금을 치며 동네 노래를 잘하는 처녀한테 련애를 거는 것을 발견하게 되였소.



창작하향의 하루,

앞줄 왼쪽 두번째 김창석선생과 함께

김창석선생은 여기서 계발을 받고《손풍금 타는 총각》을 써냈는데 나는 그 가사를 보는 순간

혹시 나를 노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피뜩 들면서 제꺾 채다싶이 하였지. “야- 이 가사가 훌륭하구만.” 라고 하며 내가 곡을 붙이겠다고

자진해나섰지.

일터에서 말없이 일만 하던 저 총각

밤이면 이때마다 손풍금을 타네

달빛도 청량한 칠월의 밤

마을에 들려오는 손풍금 소리

누굴 들으라고 신나게 타느냐

누굴 들으라고 신나게 타느냐

신나게 타느냐

며칠후 그 동네 작은 집에서 창작자들과 촌민들이 같이 모여앉아 작품발표회를 하고 평의를

하였는데 《손풍금 타는 총각》이 대단히 환영받았지. 시원시원하고 정서적이라고.

그번 창작회의를 마치고 배(똑딱선)를 타고 경박호로 가면서 우리는 계속 《손풍금타는

총각》만 연주하며 송화강물길 따라 흘러갔소. 그후 각 지방

문화관들에서 이 노래를 보급하게 되면서 두만강변의 여러 마을 젊은이들이 일은 안하고 《손풍금 타는 총각》만 노래부른다고 생산대장이랑 공사주임들이

막 의견을 제기했소. 그러니 이 노래가 청년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썩 후에 김철씨가 흑룡강성작가협회 초청을 받고 경박호 구경을 가게 되였는데 숙소를 정한

주인집이 마침 《손풍금타는 총각》의 주인공이 련애를 걸던 처녀네 집이였다고 하더구만. 인연이면 천리밖에서도 만난다더니.



1965년 11월

반석현 연통산향 신립촌의 사생들과 함께(뒤줄 왼쪽 첫번쩨 동희철 두번째 김경석)

요지음 연변연극단의 무언극 소품에서도 《손풍금 타는 총각》이 등장하였소. 참 감동적인

장면이였지. 령감은 치매에 걸린 로친을 살리겠다고 약을 사다 먹이나 효과를 보지 못하니 부들부들 떨리는 두손으로 하모니카를 잡고 《손풍금 타는

총각》을 부는 것이였소. 젊은시절 연애를 할 때 함께 부르던 노래를 회상시켜주느라고 그러는 것이였지.

나도 처음 그런 소품을 보았소. 참, 누가 그런 구상을 했는지. 배우들도 연기를 어찌나

잘하는지 가슴이 찡해나더구만. 그때 사랑에 설레이던 청춘남녀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사랑을 맺고 결혼한 사람들이 지금도 잘살고 있고 또

오락장소에 나서면 부부동반으로 이 노래를 주제곡으로 많이 부른다고들 하더구만.

젊은 시절 좋아하던 노래는 일평생에 영향준단 말이요.

《벼꽃타령》을 부르다 말고 첫 과녁이 된

《총각》

60년대에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사업하시던 최채동지께서 길림성의 소수민족문예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1965년도에 길림성민족문공단을 설립하였소.



1965년 11월

25일 길림성민족문공단 창작조 조장 동희철(가운데)과 김경석(오른쪽) 리황훈(왼쪽)이 길림 북산공원에서

그리하여 김경석동무랑 작곡가 리황훈 셋이서 장춘에 있는 길림성민족문공단 창작조에 가

사업하게 되였소. 그해 길림성내 순회공연을 몇달 앞두고 우리는 이불짐을 지고 도보로 반석현 진교향 집중촌(마이정자-蚂蚁顶子라고도 불렀음)에

창작하향을 내려갔게 되였지.

이 촌에서 농업과학실험으로 소문난 농민육종가이며 당지부서기인 김명규의 농업과학실험 사적을

취재하였소. 김명규는 과학실험소조를 뭇고 우량종자를 인입하고 꾸준히 대비실험을 하여 연변보다 무상기가 10여일이나 짦은 고장에 알맞는 우량품종을

길러내였으며 대면적에 보급하여 해마다 다수확을 거두는 성과를 이루어내였소. 그의 사적은 참으로 감동적이였지.



반석현 진교향 마이정자촌에서 벼육종가 김명규

서기(오른쪽 세번째)를 취재하고 돌아오는 길에서(오른쪽 두번째 동희철, 왼쪽 두번째 김경석)

김경석동무는 '천하지대본'인 농사와 과학영농, 희한하지는 않지만 인류의 생계와 련계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벼꽃, 한평생 농사짓는 농민들의 애국심과 부유의 념원을 《벼꽃타령》에 형상화하여 담아냈던 것이요.

벼꽃일세 벼꽃일세 변강산천 벼꽃일세

해와 달을 벗님 삼아 하늘 땅을

길들이고

천년진펄 개량하여 과학실험 하였더니

무상기가 짧은 고장 하얀 벼꽃 만발했네

……

벼꽃일세 벼꽃일세 아름다운 벼꽃일세

농사짓는 우리 지성 포기마다 어려있고

그러니 이 가사에 맞춰 농민들이 즐기는 민요풍으로 작곡을 완성하였더랬소. 이 노래는

이듬해 1월 문공단 공연프로로 확정되여 강신자가수의 독창으로 청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지.

그리고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록음하여 방송할 때까지 여러번 수정하고 다듬었소. 그 때는

연변가무단의 박정자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서 청중들에게 익숙한 가요로 되였고 후에는 해내외를 대상하는 북경의 국제방송을 타면서 더욱 그 영향면을

넓히게 되였던 것이요.

김경석동무는 먼 후날 그 창작과정을 돌이키며 “50년대에 〈고향산기슭에서〉를 창작할

때처럼 작사자와 작곡자가 한 단위에서 사업하며 함께 현지에 가 생활체험을 하고 생활속에서 받은 감수, 시적발견 그것을 예술적으로 구현하려는

의도나 수법 등 면에서 공동성이 있었기에 가사와 가곡의 자연스러운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었고 민요풍의 새 가요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고

하였소.



길림시 북산공원에서

길림성민족문공단 배우들과 함께(왼쪽 두번째 동희철 오른쪽 세번째 김경석)

이렇게 김경석동무와 함께 일손을 맞춰가고 있는데 1966년 5월 경에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나는 연변라지오방송국으로 돌아왔더랬소. 그런데 연변라지오방송국의 문화혁명은 《손풍금 타는 총각’이 독초냐 향초냐?》 하는 첫장

대자보로 시작되는 것이였소.

하루는 출근을 했는데 대문에 대자보가 크게 나붙어 있는 것이였소. 처음엔 나도 놀랬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손풍금 타는 총각》이 독초일 수는 없다는 배장이 생기더구만. 그럼에도 단위의 1층 복도에서부터 2층까지 나의 작품이

독초라는 대자보가 꽉 차고 넘쳤소. 그리하여 나는 나쁜 작곡가로 된 것이였지.

나는 결국 음악편집을 못하고 변소청소도 하고 육체로동을 하면서 ‘로동개조’를 하게

되였지. 그리고 온 가족이 돈화현의 한 편벽한 시골에 내려가 모진 고생을 하였소. 그러다보니 안해의 고생은 말도 못하고 자식들도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

길림신문 글/ 김청수 영상사진/ 김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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